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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언어 - 언어의 무한한 변이들 ㅣ 리좀 총서 8
장-자크 르세르클 지음, 이현숙.하수정 옮김 / 그린비 / 2016년 6월
평점 :
역자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꼈다...
읽다가 4, 5장 중심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영문판과 대조하였다.
어설프게나마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번역을 수정해보았다.
* 역자가 the virtual, the actual, the real을 대부분 각각 가상성, 실재성, 현실성으로(p.186참조) 번역하였는데, 들뢰즈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잠재적인 것, 현실적인 것, 실재적인 것으로 통용된다고 알고 있다. 일관성있게 번역되었다면 그냥 바꿔서 이해하면 될테지만 간혹 잠재적인 것, 현실적인 것, 실재적인 것으로(p.202참조) 번역한 곳도 있어 맥락에 따라 이해하거나 원서 확인이 필요할 듯하다.
p.185
"(2) 이들 관계, 아니 차라리 이 관계들의 가치와 매우 특수한 사건들, 즉 그 구조 안에 지정할 수 있는 특이성은 일치한다.,...하나의 구조는 기본 계열들과 상응하는 특이한 점들이 두 개로 분할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구조와 사건을 대립시키는 일은 엄밀하지 않은 일이다. 말하자면 구조는 관념적 사건들의 기록, 즉 그 기록에 내재한 전체 역사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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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ach of these series is constituted by terms which exist only through the relations they maintain with one another. To these relations, or rather to the values of these relations, correspond very particular events, that is, singularities which are assignable within the structure... A structure includes two distributions of singular points corresponding to the base series. And for this reason it is imprecise to oppose structure and event: the structure includes a register of ideal events, that is, an entire history internal to it...
(2) 이 각각의 계열들은 서로를 유지시켜주는 관계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항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관계들에 대해, 아니면 차라리 이 관계들이 가진 값들에 대해 매우 특정한 사건들, 즉 구조내에서 할당 가능한 특이성들이 대응한다... 하나의 구조는 (구조를 이루는)기본 계열들에 상응하는 두 가지 특이점들의 분포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유로 구조와 사건을 대립시키는 건 부정확하다. 구조는 이념적 사건들의 기록부, 즉 구조에 내재하는 전체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p.189 "들뢰즈의 differen t/c iation가 주목하는 차이는 잠재와 실재 사이의 대조를 표현하는 동시에..."
->들뢰즈의 differen t/c iation가 주목하는 차이는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실적인 것(the actual) 사이의 대조를 표현하는 동시에...
p.208 "이 부분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을 이해하기란 쉽다. 누빔점은 또 다른 면, 즉 내재적 사슬 속의 초월의 형태, 또는 언어의 수평적 면을 재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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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easy to conceive a Deleuzean critique of this: the quilting point reintroduces another level, a form of transcendence in the immanent chain, or plane, of language(meaning that is `textual' in the literalness of the chain).
이 부분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을 이해하기란 쉽다. 누빔점은 언어의 내재적 사슬 또는 내재면(문자의 사슬로 이루어진 텍스트)에 또 다른 수준, 초월성의 형식을 재도입한다.
p.274 "그러나 우리가 그 시작부터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여기서 스케치하는 화용론의 그림은 주체에 대한 앵글로-색슨 활동가들이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 경멸을 설명하면서 이 단호히 대륙적인 형식의 화용론의 분석적 기원을 추적하려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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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e must note at the very start that the picture of pragmatics sketched here would be unrecognisable to Anglo-Saxon practitioners of the subject, so that we must attempt to explain the misprision and trace this emphatically Continental form of pragmatics to its analytic origin.
