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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다 - 조심하지 않는 바람에 마음이 온통 시로 얼룩졌다
진은영 지음, 손엔 사진 / 예담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요즘 요약글을 읽는게 유행이랍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할라치면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말을 똑 짤라 먹는게 예의에 어긋난 일이던 건 이제 옛날 얘기인걸까요?
저도 웹상에서 댓글로 "누가 요약 좀..."이라고 쓴 걸 본 적이 몇 번 있어요. 친절하게 정리된 요약글을 읽고 긴-동영상보기를 패스한 적도 있구요.
시도 일종의 요약글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시 안에는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이 함축되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요약글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아주 다른 것같아요.
요약은 핵심 내용만 담겨있는 글이라 상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지만, 시는 생략하는게 아니라 압축시켜 놓은 글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러고보면 꽁꽁 싸매 숨겨놓은 보따리 같은 시를 풀어헤치는 순간! 글자 혹은 문장 속에 꾹꾹 눌러 간신히 싸매놓은 짐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는!! 이런 경험은 시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요약글이 유행하는 요즘과는 대치되는 시대에 반하는 문학이 시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두서가 길어졌네요.
요 몇일 쉽지 않은 시가 묶여있는 책 한권 읽고 있어요.

<시詩시時하다>는 "시인이 고른 시와 시인의 글"이 담겨있어요.
처음 이 책을 읽겠다 마음먹었던 건 "시인은 어떤 시를 읽을까?" ,"시인은 어떻게 시를 읽을까?" 였어요.
시인의 기준에서 좋은 시는 과연 어떤 시일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많이 들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초급용 20% + 중급용 65% + 고급용 15% 정도의 난이도로 시가 담겨 있었다고.. 전 생각해요. ㅎ
초급용은 한번 읽고 이해되는 시
중급용은 2-5번정도 읽고 이해되는 시
고급용은 분명 읽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당췌 모르겠는 시
글이 너무 길어지는게 마음에 걸리지만
꼭 나누고 싶기에 시 조금 나눠볼께요~
(제 기준에서 초급/중급/고급 순이에요.)

고슴도치
폴리 클라크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었어.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
내 손 안에서 잔뜩 긴장했다, 살아있다는 움찔함.
사랑이 너무 깊으면 살 수가 없어,
고슴도치는 속삭였지, 척추에서 이빨 마주치는 소리를 내면서.
나는 고슴도치를 골판지 상자 안에 넣어 자신으로부터 숨겨주었지,
밤새 고슴도치는 갉아서 구멍을 내고 달아났어.
나는 너무 울어서 어머니는 내가 멈추지 않으리라 생각했지.
어머니 말씀이, 사랑이 너무 깊으면... 그래도
나는 남들만큼 자라나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
가시와 달아나는 솜씨로.
+
누군가의 단단한 사랑이 갑갑해 구몽을 뚫고 촘촘한 가시를 세우며 달아났던 기억이 우리에게도 있어요.

서봉氏의 가방
천서봉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
(중략)
...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
가방 속을 보면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즐겨쓰는 필기도구, 휴대용품의 종류로, 읽고 있는 책과 그 안에 그어진 밑줄들로, 온갖 내밀한 것들을 내게 보여주세요.
..너무 어리석은가요? 가방 바깥쪽의 로고 무늬만 보아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들 하는 세상인데.
가방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넣고 싶어하는 서봉씨를 어찌해야 좋을까요. 넣을 수 없어서 쏟아서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을 우리도 한두개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명왕성되다
이재훈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빛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것이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글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미국 방언협회는 'plutoed(명왕성되다)'를 2006년의 새 단어로 선정했대요. '태양계로부터 소외당했다'라는 뜻입니다. 그 해 명왕성은 태양계의 행성 지위에서 퇴출당했거든요. 명왕성이 태양 궤도를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강제로 잊혀진 별이 되었을 뿐.

두번째 질문이었던 시인은 어떻게 시를 읽는지가 궁금하시다면 이 건 책을 통해 확인해보셔야 할거에요. 이건 제가 글로 어떻게 요약할 수가 없네요.
시를 좋아하긴 하지만 시집을 많이 읽어본 경험이 없는 초급자 수준인 저로썬 이 책에 적응하는데 딱 책의 반이 소요됐어요.
처음 반을 읽을 땐 한번 읽어선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내 머리에 문제가 있나 의심이 드는 동시에 시인은 역시 어려운 시도 잘 읽는구나란 생각이 몇 번들기도 했어요.
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거죠. 몇 번의 고비를 넘기다 속된 말로 '인생시'를 만났어요. 그렇게 한편, 두편 시가 와닿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시가 파도처럼 밀려와 제 마음 속을 휘몰아치지 뭐에요!
이해할 수 없을거 같은 삼차원 세계의 문학같았던 시였는데 시력이 나빠지고 처음 안경을 꼈던 그 날처럼 시가 또렷히 보이기 시작한건 순전히 이 책의 저자인 진은영 시인 덕분일꺼에요.
첨부된 글이 없었다면 아마 시에 대한 이해력이 확- 떨어져서 시에 대한 동경심을 접고 배신감에 이 글을 쓰고 있었을거에요! ㅎ
처음엔 시를 내가 읽고, 내가 생각해보고, 내가 해석해봐야지,,, 시인이 떠먹여 주는거에 대한 거부감이 살짝 있었거든요.
헌데, 시인은 절대 떠먹여 주지 않아요! ㅎㅎ
심보선 시인의 글처럼 이리와서 좀 보라고. 시라고 불리는 이 이상하고 놀라운 말들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할 뿐이에요.
시에게 다가가는건 오롯이 독자인 내 몫이니까요.
저처럼 시 초급자, 입문자에서 벗어나고 싶은 분이나 문학적 시를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