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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핑크 산상수훈 강해 아더 핑크 클래식 2
아더 핑크 지음, 지상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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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5 구하라 그러면 주실것이요...."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말씀은...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리라는 기대가 아니라 그분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허락하시리라는 확신이다. "그분의 뜻대로 [ 우리의 뜻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분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p433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마음 속의 부패함과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반대로 인하여 더욱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p443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것보다 쉬우니라" 사랑하는 독자여, 이제 솔직히 문제를 직시해보자. 주 예수님의 선언은 구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즉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고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이것은 '구원'에 대한 말씀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즉시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전적으로 사람의 뜻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그릇된 것이다. 구원을 얻는 것이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무지하고 경솔하게 말하고 다니는 자들은 영혼들을 속이는 자요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다. 그렇다. 구원을 얻는 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또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며 우리가 이 사실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빨리 우리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을 위해 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게 된다.

p461 믿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지 않는다. 중생 또한 구원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거듭날 때, 즉 하나님께서 소생시키실 때에 믿음이 생기게 된다.

p463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이 되어서 그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 믿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p468 모든 택한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명백하게 확언해주셨다고 해서 순종이 필요치 않다거나 불법이나 불순종에 대한 죄책이 가벼워진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p483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실행할 힘을 가지고 있는 의지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은 틀림없이 거짓 선지자이며 우리는 마치 치명적인 염병을 피하듯이 그들을 피해야 한다.

p501 신13:3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박해하는 자에게와 마찬가지로 또한 거짓 선생들도 참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자기 백성의 사랑과 충성을 시험하고, 그들이 그분에게 충성한다면 그들의 그의 원수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다.

p505 거짓 선자자들에 의헤 이루어진 회심자는 말만 많이 하는 자들일 뿐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 자들이다.

p580 그들은 '안락한 꽃방석'에 앉아 하늘로 데려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육체, 그리고 마귀로부터의 맹렬한 반대와 맞부딪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사람에게 속고 거절당하며, 마귀에게 시험받고 세상의 증오를 받으며,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대당하고, 그분의 편에 서 있어야만 할 사람들에 의해 버림당하신 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인데"(행14:22)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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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 요한일서 강해 4-5장 마틴 로이드존스의 요한일서 강해 2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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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껏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돌아가실만큼 사랑하셨다고만 알고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내게는 불가능 한 일이었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사 화목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구원받을 자격도 없으며, 사랑받을만한 것이 전혀 없는 너를,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네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있을 때만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불가능한 일을 하는 자신을 보며 하나님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며 구원을 확신하게 된다

구원의 확신은....아마도 구원받기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들 예를 들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다. 구원은 자신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자신안에 계심으로 드러나는 사랑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는 가장 확실한 시금석이기도 하다.

아!...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보내사 그의 설교를 통해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책제목 : 하나님의 사랑

마틴 로이드 존스 요한일서 강해 4-5장 ISBN 978-89-08229-2 (04230)

하나님으로부터 남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올바른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이 선하고 도적적이고 매우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을 산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해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전반적 위치에 대한 궁극적 시금석은 사랑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랑하지 말아야 하며, 쉽게 성을 내서는 안되며, 악한 것을 생각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들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것을 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최선의 상황이 일어나기를 바라야 한다. 그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 모두는 정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며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싫어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라고 하셨다. 그것은 어렵지 않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자연적인 사랑이 그런 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판별하는 온전한 시금석은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고린도전서13장이 진심임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못을 범한 형제를 보면 여러분에게 해가 된다고 느끼는 대신 참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돕고자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라. 그것이 그를 심각하게 해치며 큰 위해를 가하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누리는 엄청난 기쁨을 그에게서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사랑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때로 여러분은 자신의 문제로 부터 떼어 놓아야 하며 그것이 당신에게서 위해를 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붙들어주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그를 사랑해야 한다.

자연인은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았음을 스스로 선언하며 선포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사랑

첫번째 계명은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며 두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첫번째 계명대로 행하기 전에는 결코 두번째 계명을 지킬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하시리라는 사실에 있다"라고 한다. 그분이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리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것을 믿노라고 말하는가? ....

그는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믿노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에게는 그것을 실증할 것이 전혀 없다. 그는 그것을 믿으며 다른 이들이 그렇게 말하므로 그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최종적으로 이해되고 인식될 수 있다.

요한1서 4:9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은즉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

요한1서 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너희가 사랑에 관한 그 무엇을 알고자 한다면 이런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놀라우신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떠나서는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듣는다. 왜인가?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친절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받을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인가? ...

