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젊은 시인들 12
정훈교 외 지음 / 시인보호구역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지갑을 열어야 할 때

입을 열고 있으면 저녁이다

한마디 한다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저녁이다

상투적 은유에

스스로 도취되면 저녁이다

작심하고 한 마디 했는데

말의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면 저녁이다

...

강문출 시인의 <저녁의 발견> 중에서.

 

 

 

 

시는 은유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시를 통해 별은 검은 비를 내리는 구름이 되고, 창문은 맞꼭점이 되어 안과 밖의 삶을 가른다. 가슴에 달린 노란 리본이 계속 눈을 찌르지만 뗄 수 없음은 우리가 계속 시를 쓰고 읽어야 하는 까닭과 닿아있다.

시는 은유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에는 반드시 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는 어렵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박소원

죽음의 시대

...

나비가 되어 날아간 애벌레처럼

말은, 일찍이 본집을 떠난 게 아닐까

곤충의 빈 껍질같은 허울뿐인 말의 무늬를 입술에 걸치고

스스럼없이 속삭이는 너와 나는

지금, 보이지 않는 어떤 음모에 깊이 가담된 게 아닐까

...

연초까지만 해도 시의 어려운 부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답답하게 여겼다. 시집을 읽고 갈증을 느낄 때마다 누가 해답지 좀 내줬으면- 했는데 《정전》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삶의 모든 걸 우린 이해할 수 없다. 기어코 알아내려고 움켜쥐고 있는 것보다 그냥 흘려보내는게 어쩌면 더 이로울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흘려보낸 것들을 통해 얻은 득이 우리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난 이 삶의 이치를 시에도 적응시키기로 했다.

재밌으면 웃고, 공감가는 대상을 함께 씹어대고, 고민하고 싶을 땐 고민하고, 도저히 모르겠을 땐 과감하게 넘겼더니 부담이 사라졌다.

안현심

연꽃무덤

어머니의 주검을 닦아드리다가 짓무른 생식기에 손이 닿았다

탄탄한 자신감으로 생명을 피워 올리던 황금빛 바다

휘파람이 피어나고 풀잎이 피어나고 사슴이 피어나던 연꽃생식기

생명의 바다를 사모하다, 사모하다 스러진 연꽃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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