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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갈 용기 - 자유롭고 행복해질 용기를 부르는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노만수 옮김 / 에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늙어갈 용기

-자유롭고 행복해질 용기를 부르는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

수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작가의 이력이 특이하고, 이 책은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을 연구한 작가의 글이라는 것을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내고 있다. 작가의 특이한 경험과 아들러의 심리학과의 특이한 교감이 운명적 연결체처럼 느껴진다.

늙어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의 섭리인데 왜 작가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책을 접했고, 또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헬렌 니어링과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책을 들었다.

아들러는 직면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현실을 해석하고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면 확실히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인생의 과제에 부딪히고 그것과 ‘대화할 용기’가 필요하다. ‘대화’의 본래 뜻은 ‘로고스를 주고 받는다’이다. ‘로고스’는 ‘말’이고 ‘이성’이라는 뜻도 있다. 사고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행하는 토론이며, 그것이 외화된 형태가 대화다. 한편으로 사고는 영혼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소리를 내지 않고 행하는 대화라고 한다(플라톤, 소피트테스). 대화에서는 ‘누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무엇’이 문제가되어야 한다. 비판을 할 거면 생각 자체를 비판해야지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명했는데 내용이 어떻든 무조건 반대한다면 처음부터 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타자에 대하여는 대화할 용기가 필요한데 대화 성립의 조건을 ‘지식, 호의, 솔직함’이라고 한다.

대화 중에 간격을 적절하게 유지하지 못하거나 타이밍이 어긋나는 이유는 의미 내용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체기관은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생존 능력을 배가시킨다. 아들러는 말한다. “정신은 늘 열등감 등으로 생기는 과로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보상을 추구하는 정신의 메카니즘은 신체세계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곧 아픔과 더 자주 대면해야 하는 것이고, 아프다는 것은 곧 늙어간다는 신호다. 정신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보상을 추구하는 정신의 메카니즘은 신체의 세계에서도 똑같다고 아들러는 말한다.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의 핵심 전제는 두가지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을 자신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인지론이다. 둘째, 인생의 과제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를 문제삼는 ‘원인론’이 아니라 ‘어디로’ 향해 가는가를 중시하는 ‘목적론’이다. ‘어디에서(원인)’이 아니라 ‘어디로(목적)를 물어야 한다고 아들러는 강조한다. ’불안‘도 마찬가지로 목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은 불안(원인)하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과제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숱한 과제에 진지하게 몰두하지 않기 위해서(혹은 회피하기 위해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우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의 주지대로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와 인내력을 갖고 과거가 아닌 미래로 눈을 돌려 미래를 향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했다. 병은 몸말에 관한 문제 즉 자신과 신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인 것이다.

나이 듦을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이른바 ‘존재의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 부모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어한다. 죽음에 대하여는 책임질 용기가 필요하며, 결국 마지막으로 작가가 주장하는 결론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는 행복해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로병사에 대한 아들러의 심리학을 작가의 경험에 녹여서 어떤 때는 철학적으로 어떤 때는 아주 현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다만 헬렌 니어링의 책을 읽었던 기억처럼 마음 속 깊이 기대하였던 감동의 물결이 오기 보다는 생노병사에 대하여 조금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이지만 점점 이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다가가는 것은 자식이 크는 만큼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며 자조한다. 그러면서 결국 작가가 주장하는 결론처럼 나 자신을 위해 행복해질 용기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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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이야기 - 열망의 유토피아가 온다
주요섭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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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 이야기] 책 제목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고등학교 교육까지 주입되어 왔던 편협하게 고정되어 있던 현대사와 국제정치에 대한 의식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고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을 전환시켜 주었던 이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였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아주 큰 인식적 충격과 전환을 안겨주었던 [전환시대의 논리]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 만들어졌던 의식을 깨는 것이라면 [전환이야기]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전환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패망하면서 세상은 자본주의의 논리 그 중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사회정의도 민주주의도 함몰되어 버린 현실에서 과연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체제는 과연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의구심으로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작가는 전환을 “의식의 전환, 생활의 전환, 체제의 전환”이며 “주체의 전환, 가치의 전환, 운동의 전환”이라고 하며, “내가 바뀌면 우리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문명의 전환”이라고 한다. 작가의 “전환”에 대한 규정과 자본주의 이후의 가치와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봤을 때, 책의 전반적 흐름은 매우 의식적이고 정치적일 것이라는 선입감을 갖게 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작가의 경륜을 엿볼 수 있는 해박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참 평온하고 공정하다는 느낌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고양하는 한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경제 영역의 자유를 인간과 사회 전체로 일반화하려는 체제라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부의 대가로 지구생태계와 인간성과 공동체를 치명적으로 파괴하였고, 급기야 자본의 재생산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아니다. 체제 전환의 때가 되었다. 사회적 위기, 생태적 위기, 그리고 경제 시스템 그 자체의 위기를 인정하고 또 전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생활양식의 전환만으로는 건강한 삶을 기약할 수 없다. 거꾸로 ‘또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시스템의 자기조직화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 ‘체제 전환’이다.”이라 주장에 더욱 강한 기대감을 갖기도 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초라하다.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파 인터넷사이트 ‘일간 베스트’의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고, ‘민주’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문을 닫았으니 민주주의 그 자체는 몰라도 ‘민주화’와 ‘민주화 세력’의 위기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70~80년대 세대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했던 민주주의의 신화가 사라졌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더 이상 전설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더 이상) 민주주의가 절실하지는 않다. 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자리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만도 아니다. 나와 우리의 복잡하고 섬세한 마음을 담기에 투표용지의 크기는 너무 작다. 찬성/반대 둘뿐인 선택지는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정녕 ‘새 정치’가 절실하다.”는 주장에도 씁쓸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고, “진보는 국가 교육에 편향되어 있으며, 우익은 시장 교육만이 경쟁력 강화의 해법이라고 강변한다. 국가 교육과 시장 교육을 넘어 (지역)공동체 교육으로 새롭게 창조해 내야 한다.”는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인식도 공감한다.