죄의 결과로 우리 안에는 생명이 없다.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

즉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분을 통해 우리가 살수 있으며 그분없이는 우리가 죽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받음직하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과 거리가 멀며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했다. ...우리가 본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의 사랑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이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신다고 하는 것은 통속적인 신학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은 본성상 그리고 죄와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의 원수이다.....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분을 사랑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분께 적대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죄악의 찌꺼기와 구렁텅이속에 있으며 진노밖에 받을 것이 없으며 그들을 위해 옹호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 신약성경의 모든 주장인즉, 자신에 관하 단순한 진리가 바로 그러함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알수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는 첫번째 단계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어떤 분이 여기 계시다...

하나님은 그 영광가운데 자신의 독생자를 하늘로부터 그 영원한 축복과 절대적 완전함과 더불어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우리는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그 무엇인가를 상상해볼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다. 그분이 자신의 독생자에게 이 세상에 들어가도록 요청하셨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확신을 갖지 못하면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혀 없다. ...그분이 오신 세상이란 이런 곳이다. 이기적이며 욕심 사납고 자기 중심적인 이 세상에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분주하다....그분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누추함과 가난에 수반되는 걸핍에 대해 알고 계셨다. 또한 삼십년 동안 보통 사람들과 함께 섞여 목수로서의 평범한 삶을 사셨다. 영광의 주요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서 오신 영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죄와 대면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는가? 추한 죄악을 바라보며 그것과 직접 대면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 모든 수치와 추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란 바로 그러하다. 어떻게 그분이 자신의 모든 정결함과 거룩함 가운데 하늘로부터 오사 삼십년 동안 여러분과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사실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가? 어떻게 그것을 참고 견디실 수 있었는가? ....그분은 대적해 일어난 반대세력을 보라. 서로를 바라보고 수근거리며 간교한 물음을 던지고, 그분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분을 아래로 끌어당기려는 교활한 움직임을 보라. 그 음모를 보라.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서 발생한 배신을 보라. 그들이 그 거룩하신 이마에 씌운 가시관을 보라. 그분이 오신 세상이 그러했다. ...

더욱이 하나님은 그분을 보내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죄를 그분에게 담당시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그것은 여러분의 죄와 나의 죄를 대신해 드리신 제물이었다. 그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분은 그것이 무엇을 수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면전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분이 세상에 오실 뿐 아니라 화목제와 화목제물이 되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사 여러분과 나를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죽게하시고 잔인한 수치와 고뇌 및 십자가의 고난에 처하게 하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며 무흠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해 죄를 삼으신 데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그리하여 그 희생이 충분했고 율법이 만족되었으며, 모든 것이 완전해졌음을 선포하셨다. 거듭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런 식으로 죽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죄를 사하실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기전까지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여러분은 속죄의 교리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분이 우리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다. 달리 말해 그분이 행하신 사역의 결과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셨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그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함을 받았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과 권능을 받았다, 그분이 우리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그분안에 살고 그분은 우리안에 계신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살아간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높은 데로 일어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사랑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다. 용서, 사함, 평강, 회복, 새 생명등이다.

끝으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죄와 허물로 죽은, 그분을 반역하고, 그분을 대적하는, 그분의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인간을 용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시고,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시며, 그분으로 하여금 잔인한 죽음과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게 하사 속죄제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인가?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했는가?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그것을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오직 그분 자신의 자기발생적 사랑일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의 위대하신 사랑의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이외의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며,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 .....

나는 나 자신의 완악함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잃은 바 되지 않을 수 있었는가? 어떻게 우리안에 어떤 증오심이 남아 있을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토록 놀라운 사랑을 주시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일 이외의 일을 행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이것들을 보고 믿으면서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무가치하고 부끄럽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수 있겠으며,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빚지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삶이 감사와 찬양 그리고 감격의 표현이 되게 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만일 여러분이 믿는다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어떤 입장을 취할 권리가 전혀 없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으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할수 있는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이라는 진리를 상기시켜야 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절차이다. 내가 성나고 불안하며 당황해하며 또한 어쩌면 적대감마저 느낄때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거의 전투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 가운데 나타나는 어려움이란 항상 다른 사람을 볼 뿐,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면 -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면-내가 무엇을 발견하겠는가?

대체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즉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 다른 사람이 다소 변화될 수 만 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것이며 모든것이 잘되고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잠시만 멈추고 너희 자신을 보고 너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정확히 상기시키라"고 했다.