그러나 바로 그 출발 지점에서 주지해야 할 점은 여기서 그리는 화용론의 모습이 이 주제에 대한 앵글로-색슨 계통 종사자들에겐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일 것이기에 우리는 이 은닉(misprision)을 설명하고, 이와 같은 상당히 대륙적인 형태의 화용론을 그 분석적 기원에까지 추적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 p.278에 이 misprision을 Harold Bloom에게서(아마도 "시적 은닉(Poetic misprision)"이라는 개념에서) 차용했다는 설명이 있음.
p.276 "발화는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들처럼 사물들 가운데 있다. 사건들과 달리 발화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포퍼의 제3세계와 같은 이상적으로 분리된 면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들뢰즈의 용어로서 내재의 한 면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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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terances, like events in Logique du sens, are in the midst of things. Unlike events, they are not incorporeal, they are no longer on an ideal separated plane(in Deleuze's terms, there is only one plane of immanence), like Popper's third world.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들처럼 발화는 사물들 가운데 있다. (하지만) 사건들과 달리 발화는 비신체적인 것이 아니며, 더이상 포퍼의 제3세계와 같은 이념적으로 분리된 면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들뢰즈에 따르면 오직 하나의 내재면이 있을 뿐이다).
p.277 "그러므로 들뢰즈가 망설이고 있는 의미가 있는데, 그 속에서 그는 '과학적'언어학을 전복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논리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것이다. 이는 화용론을 소쉬르가 제창한 프로젝트의 마지막으로 연장시키고, 카오스로부터 추출하기 위한 언어학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게 하고, 파롤 전체가 랑그 속으로 흡수되어 랑그와 파롤의 구분이 결국 소멸되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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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there is a sense in which Deleuze hesitates, in which he not only overturns `scientific' linguistics, but takes it to its logical end, by making pragmatics the last extension of the programme initiated by Saussure, the last morsel of linguistic order to be extracted from chaos, the moment when the distinction between langue and parole is finally abolished, but only because the whole of parole is absorbed into langue.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들뢰즈가 망설이고 있는 지점이 있다. 거기서 그는 화용론을 소쉬르가 제창한 프로그램의 가장 첨단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키고, 카오스로부터 추출될 언어학적 질서의 마지막 한 조각으로 만들며, 파롤 전체가 랑그로 흡수되어 랑그와 파롤의 구분이 소멸되는 순간으로 만듦으로써 '과학적'언어학을 전복시킬뿐만 아니라 이를 그 논리적 종착지로 이끈다.
p.280 "네번째 한계는 수행성을 복잡한 행위, 발화행위를 행위로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앵글로-색슨 화용론은 언어의 물질성에 대한 사실적인 관심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발화행위가 성취하는 행동은 스토아 학파처럼 신체의 혼합이 아니라 해석적 미적분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해석을 위해 재현을 남겨두었다(여기서 언어는 넓은 의미에서 세계를 '재현'한다). 발화행위는 제도, 제의와 관습의 물질적 연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차라리 두 가지 형식의 계산법 사이의 매개자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행위 이전 의도의 이성적 계산법과 행위 이후 해석 역시 이성적 계산법이다. 집단 제의의 물질성이나 단어의 물질성 모두 이 이상한 유형의 힘 행사의 근원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불성실한 발화행위의 비관용어법의 힘은 '함의'라 부르는 은밀한 의미의 재건축에 의존하면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에 독립되어 있다. 그 단어는 불분명하게 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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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th limitation is that in spite of its insistence on performativity as involving action, on speech-acts as acts, Anglo-Saxon pragmatics shows no real interest in the materiality of language. The action that the speech-act accomplishes is not considered, as with the Stoics, as a mixing of bodies, but as the source(and the result) of an interpretative calculus. We have left representation(where language, in a broad sense,`represents' the world) for interpretation: a speech-act does not stem from a material chain of institution, ritual and practice, but it is rather an intermediary between two forms of calculus, the rational calculus of intention before action, and the equally rational calculus of interpretation after action. Neither the materiality of collective rituals nor the materiality of words is an issue for the exertion of this strange type of force (the illocutionary force of a perfidious speech-act, depending on the reconstruction of the implicit meaning called `implicature', is independent of the words that convey it - words which can indefinitely vary).
