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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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에 대해서뿐 아니라 읽을 수 있다는 그 기적에 놀라 숨이 막히길 바란다." p.357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도입부에 실린 제임스 보즈웰의 새뮤얼 존슨전 인용문이 인상깊다. 한 남자가 어떤 신사의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얘기하던 중 깊히 몰입한 나머지 급격한 감정변화를 보인다. 시차에 인지적 오류가 발생하여 신사의 총구가 당장 눈앞에서 소중한 것을 위협하기라도 한듯 상념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앞으로 읽게 될 소설 전체를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은 머리말부터 시, 주석과 색인 모두 소설로 취합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게임처럼 미로에 들어가는 길(읽는 순서)를 독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단번의 독서로는 온전한 재미를 얻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머리말에서 이 시의 주석자이자 편집자인 '찰스 킨보트' 박사는 독자들에게 관례를 무시하고 본문인 시보다 주석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는데 짐짓 자연스러워보이는 이 과도한 친절은 사실 그의 계략인 셈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도달점은 같아도 여정의 조망에 차이가 있으니 텍스트가 꼭 퍼즐과 같다. 앞서 나보코프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 명확하고 분명한 비평 연구 자료를 비비 꼬고 뭉그러뜨려 기괴한 소설 비슷한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p.111 라며 참으로 발칙한 발언을 했더랬다. 주석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독자를 매료시키고 때때로 리드미컬한 희곡을 읽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 이 기괴한 걸작은 당신을 눈멀게 하기에 충분하다.




소설은 크게 세 줄기로 나뉜다.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에 결여된 '인간적 사실성'에 대한 보충(주석)과 젬블라의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의 일대기, 그리고 망명왕을 처단하려는 '그라두스'의 여정. 방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왕의 훌륭한 통치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젬블라 왕국에 반란이 일어나고 폐위를 거부한 친애왕 카를 크사베리는 호화로운 투옥생활을 하던 중 비밀 통로를 통해 탈출에 성공한다. 여차저차 미국으로 건너간 왕은 새로운 신분으로 천재 시인 '존 셰이드'의 이웃 사촌이 되고 젬블라 왕국사가 아름다운 언어로 탄생되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시인을 향한 엄청난 집착을 불러오는데, 그가 바로 우리의 주석자 킨보트 되시겠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머리말에서 낌새를 챘겠지만 캐릭터가 범상치 않다. 초장부터 시인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주석자의 자질에 대한 세간의 의구심을 질투로 치부해버리며 신랄한 언사(암살자 그라두스를 가리켜 박쥐와 게의 잡종같이 생긴 그로테스크한 외모라 일컫는 등)는 물론, 시를 제멋대로 해체하는 등 흡사 걸작에 편승해 본인의 전기를 펼치는 모양새이니 신뢰감은 바닥을 뚫는다. 또한 동성애자왕국에서 온 통치자답게 정원사를 스카웃하는 기준도 남다른 남색의 왕 되시겠다. 거기다 그의 여성혐오주의적인 면모는 시인의 아내 '시빌'과 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절정에 달하는데 일례로 그녀의 색인 항목에 주석 번호를 기입하는 수고조차 아끼는 한결같은 태도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세계를 누빈 학자와 화롯가에 앉은 시인. 이들간에 존재하는 여러 공통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7월 5일로 출생 일자가 같다. 존의 아버지 새뮤얼 셰이드는 생전에 '깃털 달린 종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셰이드종의 여새(봄비칠라 샤데이)가 존재한다. 카를의 아버지 알핀왕은 비행기 사고로("이 비행기는 그의 운명의 새가 되었다." p.132) 목숨을 잃었으며 킨보트와 셰이드 모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리고 시빌 셰이드의 젊을 적 초상(肖像)이 킨보트의 아내 디사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과 어릴 적부터 시작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그것이다. 이들의 평행성은 무엇을 뜻할까. 정말 킨보트는 허구의 인물일까, 아님 우상시한 인물에 대한 동경으로 날조한 주석에 불과한가. 워낙 다각적 측면이 있는 소설이기에 해석의 향연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전자에 대한 것은 나보코프만이 알 것이고 후자로 논하기에는 셰이드를 대하는 킨보트의 태도에 분명한 양면성이 존재한다.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로 추앙하면서도 "'창백한 불꽃'같이 [템페스트]등등에서 인용한 표제를 맹렬히 비난, 671" 하고, 숙부 '콘말'과 시인을 한데 묶어 비웃으며 자신의 우월감을 표출하기도 한다("작가란 세상을 알아야 하고, 중략… 노란 상아탑 안에서 노상 명상만 하고 있어도 안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존 셰이드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p.352).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백한 불꽃 제 1편에 두 차례 등장하는 이 구절은 존 셰이드의 유전적 요인으로 인한 육체적 불편과 자신을 닮은 딸 '헤이즐'로 인해 겪었을 고통의 심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나의 신은 요절했다." 99행과 스스로를 괴짜라 칭하는 대목 역시 그 의미를 나란히 한다. 그런데 이 시행은 꼭 홀로그램 같다. 처음과 끝을 이어 창작자 대신 완결을 낸 이의 처지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니 말이다. 그러니까 주석 부분을 끝마치고 시로 넘어갈 때만 해도 '죽은 여새'는 셰이드를, '그림자'는 킨보트를 뜻하며 고인이 된 시인의 유작을 읽고 나서야 그가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었음을 깨닫고 느낀 허탈한 심정을 대변한 구절이라 느꼈다. 그런데 마지막 1000행, 즉 미완의 999행이 끝난 뒤 다시 1행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 대목은 똑같은 문장임에도 그 감상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미주에 따르면 여새란 전쟁, 죽음, 전염병의 창궐을 알리는 전령으로 일컬어진다. 변장한 왕이 미국에 도착하던 무렵 시인에게 심장 발작이 일어나고 카를파의 도움으로 마련된 새 보금자리를 아르카디아로 지칭하는 등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시인의 말로와 몇몇 장면들이 대비된다. 또한 킨보트란 이름은 '왕을 파괴하는 자'로 "망명이라는 거울 속에 자신의 정체를 감춘 왕"을 뜻하는데 이는 이전의 신분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그가 '죽은 여새'인 망명왕 카를 크사베리를, "예술은 태양에 맞서서 움직인다." 해설 p428 는 나보코프의 희곡 「사건 The Event 속 문장은 시인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가 예술 그 자체(그림자)임을 뜻한다. 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킨보트가 주석자로 나선 것이 어떤 불순한 의도가 아닌 필연적 운명의 불가항력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 테니까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p.264 모든 것을 버리고 쫓기듯 도망친 왕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기념비적 상징이 필요한 법이다. 허나 당초 계획과 달리 킨보트의 이야기가 불러온 반향은 그림자단(the shadows)의 일원 그라두스란 실체였고 레드 애드머러블(바네사)의 날갯짓이 존 셰이드(shade)를 스치며 죽은 여새의 '그림자'로 잠들게 된 것이다. (킨보트는 그라두스를 "전진시키는 힘은 셰이드의 시 자체의 마술적인 작용"p.171이라 했지만 결과물로 미루어 보아 이는 그의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추후에 사용하려고 적어둔다. p.83" 우리네 삶이 그렇듯 추후를 기약했던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삶을 예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시와 현실이 접점("밀려오는 어스름과 저물어가는 빛 속에서 한 남자가 ―아마도 어느 이웃의 정원사인 듯― 나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빈 수레를 굴리며 비탈길을 오른다." 996~9행)을 맺으며 그렇게 미완의 삶은 어떤 운명적 힘에 의해 킨보트의 주석이 더해져 예술로써 완성된다. 그리하여 출처가 의심되는 초고는 차치하고서 주석 전체가 1000행으로 가는 여정이라 볼 수 있겠다.