자기 중심성, 자기확신, 자기기만, 방종, 자기를 기쁘게함, 자기추구, 자기연민, 자기과민, 자기방어,자기만족, 자의식, 자기의, 자기영광추구.. 자기를 기만하는 사람은 얼마나 쉽게 자신을 변호하며 다른 사람들의 동일한 모습에 대해서는 얼마나 쉽게 정죄하는가!....

하나님이 내가 묘사한 것과 같은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것은 놀라운 사랑이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요한은 말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복음의 조명안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볼때,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거나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티끌 속에 있는 자신을 보며, 너무도 낮아져 있으므로 아무도 우리를 더 낮은 곳으로 보낼수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 자신을 보고 난 후에 그렇게 한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위에 설 때, 그들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티끌 가운데 엎드리고 있을때, 필히 다른 사람을 올려다보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상황과 관점이 곧 달라진다....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본다. 우리는 그들을 보지 않는다. 이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영혼으로 객관적으로 보게 하며, 행위를 통해 혹은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고 있는 바를 통해서만 보지 않는다....그 사람의 공격적인 행동을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죄의 희생자요 사탄의 희생자이다. 복음은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의 행동과 그 이면에 있는 그 사람 자신을 구분할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을때 우리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러하다. 하나님은 땅위에 있는 우리를 하늘로부터 내려다보셨으며 우리의 비참한 행위들을 보셨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실수 있었는가? 물론 그 대답인즉 하나님이 죄인과 죄를 구분하신다는 것이다.하나님은 그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자신과 영혼을 사랑하신다.하나님은 그처럼 중요한 구분선을 그으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분은 우리를 애석하게 생각하신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행한 바를 보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분은 "내가 구원하기 원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신다. 그분은 그러한 구분선을 그으시며,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고무될 때, 우리 역시 그렇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 사랑은 우리에게 공격적일 수 있는 자들을 보고 그들을 애석하게 여길수 있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듯이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 그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이 그들안에 있는 사탄과 죄임을 압니다. 주님을 나타내사 그들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소서"라고 한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일만달란트 빚진자....'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러분은 자신을 보았는가? 그러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본다.여러분의 자기 의는 모두 추방되고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을 그와 같이 볼 때, 다른 사람들 역시 소위 죄라고 불리는 무서운 세력의 희생자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자유로워지도록 돕기 위해 할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심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앞에 두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확신 할 수 있는가?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면 그것은 세상이 으례 하는일이며 우리 모두의 본성이 그러하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나를 핍박하고 악의적으로 대해 온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나를 해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 어떤 사람을 돕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그분에 내 속에 계심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분이 내안에 계시지 않다면 내가 결코 그렇게 할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본성상 이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확신하는 셈이다....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게 하시고 또 그 모든 일을 이루게 하신 궁극적 목적은 우리로 형제를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5:43 ¶ 그들이 말한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마태복음 5:45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이들이 되리니 그분께서는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느니라.

마태복음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바로 그 일을 하지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우리도 완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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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정상윤 옮김 / 복있는사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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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까요? 왜 어떤 사람은 선택받고 어떤 사람은 선택받지 못할까요?.....

이런 질문들은 철학적 문제를 다루듯하면 안됩니다. 인간의 문제나 질문을 다루듯하면 안됩니다. 문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최대한 성경에 비추어 하나님에 대해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본질과 영광과 성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애쓴 후에, 그 맥락 안에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이런 질문들에 다가서면 난관의 절반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의 태도 자체가 가장 큰 난관으로 작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믿음의 가장 좋은 정의는 '내가 이해한 바가 아닌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천성적인 반역자로서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지?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왜 저런 일을 허용하시고 허락하시는 것이지? 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방식만 보아도 하나님에 대한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고수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지적교만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인 죄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바울이 주저없이 밝히듯,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이런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간의 지적교만을 꺽고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저와 여러분이 묻지 말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방식으로만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담컨대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일, 하나님이 그 지혜와 섭리로 행하실 일들이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뜻인데, 저와 여러분은 절대 그렇지 못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사실들이 있으며, 그 사실들만 아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봉착할 때는 아브라함처럼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정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말할 것을 성경은 권면합니다. (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 자체로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주권적인 지혜와 뜻으로 정하신 구원방법 앞에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말도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겸손히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옳은 것을 알기에 다만 엎드려 감사드릴 뿐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 히브리서 강해 -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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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에스겔 강해 - 오직 은혜로 받는 구원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정상윤 옮김 / 복있는사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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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강해....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구원받은자는 왜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어있는지 배웠습니다.

