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비상구 - 기후위기 시대의 에너지 대전환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4
제정임 엮음 / 오월의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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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재난이라는 말을 실감했던 때는 9년 전의 일이다.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그 사고는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외신도 앞다투어 시시각각 상황을 보도했다. 방사능 누출과 피폭이라는 낯선 단어가 주는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특히 인접국인 우리나라는 방사능 비로 인해 한동안 집단 패닉을 경험하기도 했다. 학교를 재껴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그렇게 느닷없이 내 삶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일본산 식재료 불매는 자연스런 수순이었고 이제는 번거로움조차 느끼지 않을 만큼 일상이 되었다. 조심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문제였기에 나는 이때껏 재난을 내 영역 밖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 비상구>는 이러한 문제의 시선을 외부에서 내부로, 남의 나라가 아닌 내가 딛고 선 조국으로 집중 조명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가동되는 원전은 총 24기이며 원전 밀집 단지(가동 원전 6기 이상) 보유수, 원전 반경 30킬로미터 이내 인구수에서 모두 세계 1위를달리는 실정이지만 높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대비책도 예산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1인당 플라스틱 사용량이 가장 많은 나라, 세계 4대 기후 악당이란 타이틀은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할 뼈아픈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언제나 약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부의 전원개발촉진법과 이명박 정부의 전폭적인 원전 사업 지원이 지금의 견고한 벽을 만들었는데 기자들은 그러한 현실을 허물기 위해 그동안 소거돼왔던 발전소 주변 거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생계수단도 잃고 암에 걸렸지만 곤두박질 친 집값 탓에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주민들의 사연은 참으로 절망적이다. 지역발전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발전소 유치에 동의했지만 이렇게 가위질 당한 정보에 속는 게 비단 일부의 일이 아니었다. 찬핵 세력의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여론 조작으로 우리가 이미 값싸고 안전한 에너지라는 허상 위에서 그 위험성을 망각한 채로 살아왔단 사실은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이룩한 원전마피아들의 견고한 카르텔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태가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블랙스완은 언제든 가능하다. 경주 방폐장 주변으로 흐르는 지하수와 처리 방법도 없이 계속 쌓여가는 핵폐기물의 존재는 생각만으로 아득해진다. 이미 이상기후 현상은 너무나 잦아졌고 더 이상 무책임하게 다음 세대를 기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우리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삶을 떠나보내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지구촌이 멈추자 세계 곳곳에서 오염된 자연이 경이로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 정녕 마블의 악당 타노스가 옳았던 것일까? 인류는 해악적 존재일 뿐이라는 무력감에 빠져있던 찰나 희미한 희망의 빛을 발산하는 비상구를 발견했다.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단 하나의 데이터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열의로 완성된 학생 기자들의 <마지막 비상구>는 실태 고발과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전문가들의 의견과 선행 사례를 토대로 인류와 자연이 충분히 공생가능한 관계임을 증명한다. 가시밭길일 거라 예상했던 탈원전, 탈화석연료로 가는 길은 세계 곳곳에서 보란 듯이 정반대의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값싸고 안전하며 경제 성장은 물론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하다! 특히 에너지 프로슈머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인상적이어서 하루빨리 활성화되길 고대하는 바다.



불과 몇 해 전, 애꿎은 고등어가 미세먼지의 책임을 져야했더랬다. 국가가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현안을 알리는 대대적인 환경 캠페인이 조성되기를 소망해본다. 갈 길은 멀지만 어쩐지 전처럼 무력감은 들지 않는다.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샴푸와 바디워시 대신 사용할 비누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사라져가는 봄의 정취를 아쉬워만할 게 아니라 움직여야 했다. 부디 이 글이 마지막 비상구로 가는 한 점의 이정표가 되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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