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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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대중매체에서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무심코 내뱉던 말들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왜 도망치지 못했나. 왜 도움을 청하지 못한 것일까. 왜 더 저항하지 못했나. 왜, 왜. 왜 나는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손가락질 했을까.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경험해보지 못한 특수한 상황들이 존재한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자를 탓해선 안된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성폭행 피해자가 어째서 문 열린 새장 안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장 사악한 건 아무것도 모른 채 스스로 추락하는 걸 내버려두는 걸 거예요." p.197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사회는 삶을 통째로 유린당하는 고통에도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게 만들고, 묵인과 무관심 속에 동조자로 둔갑한다. 성폭행 피해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부적절한 시선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집중조명되는 그릇된 관심은 그들을 더 깊숙한 어둠으로 숨어들게 만들 뿐이다. 그렇기에 팡쓰치가 포기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가해자 집단(사회)이 아니었을까.




"요즘은 소설을 읽다가 인과응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울음이 나와요. 세상에 아물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제일 싫어요. 이 세상에 한 사람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고통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서정적인 결말이 싫어요. 왕자와 공주가 결국에는 결혼하는 해피엔딩이 혐오스러워요. 그런 긍정적인 사고가 얼마나 세상에 영합하는 비열한 결말인지! 그런데 내가 그것보다 더 원망하는 게 뭔지 알아요? 차라리 내가 세속에 영합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차라리 내가 세상의 이면을 본적도 없는 무지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p.267




이 소설엔 통쾌한 결말도, 그 흔한 영웅도 없다. 오직 약자들만이 아픔에 동조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가로막혀 그마저도 쉽게 얻지 못한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소설이지만 허구가 아니며 더 나아가 우리가 외면하는 진짜 현실이다. 악(惡)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권력을 휘둘러 순수함을 짓밟고 죄책감을 심지만, 리궈화와 첸이웨이같은 자들은 뉘우침은 커녕 계속해서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나설 뿐이다. 어린 소녀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로 쌓아올린 낙원이라는 이름의 고통. 세상엔 분명 무수한 리궈화와 팡쓰치가 존재한다.




소녀들은 성장한다. 언제까지고 부당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는다. 문학선생 리궈화의 입에서 기계처럼 흘러나오던 사랑의 말에 안도하던 팡쓰치가 그의 말에 반문하기 시작하고, 오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이원이 마침내 남편 첸이웨이를 떠나며, 리궈화의 또다른 피해자 궈샤오치는 지독한 방황 끝에 한걸음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 린이한이 우울증에 시달렸음에도 매일 눈물을 삼키며 글쓰는 일에 매달렸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녀가 이 책을 쓴 이유이며 마지막 바람이다.



사악함이란 이처럼 평범한 것이고, 평범함이란 이처럼 쉬운 것이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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