과거의 지은 죄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살면서 죄를 짓는 자기 자신을 심히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점검해봐야할 듯 합니다.


책속에서....


우리는 악하고 어리석은 교만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을 측량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하신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해되지 않은다는 이유로 복음을 거부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을 축소시켜 우리 척도에 맞추려 합니다. 구원의 혜택을 생각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구원의 모든 영광과 크기와 범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이상한 성향이 나타나는 한가지 이유는 죄의 본질 및 죄가 세상과 인간의 삶에 몰고온 큰 혼란을 모르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의 악하고 못된 영향을 전부 무효화하기 위한 조처라는 점에서 볼 때, 이처럼 죄를 바라보는 관점이 부족한 탓에 다른 관점들도 전부 부족해진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인하게 됩니다.

구원의 많은 혜택 중 첫번째는 "죄 사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죄사함 받았음을 알기 전까지 어떤 복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죄가 제거되어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 있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통해 제거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이를 위해 그분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우리의 허물이 도말된 후에 지금까지 고찰한 다른 모든 복이 찾아옵니다. "새 마음과 새 정신"이 생기고,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이 주어지며 풍성한 복이 찾아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후하심을 깨달은 자는 그런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토록 놀라운 제안을 거절했던 악함과 어리석음을 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첫번째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이들은 바벨론에서 자신들의 실상을 깨닫거 미워했습니다. 자신들의 이전 모습과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미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리석은 점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유치하고 불합리한 말을 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도전하고 저항합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을 가지고 유하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피조물,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피조물, 한 주간의 생존도 장담할수 없는 피조물이면서도 뻣뻣하게 서서 "맞아요, 난 모든 것에 도전할 겁니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선장입니다. 당신의 하나님한테든 다른 누구한테든 절하지 않을겁니다. 그래요 난 내 생각과 견해를 믿습니다"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무에서 우주를 만들어 내신 하나님, 그 우주를 한순간에 끝장내실수 있는 하나님,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완전히 의롭고 거룩하신 온 땅의 심판자께 도전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 지적인 어리석음. 무지와 교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손안에 내내 잡혀있으면서도 그분을 대적하며 떠들었던 어리석음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을 경멸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자신의 타락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새 마음과 새 생명과 새 지각을 받은 사람은 이전에 행던 일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했던 일과 즐겼던 일들, 하나님보다 앞세웠던 것들,,,전에 그토록 멋지게 여겼던 것들을 돌아보며 전부 악하고 부당하고 가증하고 비참하고 불결하고 부정하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좋아하고 원하게 만든 악한 본성이 자기 속에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자신을 싫어하게 됩니다....우리속에 있는 악함이 이처럼 더러운 일로 표출됩니다.정결해지면 그런 일들이 다 밉고 추하게 보입니다. 악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에 끌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런 본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비틀리고 부정한 탓에 악하고 더럽고 부당하고 가증한 일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보다 무서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왜 거룩해지길 열망하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게만 느꼈을까요?....왜 복음에서 얻는 바가 하나도 없는 것 처럼 희생하고 포기해야 한다고만 말했을까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내 본성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내 악함때문에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세번재 마지막 이유는 은혜를 모르는 자신의 비열함을 깨닫고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선물에 침을 뱉었습니다...하나님은 세상을 구속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친히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들의 죄와 죄책을 지고 형벌을 받아야 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친히 이 일을 계획하시고 그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자원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아들안에서 우리 죄를 벌하셨습니다.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죄까지 그분에게 지우시고 진노를 모두 쏟아부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십자가와 그 피 앞에서 입을 삐죽거리고 있습니다.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지도 못하며 감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내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마음과 새 지각을 얻고 난 후 자신이 무지하게 했던 말들을 돌아보는 사람은 그런 것을 했던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박찬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논쟁이 필요치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격렬하고 지독하게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속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눈멀게 했을까? 내 속의 무엇이 그토록 완고 했을까? 어떻게 이 사랑을 보지 못했을까?"라고 묻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습니까? 이런 경험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평안을 얻었는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미움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면 설사 평안하다 해도 그 평안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복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지식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알게 하심으로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알면 지독하게 미워하며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혐오하며 역겨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 인간의 어리석음 / 에스겔 강해

