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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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행의 연속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고통을 품고 살아간다. 곰팡이처럼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시시때때로 나를 좀먹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말하지 않기에 아주 은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케케묵은 마음의 짐을 털어내려는 한 남자가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의 도시 네타니아에 위치한 작은 클럽, 이곳에서 키 158cm의 깜찍한 도발레 G의 스탠드업 코메디 대망의 마지막 공연이 펼쳐진다. 오늘은 인생을 결산하고 영혼의 탐색이 필요한 특별한 날, 바로 바로 도발레 G의 생일이므로 평소와는 조금 다른 공연이 되시겠다. 비록 그의 천박하고 저질스러운 유머가 불편하더라도 중도 퇴장은 금물! 왜냐하면, 이건 블랙코메디를 가장한 한 인간의 속죄이자 고백이니까.




"마침내 세상의 공기 속에서 나 말고 아무도 없는 하나의 자리를 찾아낸 느낌이었어." p.215




한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기에 앞서 열네 살의 그를 들여다보자. 괴팍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던 아빠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어둠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엄마 그리고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절의 어린 도발레.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신기루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홀로코스트라는 국가적 폭력과 집안에선 신과 같은 존재인 아빠의 폭력, 엄마의 자살충동과 우울증, 동네 아이들의 지속적인 괴롭힘도 그를 굴복시키진 못했다. 엄마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물구나무를 서고 자신만의 규칙으로 머리속 체스를 두는 행위 역시 순수함에서 비롯된 방어 기제인 셈이다. 넘치는 불행속에서 혼자만의 안전한 자리를 찾아낸 아이는 어른보다 강하며 영악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피터팬일 수 없다는 것,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으며 고난은 멀지 않은 곳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행복했던 시절 스치듯 짧은 우정을 나눈 아비샤이에게 도발레 자신은 무얼 확인받고 싶었을까. "나는 내가 아니야, 너도 네가 아니고." 도발레 스스로도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재차 공연에 와주길 부탁한 것은 아마 더 이상 자신이 누군지 알수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서 본 걸 말해달라던 그의 부탁은, 가면을 쓰듯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평생을 무대 위에서 보냈기 때문에, 관객이라는 무수한 얼굴들을 마주쳐왔지만 정작 본인의 얼굴은 볼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날 그에게 필요했던건 신나게 웃어주는 관객이 아닌 전직 판사 아비샤이의 냉철한 시선과 신랄한 언사 그리고 일말의 애정 어린 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도발레'라는 인물은 국가적 폭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엄마 사라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기차의 작은 공간에 갖혀 폴란드 열차 수리공들에게 6개월의 시간동안 윤간을 당한 뒤 버려졌고, 출산후 정신병원을 전전했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군사소식에 도망치듯 욕실로 달려가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씻어대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다. 무언가에 대비하듯 끊임없이 일을 하는 강박적 성격을 띤 아빠 그린스테인이란 인물 역시 국가폭력의 간접적 피해자다. 부모 사이에 어떠한 애정표현도 없다는 것, 유리구슬 속 나비처럼 엄마를 대하는 아빠의 행동 등등 어느것 하나 명확하게 말하진 않지만 여러 암시를 통해 아빠와 도발레 두 사람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일뿐 혈연(血緣)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내가 잠시라도 엄마와 단둘이 있게 해주질 않는다니까." 소설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대사는 엄마에게 도발레의 존재는 애증적 관계라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의자에 파묻혀 보온병에 담긴 우유를 들이키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씁쓸하다. 죄책감 때문일까. 언뜻 아이처럼 보이는 작고 마른 몸이 자라지 못한 채 어린 시절에 멈춰있다는 기분이 든다. 상처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내 처어어엇번째 장례에에에에에에식!" 떠밀리듯 무대로 등장해 유쾌한 시작을 알렸던 그의 공연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한다. 재미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클럽 안을 잠식해오는 어두운 기운을 참지 못하고 퇴장해버린다. 본래 심연의 고백은 듣는이 또한 준비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듣기만 해도 자신 내면의 어둠과 마주하게 되므로. "…마르세유에서 온, 생선 악취가 나는 면비로드 바지 삼백 벌, 그런데 알고 보니 지퍼가 다 뒤에 달려있어. 그게 말이 돼? 그리고 이제 겨우 열네 살이 된 아이를 그렇게 보낸다는 게…" 고통의 근원에 다가가자 공연 도중 그의 진짜 감정이 비집고 나온다. 군사캠프에 머물며 지독한 시간을 보내던 도발레에게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을 소식이 날아들고, 한순간에 고아가 된 그는 영문도 모른채 군용차에 태워진다.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게 아빠가 꾸려준 제몸집만한 배낭은 그 순간엔 그저 거슬리는 짐일 뿐이었다. 드르르르륵- 달리는 차안 쉼없이 머리를 두드리는 차창보다 그를 괴롭혔던 건 뒤죽박죽 마구 날아드는 기억들. 서로 선택받기 위해 몸부림 치는 엄마, 아빠와의 순간들. 묘지로 향하는 그 긴 시간동안 모든 계산을 끝냈고 결정은 내려졌다. 무대 한 구석 우유가 담겨있던 보온병엔 어느덧 술로 가득 채워진다. 




그가 스탠드업 코메디를 업으로 삼은 것은 일종의 애도(哀悼)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자신이 영악하게도 아빠를 선택했다는 것. 실상은 아무 영향이 없지만 자신때문에 엄마가 죽음을 맞은 것만 같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늘 엄마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엄마의 불안은 감당하지 못한 어린 소년. 우리는 모두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공연을 지켜보던 아비샤이 역시 자신의 과오로 그의 판결대에 오를까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분명 좋은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 뜨거운 사막 위를 달리던 차안에서 운전병의 서툰 위로(농담)과 운전병의 누나의 음식, 영매 아줄라이가 그런 순간들이다. 스스로를 오물로 생각하던 도발레에게 좋은 아이였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공연내내 충실한 관객이 됐으며 또 어쩌면 그곳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영혼을 초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발레는 스스로에게 익사형을 고하고 머리위로 술을 들이붓는 것을 끝으로 그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다. 그리고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 인용된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완전해질 수 있다." 상실의 상처를 공유한 두 남자는 아직도 자리에 남아있지만 곧 그들은 어디로든 떠날 것이다. 함께. 마음의 짐은 덜어졌다. Let It Be. 삶이 흐르는 대로 두자.



"도발레 G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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