네번째 한계는 행위(act)로서의 발화행위, 수반되는 행동(action)로서의 수행성에 대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앵글로-색슨 화용론은 언어의 물질성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화행위가 도달하게 되는 행동은 스토아 학파와 같이 신체들의 혼합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해석적 계산의 기원(그리고 결과)으로서 간주된다. 우리는 해석을 위해 (넓은 의미에서 언어는 세계를 '재현한다(represent)'는 의미로) 표상(representation)을 남겨두었다. 발화행위는 제도, 의식(ritual), 실천의 체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행위 전 의도에 대한 합리적 계산과 행위 후 해석에 대한 합리적 계산, 두가지 형태의 계산 사이의 매개자이다. 집합적 의식(ritual)의 물질성도 단어의 물질성도 이와같은 이상한 유형의 힘의 행사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어떤 신뢰할 수 없는 발화행위가 가진 발화수반적 힘은 '함축(implicature)'이라 불리는 암묵적 의미를 어떻게 재구축하느냐에 달려있지, 그 의미를 실어나르는 단어들[단어들은 무한히 변화할 수 있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해당 문장 앞에서 ritual을 '의식', practice를 '실천', chain을 '체인'으로 번역했다..
p.293 "어떤 재능이 슬로건에 특징적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실제로 (이런 질문을) 혹은 이런 재능을 어떤 이상한 성격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슬로건의 방출, 지각, 전달에 있어서 일종의 순간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슬로건에 병합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광범위한 변이성, 망각의 능력을 추종했다가 이를 버리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무형의 변형이라는 이해에 있어 적절한 이상 혹은 유령같은 능력, 거대한 간접담화로서 언어를 파악하는 소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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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ask what faculty is specific to the slogan, we must indeed attribute to it some strange characteristics: a kind of instantaneousness in the emission, perception and transmission of the slogans; a wide variability, and a power of forgetting permitting one to feel absolved of the slogans one has followed and then abandoned to welcome others; a properly ideal or ghostly capacity for the apprehension of incorporeal transformations; an aptitude for grasping language as an immense indirect discourse.
슬로건에 특수한 능력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우리는 정말 몇몇 이상한 특징들을 그것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① 슬로건들의 방출, 지각, 전파에 있어서의 일종의 순간성, ② 광범위한 가변성이자 우리가 따라왔던 슬로건들을 버리고 다른 슬로건들을 받아들임에 있어 죄사함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망각의 힘, ③ 비신체적 변형을 파악하는 적절하게 이념적인, 어떤 귀신같은 능력, ④ 언어를 하나의 거대한 간접 담화로서 파악하는 소질.
p.304 "우리는 철학적 개념이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때 의미가 흥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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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ay accept that a philosophical concept ought to be creative, without accepting that meaning is determined by interest.
우리는 의미(meaning)가 흥미(interest; 이해관심)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철학적 개념이 창조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개의 '사고의 이미지'를 분리하는데, 생각을 떠올리는 두 가지 방법과 세계에 대한 사상가의 반작용을 분리하는 것이다. 억견의 이미지 그리고 흥미의 이미지는 전통철학을 전복하고 새로운 힘의 관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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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separating two `images of thought', two ways of envisaging thought, and the thinker's reaction to the world: the doxic image, and the interesting image, which seeks to overturn the philosophical tradition and establish a new rapport de forces.
그는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즉 사유, 그리고 세계에 대한 사유자의 반작용을 그려내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하고 있다. 억견의 이미지(the doxic image)와 흥미의 이미지(the interesting image)가 그것인데, 이는 철학적 전통을 전복하고, 새로운 힘의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p.305 "그 누가 거짓에 대항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기꺼이 인내를 감수하겠는가? 바로 니체주의자인 들뢰즈가 그렇다. 진리가 아닌 흥미에 근거해 사고의 이미지를 기술할 때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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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who would willingly forbear to seek truth and struggle against error? A Nietzschean Deleuze does, when he describes an image of thought based not on truth but on interest.