우리가 전하는 구원은 기적의 사건입니다. 천천히 가르치거 교육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순식간에 한순가에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성령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계회과 설명서를 제시하시고 하나씩 나누어 순서를 잡으시며 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이 새롭게 정돈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죄가 야기한 말할 수 없는 혼란과 혼돈 속에 그리스도가 찾아와 질서를 잡으십니다. 삶을 단순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하십니다. 더 이상 유혹에 넘어가거나 욕심에 이끌리거나 미혹당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세력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삶의 계획이 단순해집니다. 복음의 놀라운 면이 이것입니다. 생활전체가 단순해집니다. 계획과 목적이 생깁니다. 자신을 영원한 세상의 순례자로 다시 보게 됩니다.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임시 장소로 보게 됩니다.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과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삶 전체가 하나의 계획으로 축소됩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영원하신 건축자가 실제로 나를 붙잡아 다시 세워 나가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물론 과정이 필요합니다.거듭남과 중생의 토대를 놓으시고 그 위에 건축해나가십니다. ...주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일에 관심이 생깁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사는 삶에 관심이 생깁니다.....죄는 황폐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며 갈라지게 합니다. 복음은 세우고 건축하며 연합시킵니다...이처럼 죄가 끼친 영향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효화하는 복음, 마침내 우리를 흠도 없고 점도 없이 하나님께 앞에 세울 복음,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되어 영원히 함께 살게 할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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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에라스무스 : 자유의지와 구원 기독교고전총서 16
두란노아카데미 편집부 지음, 이성덕.김주한 옮김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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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정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가 있다. 

'예정'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생각해보면

최소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선 견해가 다를 수 없다.

누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앞에서 잠잠해야 한다.

누가 하나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수 있는가? 


죄에 빠진 사악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수 없다. 

아울러 미천한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으론 하나님을 모두 알수도 없다.

그러나 사탄의 자식인 인간들은 자신의 한계나 모습은 인정하지 않고 

사탄과 같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게 두며

자신이 하나님을 규정한다. 


사탄이 구원에 가까운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이 바로 '자유의지'인 것 같다.

네 자유의지로 복음을 믿어 구원받는다고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본인이 죄인임을 깨닫고, 본인이 자유의지로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필요조건은 될지 몰라도 충분조건을 될수 없다. 


본인이 죄인임을 깨닫고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고 말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어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구원을 간청하는 것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갑론을박해봐야 인간의 생각이요, 쓰잘데 없는 소음일뿐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 : 자유의지와 구원] 책 속에서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 (벧전5:5), 즉 스스로 탄식하고 스스로에 대해 절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은총을 확실하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구원은 자기의 능력과 계획, 노력, 의지, 업적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과 의지와 역사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온전히 겸손해질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매우 미약하나마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여하튼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스스로에게 완전히 실망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그는 겸손해지기는 커녕 거기에는 자신을 위한 약간의 공간과 시간, 활동이 있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희망과 열망이 존재하는 것 처럼 생각해 마침내 자신은 구원을 획득 할 수 있을 거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스스로 완전히 절망해 자신을 위해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다린다. 그때에 그 사람은 은총에 가까이 다가서며 구원받을 수 있다. .....즉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인정하고 이를 찾으며 받아들인다. p194

인간의 의지란 멍에를 맨 짐승처럼 둘 사이에 위치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위에 올라타신다면, 시편에서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73:22~23)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쫓아 행할 것이다. 만일 사탄이 그 위에 올라탄다면 인간의 의지는 사탄이 원하는 바를 쫓아 행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그 위에 올라탈 두 존재자를 선택하거나 찾아 나설 수 없고 오히려 그 위에 올라탈 두 존재가 인간의 의지를 소유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 p198

우리가 또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바울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말한 것처럼 율법의 음성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거나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바와 똑같이 은혜의 말씀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통과 유혹을 받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만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선포되고 제공된 하나님의 자비의 수혜자가 되고 참여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신다. 이런 의지는 의문시되고 질문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고 경건하게 숭배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위엄의 가장 장엄한 비밀로 최대한 경배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우리에게 알려지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정말 우리의 능력밖의 일들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말은 여기에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p277

이사야 45:15 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자신을 숨기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멸망당하는 현실은 우리 자신의 의지탓으로 돌려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잘못은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의지 속에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 이와 같은 의지의 결함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제거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저 위대한 주권으로 그것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이런 결함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시는지 우리는 그런 이유를 물을 권리가 없다. P279

로마서 9:18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또 강퍅하게 할 자를 친히 강퍅하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9:19 그러면 네가 내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분께서 여전히 허물을 찾으시느냐?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였느냐? 하리니

