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일 수 있다면 - 제1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임고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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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일 수만 있다면,

임고을 장편소설, 녹일 수 있다면(현대문학)

 

종말은 어릴 때 종종 떠올렸지만, 지구가 얼어버린다는 상상은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참신했고, 읽는 동안 또 읽고 나서도 여운이 짙게 남는다. 작가가 지구를 얼려버린 설정을 통해 이 이야기를 만날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임고을 작가가 앞으로도 태서진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을 그리는 이야기를 많이, 세상에 들려줬으면 좋겠다.

모든 게 얼어버리는 지구에서 살아남은 서진과 서리. 우주연구원인 할머니의 예언은 미치광이 할머니가 떠들어 대는 말로 무시당했고, 무시의 대가는 사납고 잔혹했다. 누군가에게는 언 지구가 얼기 전 지구보다 퍽이나, 다정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얼어버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이 물음에는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이 숨어 있다. 단기적으로 보면 살아볼 만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발적으로 얼음 인간이 되거나 미쳐버리지 않을까. 참신한 설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머지않은 우리 미래라는 것을 읽는 동안 느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이 피고 전에는 쉽게 볼 수 있던 곤충들이 자취를 감추는 등 지구에 문제가 생겼음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손 놓고 보고만 있으니 말이다. 지구가 얼어붙는 건 시간문제이며, 서진의 할머니처럼 머지않은 미래(닥쳐올 재앙)를 준비하는 사람이 분명 세상 어딘가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동생 서리가 편지만 남겨 놓고 가장 안전한 집에서 떠난 것을 알아차리고, 서리를 찾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는 서진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서리를 찾으러 가는 길은 살을 에는 두려움이 함께 했다. 모두가 얼어버린 것처럼 서리가 얼어버렸을까봐. 서리가 왜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서진은 서리만 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고, 해동기로 녹이는 동안도 서리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느껴야 했다. 불안은 항상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서진이 녹인 사람은 서리가 사랑을 두둔했던 혜성이었다. 서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과 더불어 허무함과 불안감이 서진을 가득 채웠다. 얼어버린 지구를 예상하지 못했듯(가볍게 넘겼듯) 상황은 생각하던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혜성을 집으로 들이게 되고, 혜성과 같이 서리를 찾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선다. 혜성이 있어서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혜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녹여달라고 부탁을 언젠가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거리를 두면서도 혜성을 챙겨야 하는 서진을 짓누르는 무게를 누가 감히 알 수 있을까. 서진과 혜성이 서리를 찾는 동안, 서리는 서진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한다. 물론 서진을 위해서 한 일이지만 서진의 생각을 전혀 안 한 것만 도 못한 일이다(서리가 나중에 후회하는 걸 보니). 서진의 삶을 파괴한 기유진을 녹인 것이다. 기유진을 녹인 이유는 서진이 여전히 과거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원치 않고, 직접 부딪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서리만의 생각 때문이다. 서진을 위한 일이었지만 결국, 서진은 고통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서진과 서리뿐이었던 집에는 혜성과 그의 형 태양, 기유진, 할머니가 한자리씩 자리 잡는다. 할머니가 준비한 집은 마치 그녀가 지구를 얼린 장본인인 것처럼 모든 게 갖춰져 있고, 어쩌다 녹여져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그들은 서진과 서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서진은 지구가 얼기 전에 지옥에서 살았다. 자신의 삶을 파괴한 이를 한 공간에 받아들인 건 어쩔 수 없는 조건 때문이고, 서리의 바람대로 서진은 유진과 직접 부딪쳐 얼었던 자신의 일부가 녹는 걸 느낀다. 서리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없지만-언 지구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을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말이 안 된다-, 서진은 원치 않은 상황을 마주하면서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혜성이를 녹이고 나서부터 서진의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있어도 언 지구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서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을 잘 활용하여 누군가를 녹이고, 스스로 지켰다. 끝에는 처음과 달리 사람들을 녹여 구하겠다고 말한다. 직접 얼음 인간이 되어 본 서진은 얼음 인간이 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험했기에 얼어있는 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얼고 싶냐는 서진의 말에 혜성은 이미 경험한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부분이 있다. 꽁꽁, 얼어버렸다고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며,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섬뜩하면서도 가장 잔혹한 형벌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이성적이고 현 상황에 개의치 않을 것 같던 태양이 노란 털실을 끌어안고 흐느끼며 한 말은 아무래도 언젠가 누군가 할 말 같다. 신을 녹이자. 어디 실수로 얼어 있나 본데.” 그렇다. 신도 실수로 얼어버려서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무섭다는 것을 몇 달 우울증을 앓으면서 알게 되었다. 사는 이유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정말 모든 게 얼어버린 지구 땅덩어리에 혼자 남겨진 기분 아닐까. 이렇게 살 바엔 얼음 인간이 되고 싶다가도, 그렇다고 얼음 인간이 되기는 무서운 모순되는 마음이 매순간 충돌하며 살아내야 하는 건 인간에게 가혹하다. 정말 신의 실수가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랄까.

녹일 수 있다면은 머지않은 우리의 미래를 미리보기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잠깐이라도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작가가 지구를 얼려버리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모든 게 얼어버린 지구를 보니 꼭 지금을,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어쩌면 모든 게 얼어버린 지구보다 먼저 얼어버린 건 인간의 마음 아닐까? 하루빨리 꽁꽁, 얼어버린 수많은 마음이 녹았으면 좋겠다.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해동기가 있다면, 해동기는 밤낮없이 열일할 것이다. 얼어버린 세상보다 적어도 따뜻한 세상에서 사는 게 나으니까. 올겨울에 이 책을 만난 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것 같다. 올해 말이 되어서야 얼었던 나의 마음이 천천히, 녹는 중이니 말이다.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현대문학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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