그 누가 진리를 추구하고 오류에 대항하는 일을 자진해서 그만두려 하겠는가? 니체주의자인 들뢰즈가 그러하다. 바로 그가 사유의 이미지를 진리(truth)가 아닌 흥미(interest; 이해관심)에 근거해 기술할 때 그러하다.
p.309 "가타리는 들뢰즈의 구조의 정의를 수정했다. 그것은 처음 두 성격을 유지하고(구조는 두 개의 이질적인 계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용어는 그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들은 차이적인 가치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제 기계들과 관련된 세 번째 것을 이동시키는 것이다(계열들을 따라 순환하고 그것들을 분절시키는 역설적인 요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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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ttari revises Deleuze's definition of a structure, by keeping the first two characteristics (a structure is composed of two heterogeneous series; its terms are defined by their relations they have only differential value) and redeploying the third, which now concerns machines (there is a paradoxical element circulating along the series and articulating them).
가타리는 들뢰즈의 구조에 대한 정의에서 처음의 두 성격들을 유지하고([1]하나의 구조는 두 개의 이질적인 계열들로 구성되어 있다, [2]그 계열의 항들은 계열들 간의 관계들에 의해 결정되며, 이들은 오직 미분적인 값들만을 갖는다), 세번째 성격([3]이 계열들을 따라 순환하고 이들을 분절하는 어떤 역설적 요소가 있다)을 재배치(이것이 이제는 '머쉰'으로 간주되는데)함으로써 이를 수정한다.
*앞서 들뢰즈의 구조의 조건들 3가지를 언급한 p.185참고할 것.
"구조는 위치의 계열들이다(그것은 기관의 공간적 형식이다). 그것은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이는 그 자체가 상위 구조 속의 요소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구조는 동시적이고 정적이다. 반면 기계는 통시적이고 역동적이다. 그것은 기관의 일시적인 형식이다(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을 특징짓는 것은 그 요소나 부분이 아니라, 그것이 위치한 사건들(‘분기점’이라 불리는)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건의 발생을 위한 장소이지 보다 큰 기관 속에 파묻힌 조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들을 생산하지 않는다. 기계 속에서 ‘주체는 항상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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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ructure is a series of positions (it is a spatial form of organisation); it has elements; it is itself an element in superordinate structures; and it produces a subject. In other words, a structure is synchronic and static. A machine, on the other hand, is dynamic and diachronic. It is a temporal form of organisation (a machine needs time in order to work); it is characterised not by its elements, or parts, but by the events (called `breaks') of which it is the site; it is a site, therefore, for the emergence of events, not a piece embedded in a larger organism; and it does not produce subjects in a machine, `the subject is always elsewhere'.
구조는 위치들의 계열들이다(그것은 조직화의 공간적 형식이다). [1]구조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2]구조는 그 자체로 상위 구조들에 속한 하나의 요소이다. [3]그리고 구조는 하나의 주체를 생산한다. 달리 말해서 구조는 공시적이고 정적이다. 반면, 머쉰은 역동적이고 통시적이다. 머쉰은 조직화의 시간적 형식이다(머쉰은 작동하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한다). [1]머쉰은 그것의 요소나 부분들이 아닌, ('단절들(breaks)'이라 불리는)사건들로 특징지워지며, 머쉰은 바로 그 사건들의 장소이다. [2]따라서 머쉰은 사건들의 발산을 위한 하나의 장소이지, 더 큰 유기체에 배접된 하나의 조각이 아니다. [3]그리고 머쉰은 그 안에서 주체들을 생산하지 않으며, '주체는 항상 저 어딘가에 있다'.
p.310 "만일 구조의 동기가 지배한다면, 구조와 그 기관의 책임을 가정하기 위해 우리가 갖는 것은 주체이고 에고이다. 만일 기계의 동기가 지배적이라면 가타리의 주장대로 우리는 무의식의 주체를 갖게 된다. 라캉은 인간의 영혼을 기계로서 생각한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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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the moment of structure dominates, what we have, to assume responsibility of the structure and its organism, is a subject, an ego. If the moment of the machine is dominant, Guattari claims, what we have is the subject of the unconscious. Lacan is the thinker of the human psyche as a machine.
