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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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중편소설 『필경사 바틀비』(문학동네, 2017)의 화자는 초로에 접어든 변호사로 젊었을 때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벌이를 한다. 점차 서류 작성 업무가 늘어나서 새로운 필경사를 채용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바틀비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그러나 상사가 필사의 검증을 요청했을 때 그는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

이후 바틀비는 모든 질문과 명령과 요청에 시종일관 ‘안하는 편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그래도 화자는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내는 점에 신뢰를 보내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바틀비는 주요 업무인 필사까지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 화자는 결국 쓸모가 없어진 바틀비를 두고 사무실을 옮겨버리게 된다.

이 소설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열린 책들, 1992)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이 작은 책은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두시오!”라는 말 한 마디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좀머 씨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끊임없이 걸으면서 내뱉는 그 한 마디는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조금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작은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스토리와는 무관하게 단지 그 말을 따라 되뇌어 보면 마음 한 쪽이 시원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좀머 씨가 내뱉던 말에 뭔가 시원함을 느꼈던 것과는 달리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는 거듭될수록 불안해진다.

『좀머 씨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어느 마을을, 『필경사 바틀비』는 자본주의가 막 시작되던 19세기 중반의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거대한 수레바퀴 속 먼지처럼 만든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커다란 기계의 작은 부속품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좀머 씨와 바틀비는 자기를 좀 내버려 두라고 외치거나, 안하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삶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것은, 인간이 전쟁이나 자본주의와 같은 거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신의 말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좀머 씨의 외침보다 바틀비의 거부는 좀더 아프고 힘들다. 좀머 씨는 끊임없이 도망 다니며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러나 바틀비는 도망치지 않고 사회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 자리에 그대로 꼼짝 않고 계속해서 ‘안하는 것을 택’한다. 이것은 오히려 적극적인 결정이다. 치열하다.

여기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꺼내본다.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공부를 해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거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너희가 커서 이 사회를 바꿔보렴. 지금은 어쩔 수 없단다. 이렇게 책임을 떠넘기는 어른이었다. 이런 교사 아래에서 배운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어느 곳의 나사를 매일같이 조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바틀비처럼 거부를 ‘택’하지 못하고 터키나 니퍼스처럼 가끔 교대로 발작을 참아가며 말이다.

부끄럽더라도 또다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말한다. 아이야, 이 세상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란다. 너의 꿈을 이루려면 공부를 해야 한단다. 꾸준히 습관을 들여야 한단다. 선생님의 말씀은 잘 들었니?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니? 하며 끊임없이 사회 속에서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갈등은 없었는지 확인을 한다. 조금이라도 틀을 벗어나거나 격에 맞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바틀비처럼 되리라는 암묵적 결과를 알고 있으니까.

바틀비, 그의 생을 생각하면 깊은 바다에 잠긴다. 발이 닿지 않는 불안과 아득한 막막함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른다. 꼭 다른 사람의 생을 한바탕 살아낸 꿈을 꾸고 나서 펑펑 울고 있는 느낌이다. 바틀비는 어쩌면 우리 안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바틀비는 버리고 버리고 와도 그 자리에 있는 존재다. 바틀비는 떼어낼 수 없는, 잊어버리고 싶어도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는, 그러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다. 냉혹한 현실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느낌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긍정적 희망이라든가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막막한 불안과 깊은 우울이 안개처럼 덮쳐왔을 뿐. 그러나 언젠가 ‘도망치지 않는 바틀비’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아직은 부끄러운 체념의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한다면, 현실에 지쳐 심해에 갇힌 듯한 절망과 우울에 빠져본 적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마도 저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서 처절함 한 조각까지 토해내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맛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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