달이 태양에게서 훔친 창백한 불꽃




셰익스피어의 『아테네 타이몬』을 콘말의 번역인 젬블라판으로 접한 킨보트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표제의 의미. 여기서 태양은 남성을, 달은 여성을 뜻한다. 롤리타의 짧은 주석을 보면 "소방수에게는 모든 불('창백한' 불조차도!)이 그녀다." p.299 라는 대목이 있다. 세 명의 주요 인물들에게 달은 어떤 의미일까. 킨보트에게는 애정 없는 어머니와 왕위계승을 위해 혼인한 아내가 그렇다. 특히 디사에 대한 미묘한 감정은 킨보트에게 지우고 싶은 과오와 순수한 삶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이 꿈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셰이드에겐 모드 고모와 딸 헤이즐이 그들이다. 모드 셰이드는 괴짜라 불릴 만큼 독특했던 인물로 시인이자 화가였던 그에게 존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병든 몸으로 정신과 육체을 지배 당한 고모의 말로(末路)를 지켜보며 내세에 대한 심상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셰이드, 호수가 집어삼킨 헤이즐. "호수에서 우리집 현관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왜 시야를 가리는 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지붕조차 안 보이는가, 알 수 없다." 42~4행 딸에 대한 아픔이 묻어나는 시구절이다. 추한 외모로 태어나 짧은 생을 고독 속에서 살다간 그의 삶은 셰이드가 왜 무신론자인지를, 왜 삶보다 죽음이 더 위대한 경이라 말했는지를 납득할 수 있다.




우리의 늙고 지친 젬블라인 암살자 그라두스를 논하기 전에 표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창백한 인간의 눈을 가린 손의 형상이 마치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은 듯하다. 소설 속에서 바네사는 죽음을 알리는 운명의 나비로 잦은 등장을 한다. 저마다의 길이로 지펴진 인생의 불씨는 신의 섭리 혹은 자연의 법칙이란 결코 알 수 없을 타의로 우리들 눈앞에 드리워지고 모두가 겪게 될 일이지만 결코 경험할 수는 없는 것. 그렇기에 삶은 역설적이며 동시에 경이롭다. 살아있기에 죽음도 논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죽음, 검은 나비와도 같았던 그라두스의 기구한 삶은 어떠한가. 불의와 기만을 혐오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그는 "일반성은 신성하고, 특수성은 악마적이다."라는 독특한 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아내는 집시와 바람나 집을 나가고 장모와 불륜을 저지르다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거세를 시도한 그에게 경악과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있어 달이란 바다가 훔친 것이요, 녹아서 사라진 탓에 아주 캄캄해진 밤이 아닐까. 태양은 창백한 불꽃을 잃어버렸다.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ㅡ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집필이 끝난 원고를 보고 신이난 킨보트는 셰이드에게 비밀을 말해줄 것을 약속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진실을 알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오식에서 비롯된 깨달음으로 화창한 내일을 확신하던 이는 죽음을 맞았고, 환청에 시달리며 보이지 않는 암살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이는 또다른 내일을 얻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신분을 바꾸고 다른 이를 연기한들 결코 죽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로써 주석자의 최후 발언은 모두 끝이 났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당신은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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