만약 구조의 계기가 지배한다면 우리가 가지는 것은 구조 및 그 유기체(organism)에 대한 책임을 맡는 하나의 주체, 하나의 자아이다. 만약 머쉰의 계기가 지배적이라면, 가타리가 주장하듯 우리가 가지는 것은 무의식의 주체이다. 라캉은 인간 영혼(psyche)을 하나의 머쉰으로 사유한 사람이다.
"언어와 관련해서 이것은 또 다른 대조 속에 각인되는데, 그것은 랑그의 구조(이것은 오직 희망사항일 뿐이다)와 ‘목소리’의 기계, 스피치-기계 사이의 대조이다. 후자의 용어는 가타리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늦게나마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목소리는 욕망의 표현, 기계로서 신체의 물질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에세이에서 부가된 것은 인간은 기계와 구조의 연동 속에 포착되는데, 이는 마치 목소리가 랑그의 구조적 질서를 ‘절단하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가 우선이 된다. 화자는 개인을 관통하는 십자의 연속을 의미하는 이러한 연동의 결과로서, 이때 개인은 연속에 의해 모이기도 흩어지기도 한다(여기서 우리는 글자의 각인이라는 라캉의 테마를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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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ning language, it is inscribed in another contrast, between the structure of langue (this is only to be expected) and the machine of `voice', the speech-machine, a term which Guattari does not explicate in the essay, but whose choice we may, with hindsight, understand: the voice is linked to the expression of desire, to the corporeality of the body as machine. Human beings, the essay adds, are caught in the interlocking of machine and structure, as the voice `cuts through' the structural order of langue and founds it the machine, therefore, comes first. The speaker is the result of this interlocking as signifying sequences criss-cross through the individual, whom they both constitute and tear up (we recognise here the Lacanian theme of the inscription of the letter).
언어와 관련하여 이는 랑그의 구조(이는 오직 그러도록 기대될 뿐이다)와 '목소리'의 머쉰(발화-머쉰)이라는 또 다른 대조 속에 새겨져 있다. '목소리'의 머쉰 또는 발화-머쉰같은 용어에 대해서는 가타리가 그의 에세이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는데, 사후적으로나마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는 욕망의 표현, 머쉰으로서 신체의 유체성(有體性; corporeality)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에세이에 덧붙여지길, 목소리가 랑그의 구조적 질서를 '횡단'하고 나서 그 구조적 질서를 수립하는 것처럼(따라서 머쉰이 우선한다), 인류(Human beings)는 머쉰과 구조의 맞물림 속에서 포착된다.
화자는 의미화하는 계열들이 종횡으로 횡단하면서 개인을 구성하기도, 흩어버리기도 하는 이러한 맞물림의 결과물이다(우리는 여기서 문자의 각인이라는 라캉의 테마를 확인한다).
p.311
"차르 체제 국가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해답을.."->"차르 체제 국가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해체(dissolution)를..
p.312 "여기서 기계는 기계적인 것도 유기적인 것도 아니다. 기계가 유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기계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들뢰즈는 기계론을 의존관계로 정의하는데, 이는 각각의 톱니가 다음 톱니에 걸리는 것과 같다. 반면 기계는 접촉이 필요없는 이질적 독립 용어들의 ‘이웃’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기억하듯이 기계는 특이성으로서 주위의 이웃(위상학에서 빌려온 용어)을 조직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기계는 배치의 기본적인 형식이고 인간과 짐승, 도구와 사물을 함께 모으는 ‘이웃 세트’인 반면,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기계적인 것은 그것의 외부에 있다. 그것은 기계의 배치의 통합적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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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he machine is said to be neither mechanical nor organic. That a machine is not organic, we may easily conceive. But how can it not be `mechanical'? Deleuze defines a mechanism as a relation of dependency, each cog being dependent on the next; whereas the machine is a `neighbourhood' of heterogeneous independent terms, that need not be contiguous. In other words, a machine is a singularity, defined, as we remember, as that which organises a neighbourhood(`voisinage', a term borrowed from topology) around itself. And a machine is an elementary form of assemblage, a `neighbourhood set', gathering together man and beast, tool and thing, whereas the mechanic that operates the mechanism is exterior to it: he is an integral part of the assemblage of the machine.
