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그의 리더십을 읽다
김헌식 지음 / 평민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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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그의 리더십을 읽다(김헌식, 평민사, 20170630)

 

2인자형 1인자 리더십이라는 주요 관점에서 문재인의 삶 속에서 드러난 그의 리더십의 특징을 주로 언론의 보도 내용이나 전기를 통해서 나열식으로 도출하고 있다. 우리가 문재인의 본질을 얼마나 알고 지지하는지 혹은 지지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독자들에게 묻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문재인의 운명은 민주주의의 운명과 같이 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결론이자 출간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무리 테크닉이 훌륭해도 삶속의 가치관과 철학, 인격성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낼 수 없기 때문에 리더십은 단순히 어떤 테크닉의 구사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 자체에서 체화된 행보를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리더십의 특징과 유형을 추출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인데 언론인 출신 작가답게 핵심만 짚어서 잘 서술하고 있는데 정작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답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민주주의는 기다림이고, 민주진보정권의 승리와 안착을 위해서 문재인의 진정성 그리고 본질을 보았다면 발효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을 절대적으로 확보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과 신뢰가 보장이 될 때 문재인이 가지고 있는 리더십은 발휘될 수 있고 성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을 알지 못하고 단기적 표피적인 현상만을 보고 문재인에게 바보 같게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야합하고 배신하는 거라며 공격하는 것은 노무현과 같은 운명적 결과를 문재인에게도 안기는 것이며, 문재인의 실패는 노무현의 실패이며 민주주의의 실패가 될 수 있고, 이것은 진보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엄중한 경고도 잊지 않고 있다.

 

좋은 사람은 왜 잘 드러나지 않는가, 정말 좋은 사람은 왜 선택받지 못하는가. 정말 현실은 불합리해서 진정으로 좋은 사람을 원하지만 항상 그런 사람들은 외면된다는 현실 정치의 비관적인 읊조림으로 또 왜 이렇게 모순적인 일이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독자들을 책속으로 이끌어 간다. 현실적으로 허세보다 성실, 과장보다 내실을 기하는 이가 누구인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일상의 삶이 바쁜 일반 생활인들이 이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대신해서 판단의 근거와 배경을 제공해주는 매개체가 필요하며 이를 대신해주는 곳이 정당이고, 언론이라고 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원칙과 내실을 말하는 사람보다는 허세와 거짓, 과장을 남발하는 이들이 정당을 구성하고, 그들이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몰아내는 경우가 많고, 아예 내실과 원칙, 정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발을 못 붙이거나, 그대로 묻혀 버리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정당이 공적인 정치집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존재하는 변질된 정당정치로 치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언론도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스마트 모바일 환경이 조성되면, 정보의 개방성과 소통성 때문에 이러한 참된 사람들이 빛을 보고 그 진가를 발휘하며 국민을 위한 정책을 실현 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인터넷상에서도 수평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불균등하고 한쪽으로 쏠려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는 포털 사이트와 같이 힘 있는 플랫폼이 구조화되고, 그 안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이들만 적극적으로 부각되거나 자주 노출되기 때문이다. 또한 비대면 간접성이라는 근본적이 속성이 있기 때문에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는데, 즉 유권자들이 어떤 인물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직접 보고 겪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전달하고 연결해줄 존재가 있어야 하며 그 중간에 있는 언론 미디어는 저널리즘에 입각하여 사실과 인물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각 신문들은 애독자들이 원하는 관점으로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기 마련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문재인의 여러 리더십 특질 중에서 2인자형 1인자 리더십을 최고로 꼽고 있다. 기존 정치·경영의 리더십은 1인자 리더십이었으나 이제 그 리더십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1인자 리더십으로는 창의와 다양성이 요구되는 사회문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2인자형 1인자 리더십을 추구하는 기조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2인자들은 위에서 군림하거나 현장성을 떠나지 않으며, 항상 낮은 자세로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고 행동하지만 진리를 알았다고 군림하지 않으며 그것이 긍정의 방향으로 어떻게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할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점은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처럼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 권력의지인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 문재인에게 자신의 정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 취약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따르게 한다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고 이에 대하여 대통령에게는 권력의지가 먼저가 아니라 소명의식이 먼저이며 소명의식이 있어야 권력의지가 어떤 방향성에서 동기로 작동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보수는 헌신하고 봉사하고 자기희생을 하는 게 아닐까요. 