[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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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같은 현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여기 우리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범주에 있는, '평화'에 닿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창녀인 어머니는 어느날 갱단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어머니의 시체 밑에 깔려있던 소년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한참 뒤 시체 밑에서 기어나와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낑낑거리며 벗긴 아버지의 값나가는 클락스 신발을 들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간다. 다시 집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갱단을 피해 소년은 뛰고 또 뛴다.


한 여성은 통행금지 시간에 길을 걷다가 경찰을 만나게 된다.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강압적인 말에 경찰차에 타지만 강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 뿐이 아니다. 뒤뜰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발가벗고 있다가 강간범으로 몰려 경찰에게 고문을 당하고, 멀끔하게 차려입었다고 혹은 잘사는 동네에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로 바빌론의 습격을 당한다. 아이들은 총을 들고 여성들은 성을 팔고 남성들의 권력다툼에 죄없는 이들이 죽어나가고 노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밥 말리 살해 기도'라는 1976년 12월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자메이카의 한 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았기에 정치, 인종, 젠더, 사회, 마약범죄 등 다양한 주제가 한데 어우러져 당대의 씁쓸한 역사를 실감나게 표현해냈다. 특히나 새로운 형태의 구술 서사 방식은 인물들의 실제 생각을 실시간으로 엿듣는 것처럼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때문에 나도 마치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듣고 소감을 적는 느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평화, 그 이면

심지어는 평소 최악의 상황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랬어. 겨우 두세 달이지만 평화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하더니 그다음에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평화밖에 없었다네. 마치 비가 오기 전에 불어오는 바람에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밥 말리. 그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평화를 울부짖는 그였기에 그를 신처럼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평화를 믿지 않는 이들에겐 아니꼬운 존재일 뿐이다. 정치적 공작 속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자메이카에서 평화를 살해하기 위해 CIA가 개입하고 갱단의 2인자인 조시 웨일스를 주축으로 습격멤버가 꾸려지는데 그 속엔 아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파파-로. 코펜하겐시티 갱단의 보스인 그는 몇해 전 등교 중이던 학생을 실수로 쏘아죽였다.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 잔악무도했던 그가 변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를 변하게 한 것은 죄없는 소년을 죽이고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않았던 자신에게 느끼는 환멸이었다.


소설 초반부에 이런 대목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 영어가 제일 중요하니 제대로 익히라고. 배관공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일을 못하게 될 거라는 말. 그것은 곧 자메이카에는 미래가 없음을 뜻한다.

파파-로의 오른팔 조시 웨일스는 새로 온 CIA요원과의 만남에서 흑인이란 이유로 자신을 멍청이 대하듯 느릿느릿 말하는 요원의 태도에 비웃지만 조시 웨일스는 이빨을 숨기고 장단을 맞춘다.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갱단과 지시는 내리지만 뭣 모르는 CIA요원과의 접선장면은 허탈한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도카스 파머가 고용지원센터에서 겪는 차별 역시 언어와 흑인이라는 외모에 있다.


나는 그자가 나를 해고하기 전에 그만뒀다. 그리고 미스 벳시에게 똥이야 얼마든지 퍼주겠지만 다 시들어빠진 백인 성기에는 아무 볼일이 없다고 말했다. 미스 벳시는 내가 그 말을 하는 내내, 심지어는 이 고용센터가 늙은이들을 보너스로 교육시켜주는 본업상 사창가냐고 물을 때조차, 내가 표준 영어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자메이카의 여성상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니나 버지스라는 인물이었다. 1,2부에서 그녀는 돈과 권력을 가진 가수의 집에 매일같이 찾아가 하룻밤 상대였던 자신을 그가 기억해주기를, 그리고 자메이카라는 지옥에서 구해주기를 바란다. 말은 커녕 가수의 얼굴조차 볼수 없지만 아무리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듯 매일같이 그의 집 앞에 찾아가는 일을 멈출수 없다. 보이지 않는 동아줄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권조차 없다. 다음은 그녀의 불안감과 무력감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나는 범죄를 실제로 경험하지는 않지만 그게 나한테 영향을 준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떠나고 싶어진 건 실제로 발생한 범죄 때문이 아니라 범죄가 언제든, 지금 당장, 심지어는 다가오는 1분 안에라도 벌어질 수 있따는 그 가능성 때문이다.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 언제든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더라도, 중요한 건 내가 그런 일을 기다리고 있게 된다는 점이다. 자메이카에서는 뭔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마냥 기다리는 건 충분히 나쁜 일이다.


그렇게 염원하던 탈출에 성공하지만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굴욕적인 일을 감내하고 또 다시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느리지만 꾸준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이렇듯 1권에서 니나 버지스는 타인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주길 희망하는 수동적인 모습보였다면, 자메이카 밖에서의 그녀는 여러 장벽에 부딪치지만 마침내 스스로 자립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작가 말런 제임스 역시 니나 버지스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극적이진 않지만 아주 현실적인 희망말이다.






2015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집필하는 데만 4년이 걸린 대작이다. 두 권을 꽉꽉 채우고도 아직 할말이 더 남아있을 것만 같은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을 그려낸 작가의 필력과 그 분위기를 잘 살려낸 번역이 있었기에 자메이카란 생소한 나라와 부족한 역사지식에도 불구하고 빠져들어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었다. 말런 제임스 그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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