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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순간에도
정희재 지음 / 갤리온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리 제목부터 대 놓고 간질간질한 에세이는 20대
이후로 끊었는데... 제목을 보고 확 꽂히게 된
일이 최근에 있었다.
몇 주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이야길 나누다 둘째 이야기가
나왔다.
요지는 그 힘든 일을 참 잘 견뎠다. 우리가 다시 이리 마주 앉아 밥도 먹고, 수다도 떨 수
있다니 감개무량하다. 보기엔 참 여리여리한데 참 대견하게도 잘 지낸다.였다.
그 말에 난 분명 괜찮지 않다는 대답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헌데, 입이 방정맞게 "괜찮아 언니~ 견딜만했어."라고 선수를 쳐버렸다.
세상에. 입이랑 머리가 이리 따로 놀 수가 있나? 내가 말하고 나만 어이가 없었다. 물론 열에 아홉 반은
괜찮고, 잘 지내지만 내 속을 툭 까놓고 말하는 몇 안되는 언니였기에, 내 어리광도 모두 받아주는 언니이기에 그냥 한 번쯤은 힘들다 말하고
싶었다. 근데 타이밍을 놓쳐 며칠이 지난 지금도 영 아쉽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누군가와 만났다 헤어진 뒤, 잠자리에 누워서 문득 "아,, 그때 이렇게 대답할걸." 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난 왜 내 생각을 제때 말할 줄 모르는 걸까.
어제 교회에 갔다
이런 얘길 들었다.
"어머 아들 둘이세요? 세상에~ 딸이 좋아~
딸이 있어야 한다니까. 날 보니까 딸이 있어야 하더라고. 아들 둘은 너무 힘들어. 키워봤자 쓸모가 없다니까."
마치 아들 둘을 키워본 듯 말한 그녀는 두 돌쯤 된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마치 자기처럼
살아야 완벽하단 말들이 이어지는 거 같았는데.. (초면이라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 아주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예상치 못한 폭탄을 맞고 그냥 멍-했다. 잠깐
그리고 깊게. 그러다 시간이 지났다. 밤이 되니 자꾸 떠올랐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 그래요~ 근데 자식을 뭘 바라고 낳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본전 뽑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마음을 갖고 아이를 낳는 건 옳지 못한 거 같아요. 근데 그쪽은 친정집에 엄~청 잘하시나 봐요. 난 엄마한테 나 같은 딸 낳으란 저주를 받아서 그런가 딸 욕심이
안 생기네요~"
헛고생하고 있단, 헛살고 있단 그녀의 단언.
내 삶이 낙제했단 그녀의 채점에 내 속이 베베 뒤틀렸다.
그냥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다 생각하면 안 되나. 요 모양
요꼴인 이 나라에서 애 낳은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우린 공평하게 대단한 일을 한거 아닌가. 속이 상하려 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책이 있단다. 이번 생은 망한 걸로 치고, 더 자유롭고 치열하게 살겠다는
역설을 담은 제목이라고 했다.
"이번 생은 망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사계절 순환처럼 내 일상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다. 계절의 반복처럼 나는 수없이 실패하고 절망하고 비통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말, '그래도 다시'가 아니라 '이번 생은 망했다'고 낮게 읊조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걸을
것이다."
세상 기준에 비한다면 내 생도 망한 생일
것이다. 번듯한 집이나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믿는 구석이 되어줄 부동산은커녕 통장조차 얇디얇은 아들 둘 맘이니. 몽매 달아도 시원찮을
수준이겠지. 그래도 난 쿨하게 자유롭게 살 거다.
"아들 잘~ 키워 독립시키고 나면, 나도 여느 아줌마들처럼 친구들과 삼삼오오 형형색색의 잠바를
두르고 등산도 해볼테닷. 손주 맡길 생각 말고 명절에만 와다오~~~"
이 생각을 첫째를 낳은지 삼 일째 되는 날부터 쭉- 해왔다. 앞으로도 변치 않을
예정인데...
이 글을 몇 년 뒤, 몇 십 년 뒤보면 기분이 어떨까? 철부지였구먼~ 할까? 딸 낳을 줄
몰랐구나? 할까? ㅎ

철부지는 '절부지(節不知)'에서 비롯되었다지?
계절을 모르는 절부지. 농사는 철에 따라 심고, 가꾸고, 거두어야 하기에 철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해서 나온 말이란다.
나보다 앞서 자식을 키워본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린 지금이 우리
부부에게 인생의 봄날이라는데... 그럼 그동안 피곤했던 게 춘곤증이었나. 아무래도 철부지가 맞나 부다.
날 모르는 이 책이, 만난 지 고작 몇 주 밖에 안 된 이 책이 넘나 애틋하게 들이대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어쩐지 오늘은 나와 궁합이 맞는구나. 참 신기하다. 책이란 이런 거구나 새로운 걸 깨달았다. 한번 읽고 별로였다고 쉬이 무시하지
말아야겠다.
이 귀한 교훈을 얻으려고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