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첫걸음 - 조선 최고의 고전을 만나는 법
박수밀 지음 / 돌베개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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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최고의 문장이라는 <열하일기>는 무작정 혼자서 읽기에는 많이 벅찬 책이다. 조선의 한양에서부터 청나라의 열하까지의 여정이 담긴 단순한 기행문으로 받아들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250년 전의 사상가가 전하고 있는 의미있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지난 2년간 지방의 도서관과 작은 책방들을 다니며 '열하일기 완독클럽'을 통해 독자들이 <열하일기>의 표면에서 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안내자의 역할을 해왔다. 그 시간들이 녹아있는 책 <열하일기 첫걸음>을 권하고 싶다. <열하일기>를 아직 읽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왜 연암의 문장이 최고라 일컬어지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그리고 <열하일기>를 읽었으나 아직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는 열하일기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최고의 고전문학서라고 생각한다. 열하일기는 고전 시대가 나아간 문학과 사상, 문화의 최고 깊이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 형식으로 보자면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장르 복합서이고, 그 문학적인 성취로 보자면 은밀한 우언과 풍부한 형상화로 인간과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고 삶과 제도를 성찰한 특별한 여행기다. 그 사상의 깊이로 보자면 문명과 인간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동아시아 비전까지 도달한 심오한 사상서이고, 그 문제의식으로 보자면 성리학의 틀을 뛰어넘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말해주고 싶었던 한 경계인의 발분지서다. 연암은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열하일기에 쏟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배우고 깨달은 많은 것들을 이 책에 쏟았다."(서문, pp.5-6)

"이 책은 내가 읽은 열하일기 독법이다. 단순히 열하일기 안내서에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 사상과 정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정보를 담고자 했다. 열하일기를 제대로 읽으려면 조선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잘 이해해야한다. 연암의 열망과 고민을 나의 문제의식으로 치환하고 지금 여기의 삶과 현실에 적용해보았다. 학술적인 가치도 놓치지 않으면서 이 책의 독자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곳곳에 숨은 연암의 우언을 찾아낼 때 열하일기의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다."(서문, p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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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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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중편소설 『필경사 바틀비』(문학동네, 2017)의 화자는 초로에 접어든 변호사로 젊었을 때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벌이를 한다. 점차 서류 작성 업무가 늘어나서 새로운 필경사를 채용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바틀비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그러나 상사가 필사의 검증을 요청했을 때 그는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

이후 바틀비는 모든 질문과 명령과 요청에 시종일관 ‘안하는 편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그래도 화자는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내는 점에 신뢰를 보내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바틀비는 주요 업무인 필사까지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 화자는 결국 쓸모가 없어진 바틀비를 두고 사무실을 옮겨버리게 된다.

이 소설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열린 책들, 1992)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이 작은 책은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두시오!”라는 말 한 마디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좀머 씨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끊임없이 걸으면서 내뱉는 그 한 마디는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조금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작은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스토리와는 무관하게 단지 그 말을 따라 되뇌어 보면 마음 한 쪽이 시원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좀머 씨가 내뱉던 말에 뭔가 시원함을 느꼈던 것과는 달리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는 거듭될수록 불안해진다.

『좀머 씨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어느 마을을, 『필경사 바틀비』는 자본주의가 막 시작되던 19세기 중반의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거대한 수레바퀴 속 먼지처럼 만든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커다란 기계의 작은 부속품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좀머 씨와 바틀비는 자기를 좀 내버려 두라고 외치거나, 안하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삶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것은, 인간이 전쟁이나 자본주의와 같은 거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신의 말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좀머 씨의 외침보다 바틀비의 거부는 좀더 아프고 힘들다. 좀머 씨는 끊임없이 도망 다니며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러나 바틀비는 도망치지 않고 사회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 자리에 그대로 꼼짝 않고 계속해서 ‘안하는 것을 택’한다. 이것은 오히려 적극적인 결정이다. 치열하다.

여기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꺼내본다.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공부를 해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거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너희가 커서 이 사회를 바꿔보렴. 지금은 어쩔 수 없단다. 이렇게 책임을 떠넘기는 어른이었다. 이런 교사 아래에서 배운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어느 곳의 나사를 매일같이 조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바틀비처럼 거부를 ‘택’하지 못하고 터키나 니퍼스처럼 가끔 교대로 발작을 참아가며 말이다.

부끄럽더라도 또다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말한다. 아이야, 이 세상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란다. 너의 꿈을 이루려면 공부를 해야 한단다. 꾸준히 습관을 들여야 한단다. 선생님의 말씀은 잘 들었니?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니? 하며 끊임없이 사회 속에서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갈등은 없었는지 확인을 한다. 조금이라도 틀을 벗어나거나 격에 맞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바틀비처럼 되리라는 암묵적 결과를 알고 있으니까.

