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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최유리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된건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이 궁금해서였다. 나는 사치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가방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 조금씩 비싼 가방을 들어야 품격이 있어보인다는 말을 들어도 별 동요가 없다. 가방에 관심이 없으니 브랜드도 잘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 앞에서 비싼 가방을 들고 자랑한다해도 가방이 비싼지 아닌지 모르니 자랑을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도 샤넬은 들어봤다.)
그래서인지 샤넬백을 버린다고 하는게 가방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가방이 대체 뭐길래? 가방을 버리면 새 삶이 시작될까? 나도 버려봐? 뭐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고 해야하나.
서울대라는 학벌, 박사논문을 쓰고 있던 저자가 우울증에 빠져 있던 어느 순간 자신을 알아차리고 그 모든 걸 벗어던졌다. 저자는 학교에서 기간제교사로도 일한 적 있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로도 활동한 적 있는 교육계 종사자였다. 교육계는 특히 다른 직종보다 더 보수적이고 특히 패션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하고 패션에 일가견이 있던 그녀가 선택하는 옷들은 학교에서 잘 맞지 않는 옷이었던 것같다. 사립학교에서 나오게되어 다시 박사논문을 쓰던 중 우울증이 왔고 자신을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 현재 패션힐러로 활동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가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과정 중에 핵심이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글을 쓰는 과정은 자신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동시에 자기치유과정이었다. 또한 책을 읽다보면 저자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책,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이걸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미녀와 야수> 제외하고는 부끄럽게도 읽거나 본 적없는 책, 영화이고 나도 찾아보고 싶어 메모를 해두었다.
책 중간중간에 패션힐러답게 나같이 옷을 정말 못입는 사람을 위한 패션 조언도 있어 굉장히 쏠쏠했다. 튀는 옷, 유행인 옷보다 자신의 아우라를 뽐낼 수 있는, 자기에게 맞는 옷을 선택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와있어 나도 한 번 실행해 볼 예정이다. 또한, 나를 알아차리고 자기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도 장과 장 사이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그러고보니 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직업도 입시 성적에 맞춰 시간이 흐르는대로 가다보니 얻게 된거고, 거의 모든게 그냥 시간에 나를 맡기다보니 별다른 사유없이 진행되는 하루하루다. 저자는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 그랬는데 나는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모든걸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뜨뜨미지근하게 그냥 살았다. 그러다보니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영화는? 나는 언제부터 노래도 듣지 않고 내가 본 영화도 생각나지않는 사람이 된걸까.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자기고백이 궁금해서 선택한 이 책은 의외의 순간순간에 자꾸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일단, 저자가 나와 같은 교육계에 종사했었단 이유로 반가웠고 나에게도 쩔어있는 학벌주의가 부끄러웠다. 아이들 입시지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노랫말같은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가 머리에 박힌다고는 하지만 그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나도 내 욕심에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가 육아로 포기했지만 잘 된 것 같다. 나는 방향성없이 이유없이 그냥 늦은 임용에 대한 보상책으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육아라는 거대한 산이 그걸 포기하게 했다. 저자처럼 자의에 의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나를 정신차리게 해준 아이들이 고마웠다.
저자의 여행에 관한 시선도 참 좋았다. 난 여행이라고는 몇 번 안가봤지만 그때도 그 여행에서 여행지와 그 여행지에 있더 나를 온전하게 느끼지 못했다. 물론 저자가 경계하는 여행지름샷을 찍어본 일도 없지만.
앞만보고 달려온 사람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픈 책이다. 마치 옆집 언니가 나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안돼 하고 조언해주는 느낌이었다. 이런 책이랑 영화가 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한번 볼래? 내가 이렇게 살았었는데 지금 나를 찾고나니 너무 행복해! 너도 네 인생에 대해 예의를 지켜보지 않을래? 이렇게 말하는 느낌. 거기에 패션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패션정보까지.
이 기회에 나도 잠시 잊고있었던 나를 좀 찾아봐야겠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글로 써내려가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