공적인 의무에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돈의 힘, 권력의 힘으로 의무는 요리조리 피하고 지도자입네 하면 국민이 승복하겠습니까?”(동아일보 2011.08.08.) 이 구절을 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즈는 고사하고 코미디 같은 사건이 생각난다. 2010년 연평도에 폭탄이 떨어지고 할 때 청와대 지하벙크에서 안보관계장관회의를 했는데 국방부장관을 제외하고 군필자가 대통령을 포함하여 한명도 없었다는 것과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폐허가 된 현장을 방문하여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우겼던 일이다. 이러한 수구보수정권이 민주정부 10년의 민주, 평화, 복지를 일거에 퇴행시키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까지 초래한 것은 일부 예견이 되었던 일이었지만 기득권의 저항을 철저히 계산하여 예상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검찰의 반발이 아닐까 한다. 노대통령이 검찰권을 내놓은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고 그 때문에 검찰로부터 존중받기 보다는 퇴임 후 무시 경멸당해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는 지적이 있다. 검찰의 정치중립 문제는 김대중 정부도 실패한 민주화운동세력의 오랜 요구였다. 중립화 보장은 정도껏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장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면 안하는 것이다. 검찰을 장악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쓰면 검찰한테 특권을 줘야한다. 봉사를 요구하면 대가를 줘야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검찰과 정권의 야합 역사였다. “정치중립은 무슨 특별법을 만들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문화로 정착시키는 부분이다. 중립을 훼손하지 않는 대통령의 결단이 10년 이상 지속되면 문화로 뿌리박혀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 정부가 도로 뒤집어 버리니까 문제가 된 것이지 참여정부의 중립보장이 이상적이어서 문제라는 시각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내일신문, 20110.05.20.).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고 애썼던 노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문갑식, 문재인 전기). 검찰 개혁을 하고 중립성을 부장해주었어야 하는데 우선순위가 바뀐 점을 문재인이 수차례 언급하고 지적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조건 탈권위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원칙이 무엇이며 제대로 토대를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수사권은 경찰에, 기소권은 검찰에 주어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게 된다면 경찰이 검사에게 영감님하면서 살랑대거나 쩔쩔매는 일이 사라질지 모른다. 검찰을 포함한 고위공직자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공수처의 설치와 중립성을 보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중독 현상을 일으키는데 이는 듀이가 인간은 경험의 존재라고 한 것과 맥락이 일치한다. 권력에서 멀어졌을 때를 경험한 이들은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고, 중독은 권력이 클수록 비례한다. 가장 큰 정치권력을 쥐었다가 그것을 놓을 때는 별 느낌이 없지만 그것을 놓고 나서 금단 증상은 엄청난 강도로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국정원 선거개입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잡고자 했던 것이고 권력을 잡자마자 퇴행인 줄로 모르고 휘둘렀을 것이다. 그래서 수년간 리더십이 붕괴되었고 무당이 국정을 농단해 버린 현실에서 문재인이 새로운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리더란 자신을 바라보고 선호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전대통령을 넘어서는 그만의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출발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참여정부는 민주, 복지, 평화를 위해 역사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그렇지만 정권재창출에는 실패했다. 국민들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실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재인의 운명은 노무현의 운명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이데일리, 2011.08.10.)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민주진보세력은 문화적 가치를 우선하지만 보수기득권 세력은 물화적 가치를 우선한다. 당장에 돈과 물질에 약할 수 있다. 하지만 기득권을 대변할수록 그런 물화에 대한 약속은 공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갖지 못한 자가 아니라 가진 자를 대변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항상 문화적 가치를 우선하는 민주진보세력이 열세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너무 문화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다른 정치세력보다 정권을 얻기도 힘들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것도 매우 힘들다. 즉 이러한 딜레마 상황이나 그 강도가 민주진보세력에게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문재인의 경우에도 문화/제도 코드() 사이에서 딜레마를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인위적으로 물화적 가치를 강조하다가는 본질적인 기조는 문화적 가치에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제도적인 코드()에서는 기득권의 파이를 순환할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다. 