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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기의 역학 TURN 3
설재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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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파괴로 시작된 변기의 역학은 자본주의의 어둠을 적나라하고 섬뜩하게 드러낸다. 아정의 선별작업은 마침내 자신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렸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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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기의 역학 TURN 3
설재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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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力學): 부분을 이루는 요소가 서로 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서로 제약하는 현상.
이 작품은 단순히 제목의 강렬한 이미지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다 읽고난 후 다시 제목을 들여다본 나는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는 어떤 집단이든, 무리든 내부에서의 역학관계가 파생된다. 머니빌 사람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하려했던 아정은 어쨌든 머니빌에 속해있는 사람으로 이상기와 관계를 맺게 된다. 가족들에게도 선을 긋고 있던 아정은 결국 엄마에게 의존하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에필로그에서 동생이 아정에게 ‘가족 할인’에 대해 묻는 것 또한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 존재한다.
아정은 역학관계에서 벗어나고싶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역학’의 중심에 있다. 아정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역학 그 이전에 존재하는 어떠한 무리에 소속되고 싶은 갈망이 내면에 깔려있다. 이 갈망은 아정이 끊임없이 사람을 선별하게끔 한다. “나는 아주 양식 있고 합리적인 사람이고, 능력이 없어서 못 번 게 아니라 예술이란 허상에 투신하느라 어쩔 수 없이 안 번 것뿐이다.”(29p) 이러한 생각을 센터의 직원에게 증빙하려하는 아정은 머니빌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머니빌 사람들과 센터의 직원을 구분짓는다. 아정의 선별은 사실 삶 전체에 존재한다. “그 누구 앞에서도 제대로 할 수 없던 자기주장을 왜 저 노인 앞에선 완벽하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그러니까, 아주 왜소하고 없어 보이고 아정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여자 노인이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77p) 실버스파클이라는 회사에 소속된 후에는 자신을 비롯한 사장 무리와 이상기를 구분짓는다. 작품 속 아정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작 변기때문이라는 것을 소설을 몰아치듯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정이 401호가 아니라 402호였다면, 이상기가 501호가 아니라 502호였다면 아정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아정이 겪은 봉수파괴는 자본주의의 어둠을 적나라하고 섬뜩하게 드러낸다. 봉수파괴의 원인에는 또 다른 어둠이 있었고 이는 참혹하지만 우리가 마주봐야할 면이었다. 실버스파클 입사 이전의 아정의 삶은 남루하다고 할지언정 비참하지는 않았다. 아정의 선별작업은 마침내 자신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렸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을 던졌다.
재밌지만 무언가 뾰족한 것이 찌르는 듯 아픈 작품이기에 ‘재미’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장 강렬한 변기 이야기. 어쩌면 우리 모두 그 변기의 역학에 휩쓸려 허우적대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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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p. 이상하지. 같은 건물에 살 이들을 한 번 본 적 없으면서도 자신은 다르다며 미리 선을 긋고 싶었다.

201p. 그들은 그걸 상처받은 어른의 어쩔 수 없는 유산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그 행위들은 비자발적이고 괴로운 도돌이표가 아니었다. 몹시 강한 능동성과 의지를 곁들인 계승에 가까웠다. 아빠는 자신의 부모를 그리고 엄마는 자신의 남편을 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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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82호
최희주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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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미스터리. 두 단어의 조합은 들여다보기만 해도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 듯하다. 두 단어가 함께 있을 때의 기대감은 한낮의 태양처럼 뜨겁다. 우리를 서늘하게 해줄 계간미스터리의 여름을 기다려왔다.
이번 여름호에는 신인상 수상작인 ‘탁묘’를 비롯해 단편소설 4편이 실렸고 ‘수호신’의 작가 청예의 인터뷰도 있었다.
‘탁묘’는 매력적인 제목만큼이나 오묘한 분위기로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 힘이 있었다. 소설은 등장인물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이러한 서술방식이 이야기에 몰입을 더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다가갈수록 극으로 치닫는 전개와 밝혀지는 진실들은 머릿속에 ‘탁묘’를 새기기에 충분했다.
미스터리와 호러의 컬래버 특집에 걸맞게 4편의 단편소설은 통일감 있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저수지’는 영화 ‘파묘’가 생각나는 한국 오컬트의 향이 짙은 작품이었다. 저수지의 물을 빼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깊은 숲의 음습한 안개 같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계간미스터리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고스트 하이커:부랑’이었다. 계속해서 나아가는 순례자, 혹은 부랑자들의 이야기. 다다랐음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마치 외국 소설을 읽는 듯한 분위기의 장면들은 독자를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수호신’의 작가 청예의 인터뷰도 알찬 내용으로 구성되어있어 흥미로웠다. 뻔하고 일반적인 질문으로만 이루어진 인터뷰가 아닌, 작가의 사소한 취향이나 작품과 관련된 감상 포인트 등 작가와 작품이 더욱 궁금해지는 인터뷰였다.
올해의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치밀하게 오싹한 계간미스터리와 함께 잿빛 여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190p. 산 사람에 섞여 서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수없이 오가던 사람들.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던 그들이 해가 지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천 년이 넘은 길에서 시간의 경계를 넘어가며 스스로 부랑자가 되어 배회하며 과거를 지우는 영혼들이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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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 지느러미 TURN 1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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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는 물의 이미지가 있다. 어릴적 스노쿨링 고글 너머로 본 거대한 검은 바위 밑, 더욱 어둑하고 짙은 공간. 물속에서 본 바위는 생각보다 웅장한 본체를 깊은 물속에 숨기고 있었다. 검은 바위보다 나를 단번에 압도한 것은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물이었다. 무엇이 등장하든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시커먼 물은 두려움이자 모험을 떠나야할 것만 같은 미지의 세계가 되었다. ‘입속 지느러미’는 그런 미지의 세계로 기꺼이 발을 내딛은 ‘선형’이 등장한다. ‘피니’의 존재는 오싹할 정도로 달콤한 노래다. 피니에 대한 선형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너무나 얄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형에게 있어 피니는 강렬한 존재다. 작중 장 사장의 말에서 선형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거 알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계속 계속 생각하다 보면 이해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다 상관없어져.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지지. 어차피 끝내 알 수 없을 테니까. 나 아닌 모든 존재는 결국 미지의 영역이니까.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거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을 왜 계속 생각할까?” (143p.)

