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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이수영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평점 :
‘복수의 여신’의 탄생은 예견한 일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 외 15인, 『복수의 여신』(현대문학)(가제본)
『복수의 여신』은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더 많은 독자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973년에 설립된 영국의 비라고 출판사 50주년을 기념에 기획된 작품’이다, 제각각으로 보이는 열여섯 편의 이야기가 각각 다른 국적과 인종, 성적 정체성과 문화, 세대를 뛰어넘어 인간 보편의 불안과 고뇌를 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차별적 언어를 전복하기 위해 시작됐지만 퀴어와 장애, 사이버 불링, 세대 갈등, 기후 위기와 같은 동시대 고민까지 더해져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기획된 의도조차 확장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여성의 글쓰기’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개인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끝을 맺는다는 것은 개인이 갖고 있는 세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책의 등장이 반갑고, 더 넓은 세계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열여섯 편의 이야기 모두 잘 읽었다.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서문에서 ‘이 책을 집어든 여성은 영영 회복이 어려울지도 모르며, 여성 독자라면 각오를 하라고’ 해서 얼마나 사납고 거칠고, 직접적인 이야기일지 긴장과 궁금증이 동시에 들었다. 여성이라서 충격을 받거나 휴유증을 감당해야 하는 거라면 그건 여자로 태어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는 책임감마저 들었다. 솔직히 여자이지만 아직 여자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세상의 일을 겪어보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듣기만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내가 할 수 있을지 등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숨을 가득 들이마시고, 헙- 하며 참았던 부분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무난하게 물 흐르듯 문장을 넘겼다. 그러다 덜컹, 거리는 부분에서 잠시 문장에 밑줄을 치고 곱씹으며, 답 없는 종이에 답하라며 펜을 꾹꾹- 누르기도 했다. 소설마다 보여주는 것들이 달랐지만,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것처럼 마지막 문장 끝에 드는 생각과 질문은 비슷했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끊이지 않는 문제들이, 먼 과거에서부터 일어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살이 불어나듯 깊고 넓고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무서웠다. 애초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세상에 생긴 것이며, 그 문제 앞에서 쩔쩔매는 건 여성의 입장에서 더 가혹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느낀 건 처음이다. 내가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도 몰라서 그저 멍하니 수많은 여성이 목놓아 소리치는 모습을 두려움에 떨면서 바라보는 기분이다. 열여섯 명의 여성이 들려준 이야기가 하나같이 현실적이고 적나라해서 마음이 덜컥, 떨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여성 작가들의 릴레이 속에서 여성의 언어는 세계의 절반이 아닌 세계 그 자체가 되고, 때로는 세계의 전부를 넘어서는 세계가 되며(천선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쓰여온 이 말들을 여성 작가들이 줍고, 엉겨 붙은 것들을 걷어내고 단단히 손에 쥐며 그리고 일제히, 던지는(김하나)’ 것을 깨달았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차별적인 언어들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칭하는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를 주워서 여성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엉겨 붙은 것들을 떼어내고 남은 본래의 것을 손에 쥔 채 앞으로, 저 멀리 던져 버리는 수많은 여성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복수의 여신』이 여성 작가들의 시간과 책상, 종이, 의자, 펜 끝에서 탄생하여 나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 독자 또는 이 책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나게 된 독자들과의 인연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으로 실린 「용 부인의 비늘」은 ‘여성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라고 느껴져 여운이 길게 남았다. ‘월경’과 ‘폐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이 이렇게 짙을 줄 몰랐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생리를 하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라는 수식을 붙일 만큼 여성의 삶을 ‘순환’한다고만 생각했다. 폐경을 여성의 삶에 포함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생리’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했다. 월에 일주일은 감정과 통증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은 귀찮은 여성으로서의 매월 행사 같은 개념이었다. 여성으로서 여성이라서 가능한 육체적인 변화를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불편하고 불쾌하게만 생각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월경과 폐경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이 「용 부인의 비늘」을 통해 여성의 삶, 즉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생리로 인한 통증은 곧 내가 살아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는 육체의 신호라는 것을, 세상 곳곳에서 용 부인이 될 준비를 하거나 용 부인이 될 여성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면서 여성의 삶이 고귀하면서도 거칠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다.
『복수의 여신』을 읽는 여성 독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거나 짙은 여운에서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뜨겁고 물컹한 걸 느꼈다.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답답하긴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닮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조금 확신한다.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가제본을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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