많은 것을 이미 그들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가 일정기간 혹은 일정량 이상 보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지기반은 그것을 기다려줄 여력이 없을 만큼 다급하다. 그런데 반면교사나 과거의 경험을 반추했는지 다행히 문재인만의 강점이 있었다. 문재인은 문화적 코드에 그렇게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그랬더니 권력의지가 없다, 답답하다는 말이 쏟아졌다. 즉 그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달콤하게 만드는 액션이나 언사, 공약을 잘 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처음에는 인기도 없고 강력한 지지도를 갖지 못했다. 사회문화적으로 이래야 한다는 것, 그런 문화적 코드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의 허구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에 충실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인데 대중정치에서 그런 태도는 분면 본 선거에 이르지 못할 태도이다. 그가 부각된 것도 기적에 가깝다. 문재인에게 문화적 코드들은 이미 경험을 해보았듯이 그런 것들이 실체적이고 본질적이지 않다. 어떻게 보면 제도적인 코드에 더 신경이 가 있는 것이다. 그것에서 실현가능한 것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견해를 엄정하게 밝힌다. 하지만 점차 문재인은 문화적 코드를 강화할 것이다. 주변의 압박을 받아들여서 문화적 코드를 강화할 것이다. 주변의 압박을 받아들여서 문화적 코드 수준을 높여서 대통령에 일단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점차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지지도를 견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을 것이다. 주변에서 또 그렇게 강화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적 코드의 지수가 높아지는 것이고 이에 비례하여 제도적 코드 안에 들어가 느끼게 될 딜레마 정도는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문재인은 그것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야 할까. 만약 이러한 간극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제도적 틀을 바꿀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때를 위해서 문화적 코드를 너무 강조하여 요구하는 것은 자제를 해야 한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것은 문화적인 요구를 반영하는 대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치와 민주 국가에서는 제도적인 틀을 통해서 그러한 문화적 요구들을 실현해야 한다. 어쨌든 도구적인 측면에서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아무리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라도 해도 영웅이나 검투사처럼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른다고 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이다. 문재인이 한 번의 국정운영의 경험이 있고, 공과를 성찰하여 준비를 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문화적 코드와 제도적 코드 사이에는 딜레마가 상존한다. 이러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지지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무조건 문재인을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지지한다는 것은 검투사 같은 행동이기에 상대방을 물화적으로 자극하고 상대에게 명분을 주고 이에 되치기를 당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 무엇보다 노무현이 겪었듯이 문재인이 겪게 될 딜레마 상황을 밝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공유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딜레마를 겪는 정책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세세하게 플어 주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언론이 할 수 없다. 3의 조직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문재인에게 바보 같게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야합하고 배신하는 거라며 공격하는 것은 노무현과 같은 운명적 결과를 문재인에게도 안기는 것이다. 문재인의 실패는 노무현의 실패이며 민주주의의 실패가 될 수 있다. 그들의 실패는 진보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들이 실패가 계속되는 한 사회에서 어떤 급진 진보도 성공할 수 없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기다림이다. 정말 김대중이나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의 진정성 그리고 본질을 보았다면 발효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을 절대적으로 확보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믿음과 신뢰가 보장이 될 때 문재인이 가지고 있는 리더십은 발휘될 수 있고 성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집중과 중앙집권적인 특징이 강하기 때문에 리더의 성향에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최고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구성원들의 행동이 그에 맞게 따라가는 현상 즉 리더십 모듈화 현상이 아주 강하다. 본질과 원칙 그리고 진정성에 충실하게 하는 데에 더 마음이 있는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에게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큰 만큼 조급증 내지 말고 기다려주고 참아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자. 이 책은 아마 문재인 대통령 출마선언 직후에 서둘러 출간하였기 때문인지 오탈자가 다소 눈에 많이 띄지만 문맥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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