여기서 머쉰은 기계적(mechanical)이지도 유기적(organic)이지도 않다. 어떤 머쉰이 유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머쉰이 '기계적(mechanical)'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들뢰즈는 메커니즘을 각각의 톱니가 다음 톱니에 걸리는 것과 같은 의존관계로 정의한다. 반면 머쉰은 이질적인 독립적 항들의 '이웃관계'로, 이는 서로 간의 접촉이 필요하지 않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머쉰은 하나의 특이성으로 정의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기억하듯이 머쉰은 자신 주위로 '이웃관계(voisinage; 위상학으로부터 빌려온 용어이다)'를 조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머쉰은 배치의 원초적 형태이자, 인간과 짐승, 도구와 사물을 함께 모아주는 '이웃관계의 집합(neighbourhood set)'이다. 반면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기계적인 것(the mechanic)은 머쉰 바깥에 있다. 그것은 머쉰 배치의 적분적(integral) 부분이다.
p.313 "그러한 정의에 대한 관심은 물론 주체가 그 체인을 여분으로 기호화함으로써 생산된다는 것, 즉 주체 개념의 강등의 시작으로서 이것은 여전히 이 단계에서 라캉의 역작에 신세를 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두 가지 양상을 갖고 있으며, 때로 그것은 욕망의 기계와 사회적 기계로 구분된다. 혹은 다시, 사회적-기술적 기계는 명확한 역사적 연접 속에서 욕망의 기계의 응집으로 나타나는데, 즉 사회적 기계는 분자적 욕망의 기계의 질량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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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terest of such a definition is, of course, that the subject is produced by the signifying chain as its remainder the beginning of the demotion of a concept of subject, which is still, at this stage, indebted to the Lacanian elaboration. The Deleuze and Guattari machine has two aspects, sometimes distinguished as two types of machines, the desiring and the social machine. Or again, a social-technical machine is a conglomerate of desiring machines in a determinate historical conjuncture the social machine is the molar regime of the molecular desiring machine.
그러한 정의가 가진 이점은 물론 주체가 그 잔여물인 기표 사슬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이며, 이는 주체 개념 강등의 시작 지점으로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라캉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머쉰은 두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두 유형의 머쉰들로 구별되는데, 욕망적 머쉰과 사회적 머쉰이 그것이다. 혹은 다시 말하자면, 사회-기술적 머쉰은 결정적인 역사적 통접(conjuncture) 하에 욕망적 머쉰이 응집된 집합체이다. 즉 사회적 머쉰은 분자적인 욕망적 머쉰의 그램분자적인 체제이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관계를 강조한다. 기술적인 기계는 사회적 배치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욕망과 사회라는 기계의 두 양상은 배치의 두 양상을 예시한다. 그것은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언표의 집단적 배치이다. 비록 두 개념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지만 기계에 결핍되어 있는 것, 따라서 배치의 구성적인 부분, 그 작동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배치의 추론적인 양상이다. 기계는 긴 긴술을 포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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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Kafka, Deleuze and Guattari insist on the link: a technical machine is a constituent part of a social assemblage. The two aspects of the machine, the desiring and the social, prefigure the two aspects of an assemblage: the machinic assemblage of desire and the collective assemblage of enunciation. Although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concepts is clear: what is lacking in a machine, which therefore can only be a constituent part of an assemblage, an instrument for its operation, is the discursive aspect of the assemblage. A machine does not involve statements.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관련성을 강조한다. 기술적 머쉰은 사회적 배치의 구성적인(constituent) 부분이다. 욕망적 머쉰과 사회적 머쉰이라는 머쉰의 두 측면은 배치의 두 측면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욕망의 머쉰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가 그것이다. 두 개념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머쉰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따라서 오직 배치의 구성적인(constituent) 부분이자 머쉰을 작동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이는 배치의 담론적인 부분이다. 머쉰은 진술을 포함하지 않는다.
p.314 "즉 생산의 관점을 순환의 관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욕망의 기계를 도입하는 것, 기계를 리비도의 흐름으로 코드화하는 것처럼 에너지의 흐름을 묘사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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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bstitution of the point of view of production for the point of view of circulation. But a conventional Marxist would balk at the introduction of desiring machines, at the description of the flow of energy that machines code as a flow of libido.
