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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역사는 아주 작습니다
이호석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4월
평점 :

지난 2005년 문화재 당국이 한 극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하자 건물주가 건물을 부숴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건물주는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요? 문화유산이 될만큼 가치있는 극장을 꼭 부숴야만 했을까요? 지켜야 하는게 당연하다 생각하시나요?
맞습니다. 지키는게 당연하지만,,, 이 극장의 건물주는 문화재가 되면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을 것을 우려해 아예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없애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극장의 이름은 스카라극장입니다.
돈에 눈이 먼 무식한 사람이라 생각하시나요? 우리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리 동네 개발에 문화재가 걸림돌이 되어 이전이나 철거를 해야 한다면 우린 어느쪽을 택하게 될까요. 개발에 찬성하는 분들이 더 많은게 우리네 현실일 겁니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 중 하나는 유물을 물건으로만 취급하는 역사를 기억하는 잘못된 방식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유럽의 유물, 유적들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유럽은 역사와 유물을 기억하는 방식이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제작기법, 조형미, 어느시대 작품인지를 외우는 동안 그들은 유물이나 유적에 담긴 스토리를 배우고 이해합니다.
나치 독일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곳, 피카소가 즐겨 찾던 식당의 늘 앉던 자리,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된 곳.
스토리를 통해 자연스레 당시의 역사를 느낀다면 내가 역사의 한 페이지 안에 들어와 있단 느낌이 들테고, 유물이나 유적을 대하는 태도와 바라보는 시각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유물과 유적이 얼마나 험난하고 긴 세월을 견뎌서 우리에게 왔는지를 배웠다면,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에 이상현이나 최해철이란 이름을 장난삼아 돌로 새긴다거나, 1973년 국보가 된 반구대암각화를 탁본해가는 (울산의) 고위공무원들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아무나 봐서도, 유출해서도 안되는 과거 기록을 들춰내 조작, 편집함으로써 반대파를 숙청한 무오사화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사건처럼 반복되는 역사 또한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난중일기가 도난당했을 때의 일입니다.
도난당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수사에 진척이 없자 대통령이 나서서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한 시민의 제보로 이튿날 난중일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유출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체포합니다. 그리고 난중일기는 곧장 헬기를 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집니다.
난중일기를 살펴본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왕조실록처럼 복제, 분산보관토록 지시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의미가 있지만 난중일기는 이미 시중에 그 내용이 다 나와있는바 무슨의미가 있다고 생각한건지.. 아무튼) 복제본이 큰 의미가 없는건 둘째치고, 복제본이라 함은 본래 똑같이 만드는게 원칙이지만 박대통령은 난중일기의 표지 제목을 손수! 직접! 붓글씨로 써서 그걸 표지로 달게 합니다. 붓글씨와 현판을 직접 쓰는걸 즐겼던 양반이 난중일기에도 꾸역꾸역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언짢치만, 말이 나온김에 박정희 대통령이야길 더 해야겠습니다.
그에겐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1917년 태어난 사람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으로 한사람은 세계적인 현대음악의 거장, 또 한 사람은 악명 높은 독재 왕국의 주인입니다.
한 사람은 어린시절을 보냈던 경남 통영의 앞바다를 자신의 삶보다 더 사랑했던 천재 음악가, 또 한 사람은 일제 만주군 장교 출신 한국 대통령.
바로 윤이상입니다. (나비의 꿈, 광주여 영원하라,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곡 '심청' 등을 작곡한 작곡가)
둘은 모두 국내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사람은 음악적 성취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고, 또 한사람은 일신의 출세와 영광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윤이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역사가 누군가의 편집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라면 그 편집자는 아마 사필귀정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 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그 뒤로부터 나는 정치성 있는 음악을 썼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중에서)
동백림 사건을 교훈삼아,
우리도 찬물 세례받기 전에 정치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른날은 몰라도 오늘은!! 깨어있자구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