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구판절판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너와 나는. 무엇이든 내키는대로 해. 우리는 일치할 수가 없어, 너와 나는. 너는 자신의 세계에 살고 있어 행복하다. 나도 자신의 세계에 만족해.' 행복은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 갇혀 있다. 슬픔의 냄새는 그 세계 바깥에서 번져온다.-60쪽

영국더기 언덕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빛의 세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빛의 세계 속에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 채게 됐다. 인화된 양화는 필연적으로 음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은 현상한 필름에도, 인화한 사진에도 있지 않았다. 진실은 음화와 양화, 두 세계에 동시에 걸쳐 있다.-126쪽

유격구는 더없이 평화롭고 서로 의지하는 곳이지만, 그만큼 잔인한 곳이기도 하다. 유격구에서는 마음을 쉽게 주지 않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언제 누가 죽을지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을 준 그 인간이 소멸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격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육친보다 더한 사랑을 퍼붓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곧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곧 그 사람이 죽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곳,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미친 듯이 남은 정을 쏟아 붓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유격구다. -193쪽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933년 여름, 유격구에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 물음의 정답은 없다. 그들은 조선혁명을 이루기 위해 중국혁명에 나선 이중 임무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구국군이 일본군에 패퇴한 뒤에도 끝가지 투쟁한 가장 견결하고 용맹스런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동시에, 한편으로 일단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면 제아무리 고문해도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던 일제의 앞잡이들이었다. 누구도,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 했다. ... 그들에게 객관주의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213쪽

다시 두번째 소리. 역시 온몸으로 바닥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 혁명 만세. 그저 앞사람을 따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 앞에서 그들이 내뱉을 수 있는 소리는 그것뿐인지. 그저 혁명 만세. 조선혁명 만세도, 중국혁명 만세도, 세계혁명 만세도 아니고, 그저 혁명 만세.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이지 않아 변경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모호한 아우성, 그저 혁명 만세. -218쪽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는 세계와 끊임없이 투쟁하니까 저렇게 곧추 서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인간 역시 모순에 가득 찬 세계 속에서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오. 도덕이란 그렇게 변화하는 인간만이 알 수 있는 것이오. 일단 그렇게 변화하는 인간의 도덕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잔혹한 일들을 혐오하게 될 수밖에 없소. 변화를 멈춘 죽은 자들만이 변화하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건 정말 구역질이 나는 일이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힘이 더 센 존재요. 나는 잔인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잔인한 세계 속에서도 늘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됐소. 인간이 성장하는 한, 세계도 조금씩 변하게 마련이오. 그런 인간의 힘을 나는 믿었소.-232-233쪽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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