‘입속 지느러미’는 독특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유지하면서도 ‘피니’라는 존재를 통해 작품에 새로운 빛깔을 입혔다. 작가가 어떻게 항상 맛깔나는 이야기들을 준비해올 수 있는 것인지, 작가는 평소에 어떤 생각들을 하는 것인지 내심 궁금했는데 마침 ‘터닝북’이 이번에 함께 출간되었다. ‘터닝북’에는 작가의 짧은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소개도 만나볼 수 있었다. 작가의 일상적인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온전히 소화하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소설 속 세상이라도 조금이나마 덜 퍽퍽했으면 하는 마음이다.”(터닝북,10p.)

선형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파도를 찰싹이고 있을 피니의 꼬리지느러미가 아른거린다.


※서포턴즈 1기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에 의거해 작성하였습니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집요함의 계보가 어김없이 선형을 갉아먹었다. 그는 언젠가 집착이 자신을 집어삼키리라 직감했다. 어쩌면 이미 끝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 P88

노래를 기억해줘. 너로 인해 생명을 얻은 노래를. 네가 다른 누군가의 수조에서 그를 위해서만 노래 부를 바에야, 내 노래를 안고 이 광활한 바다를 떠돌길.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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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4.봄호 - 81호
김태현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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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라는 단어 자체로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이 일렁인다. 미스터리 장르의 문학을 떠올리면 학생 시절 읽었던 일본의 소설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미스터리 장르 문학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한국의 미스터리 문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계간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한국에도 미스터리를 열성적으로 사랑하는 작가와 독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처럼 한국 문학에서는 미스터리 문학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계간 미스터리’에는 비교적 최근에 쓰인 한국의 미스터리 단편들을 모아 볼 수 있었다. 르포르타주 1편, 신인상 수상작 단편 1편, 한국 단편소설 4편, 외국 단편소설 1편으로 작품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모든 작품이 저마다의 개성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이번 호에서는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라는 무경 작가의 작품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인물 신정용의 서사가 맛깔나게 버무려졌다. 소설의 주제와 악마의 의미도 생각할 지점이 많아 밀도 높은 이야기가 되었다.
미스터리에 관한 인문학적인 고찰인 ‘한국 미스터리를 읽는 4가지 키워드’ 시리즈가 특히 흥미롭다. 키워드 첫번째로 로컬리티와 미스터리가 소개되었는데 다음 호에서는 어떤 키워드가 등장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미스터리 문학을 마주하는 시각이 한층 깊어지고 작품의 재미있는 요소들을 찾아내어 능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단편소설만 계속 배치한다면 미스터리 문학의 장르적인 분위기나 빠른 호흡에 쉽게 지칠수도 있다. ‘계간 미스터리’는 그런 독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중간중간에 신인상 수상자 인터뷰나 정세랑 작가의 인터뷰 등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인터뷰들이 반기고 있었다. 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인상적으로 읽었고 출간되었을때 북토크에서 여러 이야기도 들었던 기억이 있어 인터뷰가 반갑고 알찼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긴 시간 축적된 것들의 빛남을 조금이라도 담아내고 싶어요.”라는 작가의 말이 은은하게 떠오른다.
‘트릭의 재구성’에서는 살인사건의 전말을 독자가 파헤쳐가는 참여형 소설로 ‘교도소 독방 살인사건’을 담았다. 추리의 정답을 큐알 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한 점이 독자에게 추리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여러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게 함으로서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계간 미스터리’가 한국 미스터리 문학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미스터리의 성장과 함께 오랫동안 보고 싶다. 다음 호에서는 어떤 짜릿한 혹은 저릿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어수선한 글을 마친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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