로마서 9:20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나는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 있는 감추어진 의지를 캐낼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는 허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다루는 주제는 가장 사악한 인간이 저 경외스러운 하나님의 의지를 캐내어 묻도록 유혹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어서, 여기서는 인간에게 침묵하도록 하고 다만 하나님의 의지를 존경할 수 있도록 훈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다. p286

우리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의 의지의 근거를 물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또 이성의 경솔함을 제지하면서 하나님의 의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경배하면 충분한다. p295

자유선택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한다. "나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의도하시지도 않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고난에 빠뜨림으로써 자비를 베푸신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필연적으로 나는 더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시면 할 수도 있으시지만 성령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의향이 없다는 점은 확실하다" 또한 당신이 매우 적절한 것으로 인용하는 직유들도 의미가 없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태양열에 의해 진흙은 굳어지는 데 반해 왁스는 녹는다. 똑같은 비로 인해 경작지는 수확을 걷는데 비해 황무지는 가시풀을 키워 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내로 인해 어떤 이는 더욱 완고해지는 반면 어떤 이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 선택을 두 가지 다른 유형, 즉 진흙이나 왁스 또는 경작지나 황무지등으로 나눌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무능한 유형, 오직 진흙 또는 황무지에 불과한 자유선택에 관해 그것이 선을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므로 진흙이 더 굳어져 가고 황무지가 더 많은 가시풀로 뒤덮여 가듯 자유선택도 또한 강퍅하게 하는 인내의 태양열 아래에서나 부드럽게 해주는 빗물에서나 항상 더욱 나빠져 가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선택이 오직 한가지 유형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뿐이고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무능력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설교이외에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더라도 왜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은총에 이르고 또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지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 자유 선택은 결코 선을 도모 할 수 없다는 동일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p312~313

예레미야 13:23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리할 수 있을진대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올바로 표현하자면 햇빛과 비는 복음을 나타내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경작지는 선택받은 자를, 황무지는 버림받은 자를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말씀에 의해 더욱 교화되고 향상되는 반면, 후자는 오히려 더 죄악에 빠지고 나빠지기 때문이다. p315

그것은 이성의 이해력을 훨씬 넘어선 것들이며 이성 스스로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그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이성은 신앙을 제쳐두고 어떻게 하나님은 잔인하지 않고 선하신 분인지를 느끼고 이해하고 알고 싶어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강퍅하게 하거나 저주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지옥을 없애시고 죽음을 공포를 제거하셨다고 판단이 내려진다면 미래의 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는 점을 이성은 이해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이성은 하나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분의 정의와 선을 옹호하려는 노력에서 그렇게 호통을 치며 격론을 벌인다. 그러나 신앙과 성령은 이성과는 다르게 판단한다. 왜냐하면 신앙과 성령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지라도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p316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에 관련해서 우리는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p332

하나님의 신비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논쟁하고 캐내어 물으려고 하는 것만큼 부적절하고 경솔한 짓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탐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탐구하지 않고, 탐구하지 말라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언사는 말할 것도 없고 끝이 없는 무모함을 가지고 탐구하고 있다......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예지가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예지를 평가 절하하고 또 하나님의 예지가 우리에게 필연성을 강요할 경우에는 투덜거리며 불평하는 자들과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과 더불어 "어찌하여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의 허물을 찾으시는가? 누가 과연 그분의 의지에 저항할 수 있는가? 본질상 완벽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는 불평들에는 과연 무모함이 없는가? 이와 같은 불평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심판받을 자들이나 떠들어 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의 천부적인 이성 그 자체는 살아계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로움에 의해 우리에게 필연성을 부여하시는 그런 분이심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하나님의 예지와 전능하심이 인정된다면 하나의 논박될 수 없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되는데 그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요, 또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이거나 어떤 행동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 그렇게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라는 것을 미리 아시고 지금도 이런 우리를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며 지배하고 계신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과연 하나님이 예지하시고 지금 일어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와 전능은 인간의 자유선택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p333~334

만일 유다가 배반자가 되거나 혹은 배반하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바꿀 거라는 점을 하나님이 예지하셨다면 하나님이 예지하신 것은 어느 것이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예지나 예언은 잘못된 것이 될 터인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결과의 필연성이 낳는 결과다. 즉 하나님이 어떤 일을 예지하신다면 그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자유 선택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유다가 배반자가 되리라고 하나님이 예지하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할 때 이것이 바로 결과의 필연성이다. p340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견해를 강렬하게 주장하려 할 때 우리에게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경이다. p345

