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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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의 『어느 광인의 이야기』(진선 출판사, 1996)에 일곱 개의 가면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다가 가면을 잃어버리고는 허둥대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러다 아무 것도 덮어쓰지 않은 맨 얼굴에 닿은 햇살에 황홀함을 느끼며 가면을 훔쳐간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외친다. 그리하여 그는 미친 사람이 되었고, 미치게 되자 고독에서 비롯된 자유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밝힌 것처럼 최은영 작가의 중편 소설 「쇼코의 미소」(『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7)는 강하게 시선을 끌지는 않지만 담담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귓가를 두드린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이다 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정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질투, 부러움, 동질감, 열등감, 연민, 우월감, 자존심. 이 감정들은 들키고 싶지 않은 맨 얼굴이다. 우리는 들키고 싶지 않을 때 미소를 짓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칼릴 지브란의 가면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쇼코는 일본 문화가 한국에 전격 개방되던 해, 한일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소유의 학교에 견학을 왔고 소유의 집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게 된다. 소유는 쇼코의 미소에 이상한 이질감과 차가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점차 호감을 느낀다. 쇼코의 “어쩌면 넌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말 한 마디를 마음에 새기기도 하고, 쇼코가 주고 간 세계지도 때문에 이제껏 작은 마을에만 한정되어 있던 시야를 넓혀 바깥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언젠가는 변두리 마을을 벗어나 도시로 가겠다던 쇼코의 선언은 소유에게 동경과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소유가 알을 깨고 나오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도쿄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쇼코의 편지가 끊긴 후, 일본으로 쇼코의 집까지 찾아간 소유. 실은 쇼코에게 꿈을 향해 넓은 세계로 발을 내딛은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미련 없이 큰 세상으로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쇼코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한쪽이 부서져 버린 인간’(p.26) 쇼코를 보며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가도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상처를 입고 만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 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p28)다고 소유는 생각한다. 소유의 그 섬세한 감정들, 우월감과 비참함과 후회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들 속에서 독자 역시 마음이 울렁거린다.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소설에는 「쇼코의 미소」라는 제목에서처럼 쇼코의 ‘웃음’에 여러 번 초점이 맞춰진다. 쇼코가 처음 소유의 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부끄러운 듯한 미소, 소유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짓는 미소, 소유와 서로의 할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불만을 이야기할 때의 친절하지만 차가운 듯한 미소, 할아버지의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사진 속의 과장된 미소, 소유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일은 유감이라며 손을 잡아주며 짓던 미소, 일본으로 돌아가는 공항 출국장에서 보이던 예의바른 미소까지.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되는 것이 위선과 가식이라는 생각에 힘겨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가면임을 인정하자 한결 편해졌다. 이 소설은 끝까지 소유와 쇼코 사이의 모순되고도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일정한 거리를 통해 정리되고 절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거리가 무너지고 가면을 쓸 힘도 없을 때 쇼코처럼 우울증을 앓게 된다. 칼릴 지브란의 ‘광인’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고독에서 비롯된 자유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미친 사람이 된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지만 고독할 수 없는 존재다. 함께 기대고 살아가야하는 존재다. 쇼코는 다시 진한 화장을 하고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살아나가게 된다.

쓸쓸한 땅거미가 올라오는 저녁이라든가, 잠 못 드는 새벽,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혹은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은 지하철 안에서, 아니면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지나다니는 번화가 거리 카페 구석에서라도,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화두가 있는 사람이라면 「쇼코의 미소」를 펼쳐 한 번쯤 담담하게 읽고 오랜 사색에 잠겨보길 권하고 싶다.





내가 어쩌다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물었지?
사연은 이렇다네.
어느 날 – 그땐 아직 신들도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어-
아주 곤하게 자다 깨어나 보니
내 가면이 모두 없어졌지 뭔가.
내 가면은 모두 일곱 개였는데,
내가 직접 만들어 일곱 평생 동안 써왔던 거였다네.
나는 북적대는 거리를 가면도 없이 헤집고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어.
“도둑이야, 도둑! 빌어먹을 도둑놈 같으니라구!”

그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비웃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제각기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가 버리더군.
그렇게 법석을 떨며 시장까지 갔을 때,
어느 집 옥상에 서 있던
웬 꼬마 녀석이 “미친 사람이다”하고 소리를 질렀어.
난 고개를 들어 그 녀석을 보았다네.

그러자 아무것도 덮어쓰지 않은 나의 맨얼굴에
태양이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그것은 내 생애의 첫 경험이었고,
내 영혼은 태양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더 이상 가면 생각은 나지도 않았어.
얼마나 황홀했던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지.
“내 가면을 훔쳐간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이리하여 난 미친 사람이 되었다네.

그리고 이렇게 미치게 되자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고독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또 이해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자 안심이 된 거지,
누군가가 우리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 속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얽매이게 되니까.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자유롭다고 해서
너무 자만하지는 말아야겠어.
감옥에 있는 도둑도
다른 도둑으로부터는 안전할 테니까.


- 칼린 지브란의 「어느 광인의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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