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그래요. 사람의 인생은 우주에 비하면 '고작'정도이죠. 하지만, "시간이 짧다고 가치가 적다할 순 없다."생각해요.
왜냐고요?..
내가 숨 쉬는 동안 살아내는 내 삶의 무게,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가족, 친구, 이웃 점점 퍼져갈수록 촘촘해지는 공기의 밀도가 모두 이 한 스푼의 시간 안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결코 헛되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신이 내게 준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우린 그 시간을 계속 지금도 소모 중에 있어요. 천천히 혹은 빠르게 녹아 없어지고 있죠.

세제가 모두 녹아 물속에서 제 역할을 하듯, 내가 세상에 스며들어 형체는 없어져 가고 있지만 '사람다움'으로써의 역할을 해낸다면 우리 삶이 녹아난 이 인류의 인생은 몹시 거대하고 멋질 거예요!  

 

먼 타국에서 지내다 비행기와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로 사라진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택배를 보내왔어요.
폭 1m, 높이 2m의 택배 상자에 담긴 것은 바로 로봇.

사실 이 로봇은 명정의 아들이 회사에서 개발 중이었던 로봇 샘플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유품을 대신 부쳐준 것이었어요.
그렇게 얼떨결에 로봇은 명정의 가족이 되어 은결이란 이름을 얻게 되고 세탁소에서 일하며 함께 지내게 됩니다.

로봇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이 소설은 로봇이 사는 인생의 모습을 꽤 근사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에서 일상의 일부가 되어 가는 모습이 짠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어요.

은결은 17세 남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로봇답게 담긴 지식 데이터가 꽤 많습니다. 물리학, 생물학, 화학, 천문학, 재무 설계, 의학정보 등...
하지만, 어쩐지 갓 태어난 아기가 자라는 모습과 비슷한 발달을 거칩니다.

옆모습과 앞모습을 연관 짓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외출한지 몇 시간이 지난 건 기억하지만 주인이 걱정할 거란 생각까진 하지 못하고, 멀티플레이(그래 봤자 다림질하며 노래하기 정도지만)가 가능하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리죠.

그러던 은결은 시간이 갈수록 일의 정밀성이 높아지고, TV를 즐겨 보고,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수많은 유추 행위를 통해, 주인이 말하지 않은 것도 상황을 통한 짐작으로 종합, 행동하는 경지에 이릅니다.(로봇답게 썼지만 사람으로 치면 그냥 눈치가 생긴 거죠.)
그에 따라 늘어나는 경험과 지식의 질량은 그에게 필요치 않은 무거운 털외투처럼 나날이 몸을 감싸게 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은결이 시호(동생이었고, 친구였다가, 누나가 된..)의 눈물과 마주했을 때입니다.

...이 눈물이 슬픔 또는 아픔, 외로움, 그리움, 기쁨 어디에 해당하는지 은결이 자신이 보유한 상과 일일이 대조해보지만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연산은 포연을 닮은 안갯속을 헤맨다. 난투가 벌어진 듯 배열이 뒤섞이다 희미해지고 이윽고 투명해지는 0과 1들. 감정과 무관한 거라면 그저 만취 상태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모두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눈물은 어떤 생리작용보다 해독이 어렵다.

울지 마세요 오였나, 시원해질 때까지 우세요인가. 무슨 일이세요 저한테라도 말씀해보세요. 따뜻한 차를 타드릴까요. 어디 편찮으세요. 구급차를 불러드릴까요.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 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럴듯한 조치를 취할까. 


용량이 제한된 로봇인 은결은 정말 사람처럼 복잡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 데이터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요? 


로봇이 살아내는 인간의 삶을 보며 내 삶과 사람다움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심오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의외로 가볍게 넘어가는-
담긴 이야기도 어려울게 없었지만 마지막에 찡-한 반전이 담긴 소설.
읽은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책.
 『한 스푼의 시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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