그러나 작가의 전환론에 대한 주장에 한참 기대나 흥분을 가져보고자 하면 해박한 종교적 사례와 개벽 이야기가 오버랩 되면서 왠지 종교 서적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과, 작가가 정말 주장하고픈 얘기가 무엇인지도 헷갈렸다. 새로운 전환 시대에서 문명의 척도는 ‘삶·생명, 평화, 박애’라는 가치가 종교적 사회 운동에서 태동하였고, 종교적 가치와 끈이 잘 연결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새로운 전환의 시대에서 필요한 것은 탈종교, 비종교라고 작가가 지속적으로 주장하지만 작가의 결론은 결국 종교로 귀결되고 있는 순환론적 오류에 빠져 있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동학 계열의 민족종교의 논리가 스스로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과 너무나 유사하며, 기독교, 천주교, 불교의 교리에 해밝은 것도 너무나 닮았고, 이러한 세계적 종교는 하나로 통하고 연결된다는 주장도 흡사하다. 물론 동학의 교리와 정신을 더 높게 사고, 현대에서도 이러한 동학의 정신을 분명 계승해야 하는 것은 맞다. 동학의 숭고한 정신과 교리를 이어받아 생명, 평화, 박애라는 가치를 널리 퍼뜨리고 동학운동에서와 같이 포접 활동과 유사한 사회 협동조합도 분명 긍정적인 요소가 아주 많고 사회 변혁의 한 주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집도 한살림조합원의 집이고, 각종 반찬과 과일을 한살림에서 조달하고 있다.

의식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는 공감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결국 체제의 전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 비약이고 이분법적이고 너무 단계론적 접근인 것인가? 사회 전반적으로 협동조합 열풍이 불지도 않고 있으며, 귀농귀촌 인구가 이농 인구를 넘어서고, 무엇보다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 일어나는 힐링 신드롬이 있다고 체제 전환의 신호탄이라고 보기에는 작가의 너무 때 이른 상황 분석이 아닌가 한다. 겨울동안 얼어붙어 있던 대지에 마치 너무 이른 봄날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작가는 조급하게 아니 너무나 많은 갈증과 열망으로 진짜 봄 기운을 받은 소생(蘇生)을 보고 싶어서 눈에 그렇게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은 아닌지 한다. 물론 우주의 긴 시간의 차원에서 보면 자본주의 위기가 시작되었다고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자본의 권력이 너무나 강하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화폐의 지배는 맹위를 떨치고 있고,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산업문명을 제패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나,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후의 가치와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는 작가의 순수한 주장처럼 정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아니면 대천재가 나타나 새로운 전환 시대의 논리가 필요하다고 작가처럼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 초라하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을 그렇게 만들고 조작하고 조롱하는 것이 초라하지만, 긴 우주의 시간으로 봤을 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도 무작정 낙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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