'강론'은 만약 토기장이가 진흙을 주조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진흙을 창조한 그러한 토기장이라면 잘못은 토기에 있지 않고 토기장이 탓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불신자에게 "어찌하여 하나님은 허물을 찾으시는가? 누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도록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이성이 파악할 수도 없고 견디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불신자들은 하나님도 인간의 정의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에게 올바르게 보이는 것, 즉 하나님에게 더 이상 하나님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p352

인간 마음의 사악함을 주목해보라! 하나님이 아무런 공적없이 무가치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해서, 아니 아무런 공적도 없는 불경한 자를 의롭게 여긴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판단해 볼 때 매우 불의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의도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그런 일이 의롭고 선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무런 공적도 없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의롭지도 않고 참을 수 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는 단지 저항과 불평, 신성 모독만 있을 뿐이다. 자 이제 당신은 '강론'과 그 동료들이 이 경우에서 공평성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이성이 무가치한 자를 구원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자격자인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할 때, 이성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하지 않고 그 자신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이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자신에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가치한 자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때 당신을 즐겁게 한다면 무자격자를 심판하실때도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p354

말씀의 의미가 불건전하게 되는 것은 그 말씀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그 말씀을 왜곡하는 자 때문이다. p357

창세기 6:5 말씀은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할 뿐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악을 '의도'한다거나 악의 '성향'이 있다는 뜻도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악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인간은 일생 동안 악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꿈꾸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악함의 본질은 인간의 성향이 악하기 때문에 악 이외에는 어느 것도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강론'이 주제넘게 제기하는 질문, 즉 모든 것이 필연성에 의해 행해지고 회개의 어느 부분도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회개할 여지가 주어지는가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변한다. 당신은 같은 질문을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즉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필연성에 의해 행해지는데도 계명을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하는 바와 관련해서 인간을 교육하고 훈계하기 위함이요,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의 사악함을 깨달아 겸손해짐으로써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p364

사탄이란 단연코 가장 교활하고 강력한 이 세상의 통치자이고 그가 통치하는 한 인간의지는 자유롭거나 스스로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탄의 노예이며 그 주인이 의도하는 바를 단지 행할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탄은 인간의 의지가 어떤 선을 도모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사탄이 그렇게 명령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이 노예처럼 얽매여 있는 죄 그 자체가 인간을 강력하게 압박해 선을 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릴 것이다. p388

하나님의 은총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편적인 전능아래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필연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경로를 따라 행하고 움직이며 이끌어 나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p391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0~12)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며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에 관해 관심도 없는데 어떻게 선을 추구할 수 있는가? 그들이 선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전혀 무가치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선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떤 가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은 전적으로 명백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이 사실, 즉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고 그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으며 모두들 악에서 돌아서서 선한 일에는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는가? p407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고 애쓰는 능력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 모두는 곁길로 빠져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 않고 만약 바울의 주장이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초점을 잃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모든 관심은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필요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스스로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면 은총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그럴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은 은총이 필요하다....인간은 불의하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이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가치한 존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하나님을 경멸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범죄의 근원이고 모든 죄의 웅덩이 즉 모든 악의 지옥이기 때문이다. p409

모두가 다 돌아섰다. 온 세상이 죄 가운데 있고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천둥과 맹렬한 번갯불의 막강한 역할들이며 진실로 예리미야의 말처럼 (렘23:29) "바위를 조각조각 부수어 버리는 망치"여서 이 망치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기존의 것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세상과 함께 산산히 부서진다. 따라서 온 세상은 이 말씀 앞에서 벌벌 떨며 두려워하며 도망가야 한다. 온 세상이 유죄이며 모든 인간이 돌아섰으며 무가치하고 사악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거나 알고자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는 것 보다 더 강력하고 엄중한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처럼 완고하고 우매해 우리는 이 천둥소리와 번개를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고 오히려 자유선택과 그 능력을 내세우고 자랑했다.p410