즉 순환의 관점을 생산의 관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머쉰은 에너지의 흐름을 리비도의 흐름으로 코드화하는데,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에너지의 흐름을 기술하는데 있어 욕망 머쉰을 도입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표상과 현시같은 재현에 대한 알튀세르의 연극은 분자기계를 질량의 구조로 축소시키는 작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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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thusserian play on representation as Vorstellung and Darstellung operates this reduction of molecular machines to the molar structure.
표상과 현시같은 재현에 대한 알튀세르의 역할은 분자적인 머쉰을 그램분자적인 구조로 환원시키는 작용을 한다."
p.316 "그것은 내재면을 혼효면으로 변화시키는데, 이는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과정을 촉진시키고 면을 형성하는 층들을 정리하기 때문이다(그것은 평평한 면보다는 패스트리의 미세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밀푀유라고 알려진 프랑스 케인과 같다). 이렇게 기계가 그 기술적인 원천에서부터 추상화하는 것은 배치를 향한 과도기가 되는데, 그 이유는 기계적 배치는 추상 기계의 구체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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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turn the plane of immanence into a plane of consistency, by fostering processes of territorialisation and deterritorialisation, and ordering the strata that form the plane (more like the French cake known as mille feuilles, which is made of fine layers of pastry, than a plane proper). This abstraction of the machine from its mechanical origin offers a transition towards assemblages: a machinic assemblage is the concretisation of an abstract machine.
논리기계들은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과정을 촉진시키고, 면을 형성하는 (평평한 면보다는 패스트리의 미세한 층들로 이루어져 있는 밀푀유라고 알려진 프랑스 케익과 같은)층들을 정리함으로써 내재면을 혼효면으로 바꾼다. 자신의 기계적인(mechanical) 기원으로부터 머쉰의 이러한 추상화는 배치로 이행할 것을 제안한다. 이제 머쉰적인 배치는 추상머쉰의 구체화라 할 수 있다.
p.317 "이와 같이 배치의 기본적 기능을 수립하면서 들뢰즈는 그 구성요소들을 열거한다. 그것은 사물과 사건의 상태, 과정과 결과의 두 의미에서 언표들과 언표행위, 공간, 달리 말해 욕망이 순환하는 영토, 그리고 공간 내의 운동,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결론을 추출할 수 있다. 마치 배치가 기계적일 뿐 아니라(따라서 ‘agencement’의 적절한 번역은 ‘assemblage’[배치]이다) 지리적인 것(따라서 agencement이 영토의 조직화, 요소들의 대열 혹은 배열이다)으로 보이는 것이다. 배치는 기계일 뿐 아니라 차트 혹은 퍼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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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ing thus established the essential function of an assemblage, Deleuze lists its constituent elements: things and states of affairs; utterances, in the two senses of process and result(eAnonciation and eAnonceA); a space, in other words territories on which desire circulates; and movements within this space, of deterritorialisation and reterritorialisation. We can draw an interesting conclusion from this. It appears that an assemblage is not only machinic (hence the aptness of the translation of `agencement' as `assemblage'), but also geographic (hence the agencement is a territorial organisation, an arrangement or array of elements) an assemblage is a chart or a puzzle as much as a machine.
