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은 ‘가난에 인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람이나 가난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반복적으로 이런 말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 가난을 부정적인 것, 부의 결여라고 생각하죠. 질병이 건강의 결여이듯 말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은 어떤 것의 결여가 아니라 진짜 페스트입니다. 그 자체로 독성이 강하고 콜레라처럼 전염되고 더럽고 죄악이고 악덕이며 절망입니다. ......”선량한 부자가 부유함을 누리면서 자기는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틀렸다. ......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한 배에 타고 있지 않기때문에 그들과 하나가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난민을 대하는 자세는 인도적 동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때문에 도와야 한다.’[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새로운 계급투쟁] 중에서— .
. 반디 [고발], 이 책의 절반을 읽으면서 앓았다. 작년 여름인가, 국제 문학 포럼에서 언급된 책이다. 탈북자, 브로커 등을 통해 소설 원고가 남한으로 넘어왔고 현재 20개국의 18개 언어권에서 출간되었다. 작년 3월에는 북한 인권을 주제로 세계 출판인들이 서울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문학 포럼에서 강의를 들으며 동족인 우리의 냉정함을 부끄러워하면서 메모했는데 그조차 잊고 있다가 아들 방에서 발견했다. 하여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읽기 시작했다. 편하지 않다. 아니 아프다. 그 사회의 수준은 인권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요즘 연일 시끄럽게 바닥을 치고 있는 성폭력의 중심에 있는 게 인권 문제 아닌가?! 간혹 탈북자들이 다시 북한체제로 돌아가길 원한다는 말에 안타까워만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이유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우리는 독재체제도 아니고 조금 더 물질적으로 여유있고 번쩍이기는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나 존재하는 폭력과 압제가 있었고 지금도 존재한다. 이제 목소리를 높이는 피지배층에게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폭압에서 죽을 각오로 탈출한 사람들이 찾고 있던 유토피아는 정말 아닌 듯하다. 이제 함께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용 때문에라도 꼭 읽어야 하지만 문장도 훌륭하다. 이 작가를 보호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더한 몫이 아닐까 고민해본다. 아마 나머지 절반을 읽고 나는 더 아플 것이다. 더 아파야 할 것이다. 고통 때문에 읽는 게 힘들어도 함께 읽고 모두 아팠으면 좋겠다. 그게 치유와 공존을 위해 한 발 내딛는 동력이 될 것이므로. .
. 이번주에 읽고 있는 책은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다. 단편집인데 단편 중에 <자궁병동>을 소개하고 싶다. 중증 환자들과 함께 입원한 여자가 있는데 타자의 시선과 입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흔히 그렇듯 자기 우울과 감정에만 빠져있다. 밤새도록 그녀의 우는 소리에 더 많이 아픈 다른 환자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는다. 그녀가 쉬지 않고 우는 이유는 남편이 옆에 없기(25년간 단 하루도 남편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때문이다. 병원 규정상 그날 밤에 보호자인 남편은 나가 있어야 한다. 결혼하고 25년이니 그녀의 나이도 대충 짐작할 만하다. 결국 우는 소리에 못견디고 다른 환자들이 못 자고 다 깨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아픈 몸을 겨우 끌듯이 다가가 애기 다루듯 그녀를 잠재웠다. 그리고 나서 자기 침대로 와서 힘든 몸을 뉘이며 짧게 말한다. “살면서 배우는 거지” “마일드리드 그랜트는 이제 좀 나직히 울고 있었다. 그것은 음울하면서도 기계적인 흐느낌이었고 이제 그들의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그들 각자의 내부에 자신의 권리와 요구 사항을 가진 달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아이를, 그리고 그 아이를 누르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82쪽, 83쪽 세상엔 육체적으로만 성장한 아기들이 참 많다. 자기 문제와 사회 문제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내적인 성장을 얻기 위해서는 상처를 인내한 댓가를 필요로한다. 자신의 경험과 지력만 믿는다면 자기 합리화와 편협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해와 용납은 동의어가 아니다. 작가에게는 일반화된 상식을 뚫는 ‘다른 말’이 있어야 한다. 도리스 레싱은 역시 말장난이나 단어와 문장을 나열하는 글쟁이가 아니라 ‘작가’다. 사진은 레몬과 캬라멜 케잌, 유기농 커피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도 하고 싶은 일은 이런 작가와 만나 티타임을 갖는 것이다. 오늘은 제대로 보낸 듯하다. .
. 아침까지 다 읽고 멘붕상태였다. 아들과 토론하고 종일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도리스 레싱은 역시 대단한 작가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작가의 사유 체계에 감탄한다. 내가 소설을 서사 중심으로만 의미를 두지 않은 건 꽤 오래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랍다. (그래서 나는 서사 중심으로만 쓴 재미 위주의 소설을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 흑인을 짐승으로 보던 남아프리카의 정체된 식민 사회의 문제, 백인의 우월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 사회 고발 등등 작품성을 그런 부분에 둔 평론가들은 말하지만 나는 다른 것을 찾아본다. 이 책은 작품에 대한 평가 이전에 여성과 남성, 남편과 아내, 나와 이웃, 그들의 유기적인 관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편협한 태도와 환경, 개개인의 의식이 이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연결 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메리의 사고 방식과 인간관계마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편협하고도 히스테릭한 성향, 그에 따라 전개되는 삶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서 생은 마감하고 평가도 받지만 그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도 왜곡된 시선인가?! 사실 복병은 흔히 우리의 생이 만들어온 것들로 종종 출몰하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그 다음에 읽을 책을 선택하는 이 짧은 공백이 나를 묘하게 자극한다. 나는 어쩌면 이런 떨림 때문에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