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96
신철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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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슬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면 슬픔의 양은 줄어들까 커질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해 "지구만큼 슬펐다고" 표현한 아이의 순수성과 속물적 세상이 충돌하며 "한입 베어 문 사과"는 눈물처럼 "입안에 짠맛이 돈다." 생명체의 눈은 은하계를 떠도는 행성의 모습과 닮아있고 무수한 행성 중 하나인 "지구의 속은 눈물로 가득차 있"으며 그리하여 지구는 슬플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 또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집단적 상실을 지나온 이들에겐 처절하게 얼어붙은 슬픔이 존재한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는 것"처럼. 다시 한번, 우리가 슬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면 슬픔의 양은 줄어들까 커질까.



눈꺼풀 위에 얼음을 올려둔다

눈동자 위로 빙하가 흘러간다

붉은 호수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버둥거린다

<연기로 가득한 방 中>


눈동자가

깊이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아

나는 주저앉았다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 가운데서

<개기일식 中>



한 편의 짧은 소설같은 <거기, 누구?> 속 그림자를 깎는 남자의 잔상은 나에게 짙게 남았다. 화자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호하고도 집요한 손놀림"으로 땅 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파내는 남자를 발견하는데 그 기이한 모습은 화자로 하여금 묘한 연민과 두려움을 자아낸다. 전자는 그림자를 파내는 행위를 보고 화자가 짐작한 바는 곧 투사된 자신의 심리이며, 후자는 자신이 대체될 곳의 고독함을 아는 자의 반응이다. 마침내 그림자가 쓰러진 순간 화자는 도망친다. 그 축축한 골목에서 마주친 이는 누구인가.



손끝이 부르르 떨린다. 그는 절벽 앞에 선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도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기, 누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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