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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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까지였나. 해마다 슬픔을 상기시켜 주는 날이 내게 생기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땐 세상 모든 불행이나 사고는 남의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었을 때가 좋았다 말하는걸까. 나이가 들수록 슬픔을 주름 사이에 감추고 살아야 해서? 슬픔이 디폴트값이 된 채 살아야 해서?



스무살까지의 나는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거라고 말하는 우둔함에 차 있었다. 어리석은 시절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은사님과의 이별 후 사라졌다. 10월 30일. 그렇게 시작된 슬픔의 날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고 하나 둘 늘었다. 5월 16일. 7월... 의식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해부터 5월에 알이 찬 꽃게를 먹지 않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남은 이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겉으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재영을 잃은 친구 정오는 그의 동생 안라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나 맛있는 제철 음식을 사먹인다.



직장 생활을 하며 열심히 사는 정오와 달리 안라는 "자기 삶을 타인의 것 대하듯, 끊이지 않는 나쁜 꿈을 꾸듯 살고 있"다. 그러면서 "그 역시 자기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고통받고 있기를, 때로는 그가 나보다 더 망가져 있기를 바랐다."(p.69)





내게 공무원 시험은 다른 공시생들처럼 절실한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정상적인, 제대로 된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얄팍한 치기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의 삶을 사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p.65




안라는 정오를 꾸준히 만나면서도 무심한 척, 먹은 음식을 게워냈다. 살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정오를 그리워하는 일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안라는 좀처럼 그의 속마음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음식을 먹으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연락을 해 만나고, 기꺼이 그 음식을 먹인다는건 엄청난 정성이자 사랑이다. 음식을 앞이 두고도 왜 그 마음을 읽지 못할까. 집에 돌아와 게워버린건 음식일까 정성일까. 생을 향한 의지였을까.



한 자리에 있어도 각자 애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달밤」의 화자는 소애의 생일상을 차리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은주언니에게 말을 건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을 생일상에 차려내며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애도(哀悼)한다. 그렇게 우리의 애도愛道는 달라진다. 인정하고 싶건 싫건, 그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어도 달라지고 있고,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 번째 답 :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답이지만 당신을 구제해줄 수 있는 답이기도 하다. 바로 당신이 잃은 사랑이나 당신이 바랐으나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영원히 존재하는 사랑이다. 모습이 바꿀 뿐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이 답에서의 과제는, 그 사랑을 새롭게 바뀐 모습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비터스위트> p.166 중에서




다만, 안라에게만큼은 조금만 더 시간을 주고 싶다. 그 날을 붙잡고 싶은건 날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니까. 시간을 따라 빠르게 변한 사랑은 내 사랑의 속도와는 다를 수 있으니까. 너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가도 괜찮다 말해주는 이 하나쯤은 삶에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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