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중 저항사 –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다. 이번에 원어로 읽은 책은 학생의 역사 공부를 위한 축약본이자 워크숍 용 연습문제가 달려 있는 교육용 참고 도서다. 역사 교사인 케이시 에머리가 연습문제와 교수법을 첨부했다. 에머리가 이 책을 편집한 것은 현행 미국 역사 교과서의 편향을 바로 잡고 학생들로 하여금 교과서 정본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대안 역사서에도 접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주체적이고 비판적 의식을 가진 시민으로 기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이는 하워드 진의 역사 서술 방식과도 일맥상통하는데 그는 정복자, 승자, 지배자의 사관으로 저술되는 정본과는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 피정복 원주민, 피지배자 민중, 식민지에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미국의 역사를 조망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피지배 민중이란 어떤 사람인가?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다. 이들은 콜럼버스의 도착을 환대했지만 도리어 노예가 되어 금 채취에 동원되거나 농장에 배속되어 강제 노동을 했다. 미국의 경우엔 원주민들에 대한 전쟁, 축출, 보호지역 강제 수용 등이 일어났지만 공식 역사는 이를 구입이나 협정 체결을 통한 영토 확장으로 미화한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나름의 농업 문명을 가지고 순탄하게 살아왔는데 서구에서 온 불한당들에게 조상대대로 물려받아 왔던 땅을 빼앗긴 것이 서부 개척의 역사의 진면목이라고 정직하게, 공평하게 평가하고 있다.
인디언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농, 흑인, 여성, 식민지 주민 모두에게 저자는 공정한 관심을 기울여 그들이 어떤 비참한 상태에 놓였고 어떠한 투쟁을 거쳐 어떠한 정의를 쟁취하게 되었는가를 시대별로 서술한다. 노예제 존속을 두고 맞붙었던 남북전쟁, 승리했던 북부쪽 이념의 불철저성, 노예 해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끈질기게 존속했던 차별 대우를 열거하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평등이나 자유, 행복 추구와 같은 미사여구가 얼마나 허언이면서 선택적으로 활용되는지를 폭로한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서술 또한 방대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노동 운동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들이 모두 미국에서도 한 차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사안의 축약적 반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동 시간의 축소 (그들은 10시간 노동제를 위해서도 한참을 싸웠다.) 노동 조건 개선 (작고 환기가 안 되는 침침한 방에서 옷을 만들던 미국 소녀들은 청계천 피복 노조를 떠올리게 했다), 임금을 현행 화폐로 달라는 요구 (자본가들은 월급 대신 식당 쿠폰과 같은 회사 내에서만 통용되는 가증권으로 퉁치려고 하였다.) 는 결국 모두 관철되었지만 모두 블랙리스트 등재, 취업 불이익, 체포, 투옥,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과 같은 막대한 댓가를 치른 끝에 얻어낸 것이지 지배계급이 순순히 내어어 거저 얻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망이 없을 것 같았던 이들 피지배 민중과 약자들의 투쟁은 30년대와 60~70년대에 이르는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에 힘입어 점차 그들의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된다. 8시간 노동제가 공인되고 노동자들의 고충을 처리하는 기관이 설립된다. 여성투표권이 보장되며 흑백분리의 여러 제도들이 철폐된 것이 성과다. 그렇지만 80년대 신자유주의 도입과 더불어 노조의 세력은 약화되고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하며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호전적인 외교전략으로 전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며 지배엘리트의 통치를 공고화하려는 것은 여전하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진의 대안과 전망은 무엇인가? 이는 저자 후기에 간략히 나타났는데 깨어있는 민중들이 지치지 않고 진상을 폭로하고 역사를 기억하며 주변 시민들을 조직하여 다수 민중의 의지가 관철되는 정치 체계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 그러기 위해 독립적인 언론을 만들고 대안적인 역사를 서술하여 학생과 시민들에게 교육하며, 반전, 반핵, 반차별 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과 같은 민중운동의 싹은 지금도 굳건히 살아있으며 이제까지 죽은 적도 없다는 것이 그의 낙관적인 전망과 견해다.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