바울은 이 본문에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에 무지한 어떤 사람에게 죄가 알려진다고 가르침으로써 자유선택의 입을 다물게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유 선택에 선을 추구하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강론'이 자주 자신의 책 전체를 통해 반복하는 질문, 즉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토록 많은 율법, 그토록 많은 계율, 그토록 많은 위협과 약속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고 답변한다. 그는 이 질문에 인간과 자유 선택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답변한다. 그는 자유 선택이 율법에 의해 증명되며 그와 협력해 의를 생산한다느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 생기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눈먼 자에게 빛이 되는 것은 율법의 임무요 기능이요 효능이다. 그러나 질병, 죄, 악, 죽음, 지옥,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이와 같은 빛은 무지하고 눈먼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구원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 죄악성을 드러내는데 만족한다. 그럴 경우 인간이 죄의 질병을 인식하게 될 때 그는 절망 속에서 신음하며 괴로워한다. 율법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며 자신의 힘을 동원해도 별 수가 없다. 치유를 의해 또 다른 빛이 필요하다. 이 빛은 그리스도를 모든 다른 것에서 구원하는 구원자로서 계시하는 복음의 음성이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은 자유 선택이나 이성이 아니다. 자유 선택 그 자체가 어둠이고 그것의 질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율법의 빛이 필요하며, 자유선택 자체의 빛으로는 보지 못하여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다면 그 자유 선택이 어떻다는 것인가? ......이제 죄가 인식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구제의 여지나 치유을 위한 소망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건강을 잘 유지하여 의사가 필요 없다고 상상 할 때는 치유자의 손길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 필요한데 이렇게 죄를 알게 하는 목적은 죄의 중대성과 크기가 인식될 때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면서 교만에 빠져 있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또 그리스도 안에 주어져 있는 은총을 애타게 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p417

만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이 의롭지 않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죄일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게 의와 죄 사이에 중간 지대란 없다. p419

그들의 입장을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이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로서만 가능하다. p429

요한복음 6:44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목해 보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이 말씀은 자유 선택에 무엇을 남기는가? 예수님은 "아무도 올 수 없다"고 하시면서 "아무도"라고 말씀하신다. 그로므로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서 구원과 관련된 것들을 향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는 힘이란 전혀 아무런 능력이 아니라고 단언된다. p442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두 왕국이 존재하며 그것은 서로 극명하게 상반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중 하나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그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불렀고 바울은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렀다. (고후4:4). 바울이 증언한 대로 "이 세상의 신"은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의 의지 아래 포로로 삼는다. 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집을 평화로이 지키는 강한 자의 비유에서 증언하신 대로(눅1:21) '이 세상의 신'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한테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외에 어떤 다른 힘에 의해 넘어가지 않도록 붙잡고 있다. 또 다른 왕국인 그리스도의 왕국에서의 통치자는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왕국은 끊임없이 사탄의 왕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그 왕국에 적대한다. 우리가 이 왕국으로 이동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이며 그 은총에 의해 우리가 오늘날 악한 세대에게서 자유하게 되고 어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p445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내 스스로 일구려는 나의 구원을 내 손에서 빼앗아 당신의 손으로 가져가셨다. 그러면서 이제 나의 구원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존하게 하셨고 내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그분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 나의 구원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또한 너무 위대하시고 강력하셔서 어떤 악마나 적대자들도 그분을 이길 수 없으며, 나를 하나님에게서 나꿔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그래서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 아니 정말 상당히 많은 수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자유선택의 능력에 의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전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모두 함께 멸망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비의 덕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수가 있으며, 만일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거의 못했거나 또 잘못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때문에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올바로 교도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고 신뢰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가 그들의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돌린다. p447

하나님과 비교해 볼때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해 볼 때 우리 안에 능력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나님의 자산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힘은 무엇인가? 그분의 지혜와 비교해 볼때 우리의 지식은 무엇인가? 그분의 본질과 대적할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가진 것의 전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본성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의 능력, 힘, 지혜, 본질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 힘, 지혜, 지식, 본질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와 판단을 공격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평가하도록 주장하게 만드는 이런 탈선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동일한 입장을 취하거나 말하지 않고 있는가? 이성이 신적인 모든 것은 헤아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경우 이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어리석고 지각없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도 않고 그렇게 고백하지도 않고 있는지 이성에게 물어보라. 다른 모든 문제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그의 심판과 관련해서만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려고 한다. p448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일을 미리 아시고 미리 작정하신다는 것과 그분의 예지에서 결코 실수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예정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것과 그분이 의도하지 않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이성 그 자체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인간이나 천사 혹은 그 밖의 모든 피조물 안에는 어떠한 자유선택론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만일 사탄이 이 세상의 통치자란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 사탄은 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항하여 영원히 음모를 꾸미고 대적하고 있다 - 그리고 사탄이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성령의 거룩한 능력이 강요하기 전까지는 놓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유 선택과 같은 것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요약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보혈을 통해 인간을 구속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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