따라서 배치의 본질적인(essential) 기능들을 수립함과 동시에 들뢰즈는 배치의 구성적인(constituent) 요소들을 열거한다: (1) 사물과 정황(things and states of affairs), (2) 과정과 결과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발화(언표행위와 언표), (3) 공간, 다른 말로 욕망이 순환하는 영토들, (4) 이 공간 안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운동들. 이로부터 우리는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배치는 머쉰적(이런 이유로 '아장스망(agencement)'을 '어셈블리지(assemblage)'로 옮기는 것이 적합하다)일뿐만 아니라 지리적(이런 이유로 '아장스망'은 영토적 조직화이자 요소들의 어레인지 또는 배열이다)이며, 배치는 머쉰이면서도 또한 차트나 퍼즐이다.
p.318 “의미-사건과 같이 배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신체와 일의 상태,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포함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건을 기술하는 의미와 발화를 포함한다. 더 중요한 것은 배치는 사건과 영토의 신성하지 않은 혼합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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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the sense-event, the assemblage has two sides, one which involves bodies and states of affairs, and the events that occur in them, the other which involves utterances, and the sense they ascribe to the event. More precisely, an assemblage is an unholy mixture of events and territory.
의미-사건과 마찬가지로 배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한 측면은 신체들과 정황들(states of affairs),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한 측면은 발화와 발화가 사건에 부여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하나의 배치는 사건과 영토의 불경스런 혼합이다.
“그것은 두 가지 양상, 두 개의 면(표현의 면, 혹은 기호의 체제, 그리고 내용의 면, 행위와 열정의 화용론의 형태로)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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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has two aspects, or planes (a plane of expression, or regime of signs, and a plane of content, in the shape of a pragmatics of actions and passions)
그것은 두 가지 측면, 혹은 두 개의 면(①표현의 면, 즉 기호의 체제와 ②능동과 수동의 화용론이란 모습을 띤 내용의 면)을 가지고 있다.
p.319 “(그것은 권력의 형성에 있어 욕망을 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한다)”
-> (그것은 권력의 형태로(in the shape of) 욕망을 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한다)
p.320 “재현과 의미로부터 생산과 작동으로의 이동, 즉 보다 넓은 ‘화용론’으로 이동하는 것도 명백히 진술하는 것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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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difficult to state more clearly the shift from representation and meaning to production and working, that is to a broader sense of `pragmatics'.
재현과 의미로부터 생산과 작동으로의 이동, 즉 보다 넓은 ‘화용론’으로의 이동을 이보다 더 명백히 진술하기란 어렵다.
p.321 “차라리 진짜 금욕적인 ‘작가’는 실제적인 공동체...”
-> 차라리 진짜 금욕적인 ‘작가’는 잠재적인(the virtual) 공동체...
p.322 “이것이 알튀세르의 질문 개념과 대문자 주어...”
->이것이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 개념과 대문자 주어...
“그것은 논리적-역사적 배열이다...”
->그것은 논리적-역사적 결합체(configuration)이다..
p.322-323 “여기에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실상 풀지 못했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우리가 언표와 기계를 분리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개의 배치는 하나의 배치의 유일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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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a problem here, which Deleuze and Guattari do not really solve: how can we separate the machinic from the enunciative, since these two assemblages are in fact only aspects of the one assemblage?
여기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실상 풀지 못했던 문제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언표적인 것으로부터 머쉰적인 것을 분리해낼 수 있을까? 이 두 배치가 사실상 단지 하나의 배치의 두 측면들일뿐인데 말이다.”
p.325 “주체 – 체계 – 재현으로서의 발화 – 깊이와 표면(서열)에 대한 반대”
-> 주체 – 체계 – 재현으로서의 발화 – 깊이와 표면의 대립(위계[hierarchy])
“감각소설” -> 선정소설(sensation novel)?
p.326 “그 직접적인 대답은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 그 직접적인 대답은 역사적이고 문헌학적(philological)인 것이 될 것이다.
p.330 “혹은 자기중심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 -> 정체성(identity)의 자기중심성(egocentricity)을 주장하는 것
p.331 “그러므로 소수자 개념이 다수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카프카의 책이 논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 It is logical, therefore, that the book in which the concept of minority plays a major part should be Kafka.
그러므로 소수자 개념이 주요 역할을 하는 책이 『카프카』여야 한다는 건 논리적이다.
“그들은 형태변이를 『로나 둔』과 같은 범주에 넣는...” -> 그들은 『변신(Metamorphosis)』을 『로나 둔』과 같은 범주에 넣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