바틀비, 그의 생을 생각하면 깊은 바다에 잠긴다. 발이 닿지 않는 불안과 아득한 막막함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른다. 꼭 다른 사람의 생을 한바탕 살아낸 꿈을 꾸고 나서 펑펑 울고 있는 느낌이다. 바틀비는 어쩌면 우리 안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바틀비는 버리고 버리고 와도 그 자리에 있는 존재다. 바틀비는 떼어낼 수 없는, 잊어버리고 싶어도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그러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다. 냉혹한 현실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느낌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긍정적 희망이라든가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막막한 불안과 깊은 우울이 안개처럼 덮쳐왔을 뿐. 그러나 언젠가 ‘도망치지 않는 바틀비’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아직은 부끄러운 체념의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한다면, 현실에 지쳐 심해에 갇힌 듯한 절망과 우울에 빠져본 적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마도 저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서 처절함 한 조각까지 토해내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맛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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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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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의 『어느 광인의 이야기』(진선 출판사, 1996)에 일곱 개의 가면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다가 가면을 잃어버리고는 허둥대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러다 아무 것도 덮어쓰지 않은 맨 얼굴에 닿은 햇살에 황홀함을 느끼며 가면을 훔쳐간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외친다. 그리하여 그는 미친 사람이 되었고, 미치게 되자 고독에서 비롯된 자유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밝힌 것처럼 최은영 작가의 중편 소설 「쇼코의 미소」(『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7)는 강하게 시선을 끌지는 않지만 담담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귓가를 두드린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이다 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정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질투, 부러움, 동질감, 열등감, 연민, 우월감, 자존심. 이 감정들은 들키고 싶지 않은 맨 얼굴이다. 우리는 들키고 싶지 않을 때 미소를 짓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칼릴 지브란의 가면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쇼코는 일본 문화가 한국에 전격 개방되던 해, 한일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소유의 학교에 견학을 왔고 소유의 집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게 된다. 소유는 쇼코의 미소에 이상한 이질감과 차가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점차 호감을 느낀다. 쇼코의 “어쩌면 넌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말 한 마디를 마음에 새기기도 하고, 쇼코가 주고 간 세계지도 때문에 이제껏 작은 마을에만 한정되어 있던 시야를 넓혀 바깥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언젠가는 변두리 마을을 벗어나 도시로 가겠다던 쇼코의 선언은 소유에게 동경과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소유가 알을 깨고 나오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도쿄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쇼코의 편지가 끊긴 후, 일본으로 쇼코의 집까지 찾아간 소유. 실은 쇼코에게 꿈을 향해 넓은 세계로 발을 내딛은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미련 없이 큰 세상으로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쇼코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한쪽이 부서져 버린 인간’(p.26) 쇼코를 보며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가도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상처를 입고 만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 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p28)다고 소유는 생각한다. 소유의 그 섬세한 감정들, 우월감과 비참함과 후회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들 속에서 독자 역시 마음이 울렁거린다.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소설에는 「쇼코의 미소」라는 제목에서처럼 쇼코의 ‘웃음’에 여러 번 초점이 맞춰진다. 쇼코가 처음 소유의 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부끄러운 듯한 미소, 소유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짓는 미소, 소유와 서로의 할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불만을 이야기할 때의 친절하지만 차가운 듯한 미소, 할아버지의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사진 속의 과장된 미소, 소유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일은 유감이라며 손을 잡아주며 짓던 미소, 일본으로 돌아가는 공항 출국장에서 보이던 예의바른 미소까지.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되는 것이 위선과 가식이라는 생각에 힘겨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가면임을 인정하자 한결 편해졌다. 이 소설은 끝까지 소유와 쇼코 사이의 모순되고도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일정한 거리를 통해 정리되고 절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거리가 무너지고 가면을 쓸 힘도 없을 때 쇼코처럼 우울증을 앓게 된다. 칼릴 지브란의 ‘광인’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고독에서 비롯된 자유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미친 사람이 된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지만 고독할 수 없는 존재다. 함께 기대고 살아가야하는 존재다. 쇼코는 다시 진한 화장을 하고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살아나가게 된다.

쓸쓸한 땅거미가 올라오는 저녁이라든가, 잠 못 드는 새벽,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혹은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은 지하철 안에서, 아니면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지나다니는 번화가 거리 카페 구석에서라도,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화두가 있는 사람이라면 「쇼코의 미소」를 펼쳐 한 번쯤 담담하게 읽고 오랜 사색에 잠겨보길 권하고 싶다.





내가 어쩌다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물었지?
사연은 이렇다네.
어느 날 – 그땐 아직 신들도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어-
아주 곤하게 자다 깨어나 보니
내 가면이 모두 없어졌지 뭔가.
내 가면은 모두 일곱 개였는데,
내가 직접 만들어 일곱 평생 동안 써왔던 거였다네.
나는 북적대는 거리를 가면도 없이 헤집고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어.
“도둑이야, 도둑! 빌어먹을 도둑놈 같으니라구!”

그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비웃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제각기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가 버리더군.
그렇게 법석을 떨며 시장까지 갔을 때,
어느 집 옥상에 서 있던
웬 꼬마 녀석이 “미친 사람이다”하고 소리를 질렀어.
난 고개를 들어 그 녀석을 보았다네.

그러자 아무것도 덮어쓰지 않은 나의 맨얼굴에
태양이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그것은 내 생애의 첫 경험이었고,
내 영혼은 태양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더 이상 가면 생각은 나지도 않았어.
얼마나 황홀했던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지.
“내 가면을 훔쳐간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이리하여 난 미친 사람이 되었다네.

그리고 이렇게 미치게 되자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고독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또 이해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자 안심이 된 거지,
누군가가 우리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 속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얽매이게 되니까.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자유롭다고 해서
너무 자만하지는 말아야겠어.
감옥에 있는 도둑도
다른 도둑으로부터는 안전할 테니까.


- 칼린 지브란의 「어느 광인의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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