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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형리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한 노인이 있다. 40년 넘게 수사관으로 일하며 명성을 떨친 그는 지금 동료 경찰관의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 와 있다.
가만히 마을 아래쪽 포도밭을 내려다보던 그가 말했다.
"금년의 포도주는 어떤가?"
"좋습니다. 나중에 시음해보실 수도 있습니다."
"참 그렇군. 새로 빚은 포도주 한잔 기꺼이 마시고 싶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발치에 걸린 작은 금속 조각 하나.
"총알이군요." 블라터가 말했다.
"어떻게 찾으셨지요? 경감님!" 클레닌이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우연이었네."
그것은 진짜 우연이었다. 범죄드라마는 많이 봤지만 탐정소설은 생소한 나에게 뒤렌마트식 이야기는 낯설음 그 자체였다.
주인공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데도 곧이 곧대로 믿지 못하고 뭔가 숨긴다고만 생각했다. 동료 경찰관이 죽은 사건 현장에서 포도주 얘기가 웬말인가.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자신의 수사를 함께할 조수를 지명하지만 정작 일은 그 조수가 다하고 주인공 베르라하의 태도는 의뭉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진척없어 보이던 수사가 진행될수록 베일에 가린 진실과 함께 베르라하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베르라하, 그는 어떤 인물일까.
영웅은 없다.
<판사와 형리>, <혐의> 두 개의 단편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노수사관 베르라하는 냉철한 수사력을 지녔지만 불치의 병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산다. 수사를 하면서도 중간중간 병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또한 이 새로운 유형의 주인공은 사건해결 방식도 남다르다. 법체계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권선징악을 행한다. 저래도 괜찮은 걸까하는 고민은 독자인 내가 했다. 작가는 왜 주인공에게 많은 제약을 주었을까.
뒤렌마트는 소설 속 인물을 악인은 강하게, 주인공은 나약하게 설정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우연에 의해 지배받으며, 나약하고도 평범한 개인이 꿋꿋하게 거대한 악에 맞서는 모습을 그린 것은 우리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보여줌과 동시에 일말의 희망을 안겨준다. 영웅은 없지만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다.
"아마도 가스트만은, 여기 찌그러진 방 안에 앉은 우리 세 사람을 몽땅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선행을 했을 겁니다. (중략) 내가 그 사람을 악하다고 칭하는 것은, 그는 내가 그에게 치부하는 악을 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전한 기분에서, 불현듯 떠오른 착상에서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뭔가를 성취하려는 목적에서 악을 행하는 법이 결코 없을 겁니다. (중략) 아마도 그는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때 악을 행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항상 두 가지 경우가, 즉 선악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결정을 내리는 건 우연입니다."p.90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뉠수 없다. 완벽한 악인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우연히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기도 하는 사람만 있을 뿐. 두 단편 모두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저변에 깔려있다. 그는 계속해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끝은 권선징악
"거물 악한은 풀어주고, 조무래기 악당은 가둡니다. 요컨대 세상에는, 신문에 날 만큼 눈에 띄는 살인보다 단지 약간은 유미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돌리지 않는 범죄가 한 무더기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범죄들도 환상을 갖고 엄밀히 살펴보면 신문에 난 살인과 똑같은 범죄란 말입니다. (중략) 그런데 정작 추적해야 할 돈벌이 야수, 진짜 거물급 짐승들은 마치 동물원 안에 있는 것처럼 국가의 보호를 받는단 말입니다."p.148
"선과 악은 다시 떨어지기에는, '이것은 잘됐고 저것은 잘못되었다, 이것은 선으로 통하고 저것은 악으로 통한다'라고 말하기에는 이 인류가 낳은 지옥과 천국 간의 저주받을 결혼의 밤에 너무나 깊이 서로 엉켜버렸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을 이미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복종이나 우리의 항거가 어떤 사건을 초래하는지, 우리가 먹는 과일, 우리가 자식들에게 주는 우유와 빵에 어떤 착취, 어떤 유의 범죄가 들러붙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희생자를 보지도 않고, 그에 관해 아는 바도 없이 살인을 하지요. 그리고 살인자가 알지도 못하는 새에 살해당합니다."p.246
1950년에 발표된 <판사와 형리>는 출간 직후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교과서에도 수록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한 탐정소설로 치부될수 없는 철학적 사유와 힘이 담겨있는 이 글은 분명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 베르라하처럼 그 방법이 조금 다른들 어떠하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대환영이다.
모두 일어나 동물원 안에 있는 야수를 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