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연하고도 사소한 기적
아프리카 윤 지음, 이정경 옮김 / 파람북 / 2022년 9월
평점 :
의심이 없지 않았다. K-000이 정말 세계적으로 인기일까. 우리나라의 착각 혹은 오버가 아닐까. 그런데 K-푸드를 쓴 외국인이라니! 자화자찬이 아니라 기뻤다. 한식을 우리만 즐기는게 아니라니 괜히 (내가 음식을 대접한 것도 아닌데) 뿌듯했다. 그래. 국뽕이다 뭐다 놀려도 좋다. 난 이런거에 뭉클하고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더 감격스럽다!)
"자네에, 너어무너어무 뚱~뚱~해!"
내 앞의 할머니는 단도직입적으로, 내 몸은 빵을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영어는 썩 유창하진 않았지만, 전달력은 확실했다.
p.69

그녀는 뚱뚱했다. 114kg에 만나는 지인들이 살이 왜이리 많이 쪘냐며 의아해 했을 정도였는데 본인만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도끼같은 말 한마디가 날아와 꽂혔다.
"한국의 나이든 여성들은 말도 못하게 직설적이다. ... 그 부분은 아프리카 부모님들과 똑같다.... "어른 앞에서는 공손할 것. 이상!" 한국 문화도 (아프리카 문화와) 똑같다."(p.69-70) 문화적 공통점이 이런데 있을 줄이야. 다소 무례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애정까지 느끼고 만다! 할머니와의 짧은 대화는 그녀가 한식에 대해 한발짝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어느 날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오즈 박사가 비건 생식 다이어트를 소개하고 있었다. 오즈 박사가 야채 바구니를 보여주며 누구든 이것을 다 먹으면 살이 빠진다고 말했는데, 할머니와 장을 봐 온 장바구니와 똑같았다고. 그 순간 그녀의 인생이 바뀌었다. (이후 오즈 박사를 만나고 그의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인연이 이어졌다.) 생채소로 음식을 싸먹고, 발효 음식, 한국 반찬을 먹는로 첫 달에 13kg(wow!), 1년만에 50kg이 빠졌다.

저자는 음식을 통해 몸의 균형을 유지해가는데 한식이 적격이라며 "한식을 먹는 것은 몸의 언어를 듣는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p.104) 과체중이라면 살이 빠지는 것이 회복과 치유의 신호인 것처럼 음식으로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한식은 그녀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 삶까지 바꾸어 놓았다.
고추장을 흔히 '한국 케첩'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적절치 못한 호칭이다! 이 고추장은 한국식 고춧가루 에 '찹쌀'이라고 불리는 끈기 있는 쌀, 콩을 발효시킨 메주, '엿기름'이라 고 불리는 맥아, 거기에 소금을 더해 발효시킨 소스다. 항아리 속에서 수년간 숙성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거친 이 소스는 손에 닿는 음식들, 가 령 내가 들고 있는 평범한 버거마저도 천상의 맛으로 바꿔준다. 그러니 이 미각의 황홀을 자랑하는 고추장을 그냥 케첩이라고 부르는 건, 그 맛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p.17

어느 외국인이 고추장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인 아프리카 윤은 UN대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찜질방에 맥반석 계란을 즐기고, 응급실에 실려가서도 한식 유튜브를 보는 그녀는 한국인인 나보다 더 우리 문화를 깊이 알고 즐길 줄 안다.
그녀가 방송 관련 일(N잡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며 어쩐지 외국인이 한식 요리를 가르치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방송이 생긴다면 전통이나 정석을 따지기보다, 어설프고 정석이 아니어도 기껍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면 좋겠다.
한식이 붉은(매운) 음식, 흰(맵지 않은) 반찬이 조화를 이루고, 고기는 한 접시 소박하게 나물과 김치는 넉넉하게 담아 차리듯, 우리도 낯선 문화, 다른 사람들을 더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한국문화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