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위기 - 21세기 문제군 시리즈 6 21세기 문제군 6
우에다 노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pp.171-176.


여기서 먼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비일상적 세계인 종교가 사람들을 틀에 가둔다고는 하지만, 과연 일상 세계는 종교 세계를 비판할 만큼 열려있는 다양한 세계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만일 일상 세계가 열린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또한 자유로운 삶의 추구를 위한 자유로운 논의의 장도 마련하고 있다면, 종교가 어떤 하나의 세계로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속박한다고 비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어디를 보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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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삶의 방식을 세상에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믿게 하고, 그 집단적 규범에 따르게 만드는 시스템. 그 시스템은 학교에 한정되지 않고 이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다. 종교를 '세뇌'의 기술이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일상 세계의 시스템이 얼마나 '세뇌'적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상적 상황을 내버려두고 종교의 어느 일면만을 추출하여 그것을 이상하다고 규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런 일상 쪽이 종교적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종교에 '자유'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과연 이 사회는 자유로운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로봇화라는 현상이다. 제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든 자기 자신 속에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프로그램을 심어두고 있고, 그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을 가지고 있다. 물론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억합하는지 명백하지 않으므로 누구를 어떻게 공격하면 좋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진정한 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자기 자신 속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본래적인 의미의 '다양성'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자의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가능성만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릴 것이 아니라, 세계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탑재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반성적으로 파악하고 해체하여 자기 나름대로 재구축하는 것, 시스템이 그려주는 줄거리대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 있는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이다.


p.195-196


21세기의 종교는 '모든 사람이 한 종교를 믿으면 세계의 구원이 일어난다는 말은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실 그 자체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런 전제하에서 자신의 교단이 얼마나 독자성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넓혀갈 수 있을지를 탐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 교단이 자신의 교의를 존중하면서도 '메타종교'의 시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종교가 사람들을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고서 어떤 대립을 일으키고 있고, 앞뒤 없이 무조건 포교 활동만 벌이면서 어떤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을 가지고 종교의 행방을 모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메타종교'적 발상, 그것은 종교를 넘어선 예지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 그런 예지를 가진 종교가 요청된다. 그러한 열린 시점을 가졌을 때, 종교는 결고 가능한 한 많은 신자를 울타리 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신자로'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항한 지구적 규모의 개혁 운동을 상징하는 언어로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말이 있지만, 종교라는 영역만큼 이러한 실천이 요청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이는 어느 종교 교단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에 앞서 '지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것을 요청하는 것이며, 지구적인 시야로 자신의 종교를 재인식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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