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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이 책은 분명히 '소설의 형식'에 관한 일종의 안내서"이다. 또 "한편으로는 초단편 소설 스물 다섯 편을 묶은 작품집"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설명은 위 두 문장이면 충분하다. 조금 더 길게 설명하자면, 저자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 네 꼭지를 설명하고 그에 어울리는 몇 쪽짜리 단편을 덧붙여 각각의 단어를 설명한다. 짧은 이야기가 어떻게 소설이 되느냐고? 그건 독자의 몫이다. 저자는 불쏘시개, 땔깜만 던져준다. 요즘 유행하는 DIY키트같달까. 재료는 모두 들어있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금손이냐 똥손이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ㅜ_ㅜ따흑) 키트 구경 좀 해볼까?

"불 꺼도 되지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스위치를 향해 걸었다. 나는 그녀가 시각장애인임을 다시 깨달았다. 그녀는 불을 꺼도 점자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자인 것이다. ... 만약 내가 침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 그녀의 집 이모저모를 눈으로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 당신이라면 어떠했겠는가? 당신의 배에 침이 꽂혀 있지 않았다면? 당신도 나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텐가?
"그런 것만 보면 그 아저씨는 선에 강박이 있는 거야. 선을 넘어오면 안 되는 거지. 국경수비대에서 근무했던 것이 그 사람한테는 천직이었을 거야. 선을 보호하면서 그 사람은 행복했겠지."
"어쩌다가 그게 병이 됐을까요?"
"모르겠다만, 충격적인 일을 겪었겠지. 트라우마가 있을 거야."
시든, 소설이든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닥치는 난관은 "소재"이다. 《소설의 순간들》은 이 첫 고비를 떠먹여주다시피 하며 넘어간다. 하지만, 역시나... 산 넘고 산이다.
"시위할 때 쓰는 최루탄이라니. 시위할 때 쓰는 게 아니라 시위 진압할 때 쓰는 거지. 시위하는 사람이 최루탄을 던지면서 구호를 외치니?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전두환이 오일팔을 지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니? 오일팔 학살을 지휘했지. 말을 분명히해야 한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는 거니까, 말로 하는 실수는 생각의 허점을 드러내는거야. 작가가 됐으니 더 확실해져야겠지. 힘든 삶이 될 거다, 이제."
위 문장을 읽으며 "그래. 역시 소설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곁에 와 그림을 그린다. 이모부가 그려준 동물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겠다며 애써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입이 삐죽 나오더니 손톱만 들여다보고 있다.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 수준에 맞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그럼 할 수 있다. 아이가 연필을 다시 쥔다. 도와줘야겠다.
"됐고. 너는 좀 짧게 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