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의 살인광선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준수 옮김 / 마마미소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가린의 살인광선 (알렉세이 톨스토이, 마마미소, 20160911)

아주 오래된 초기 버전의 스케일이 큰 007영화인데 러시아인이 주인공인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 작품을 쓰게 된 시기가 1926년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러시아에 일어난 직후에 정치, 경제, 사회 체제 전체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세계는 동서이념 대립이 조금씩 불붙기 시작하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우리가 아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작가인 레프 톨스토이(性)보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더 유명하다고 하니 의외다. 소설 속에 각종 화학 공식과 레이저 광선의 운영원리가 설명되는 등 과학적인 사실에 접목하여 소설을 전개하다 보니 굉장히 사실적이고 더한 긴박성을 준다. 또한 레이저 광선을 발명하고 지각을 뚫고 들어가 지구 맨틀 상층부의 감람석 층에 무진장 매장돼 있는 액체 상태의 황금을 채굴하는 등 당시의 상상력으로는 대단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에 놀랍다. 인간이 꿈꾸고 상상하는 거의 모든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절감케하는 소설이다.

또한 그 당시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지만 아직은 국제정치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독자노선을 걷던 미국에 대하여 자본주의의 심장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하였던 것 같다. 소설의 곳곳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당위성과 임박성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등에 대한 구절이 많이 나온다.

『이날 남녀 판매원, 공무원, 화이트칼라 등 프티부르주아들은 저마다 자기가 할 줄 아는 오락을 즐기고, 반듯한 기업체를 경영하는 부르주아들은 자기 집 벽난로 옆에 앉아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일요일은 하층민의 날이었다. 일거리가 없는 이 날이 되면 그들은 휴식은 커녕 깊은 시름 속에 쓰라린 고통을 맛보며 지루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68p).

이 구역은 노동자들과 파리 빈민층의 집단 거주지다. 이곳 바티뇰르 가, 몽마르트 언덕, 생-잉투안느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 저지대로 달려간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정부군의 포격을 받고 4번이나 고지대로 쫓겨났다. 센 강 양안을 따라 펼쳐진 도시 저지대에는 은행, 사무실, 화려한 상점, 억만장자들이 드나드는 호텔, 경찰병력 3만명을 수용하는 막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저지대의 부르주아 세력이 4번 반격에 나서 고지대 노동자 거주 구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이 구역의 심장부인 피갈 광장-클리쉬 가- 블랑슈 광장 일대는 환락가로 전락해버렸다. 세계적인 범죄 소굴에서 붉게 타오르는 휘황찬란한 불빛속에 저지대의 부르주아가 성적 욕구를 해소했던 흔적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92p)

비만과 매독과 퇴화에서 구제된 프랑스 국민이 이곳 고지대로 올라와 온갖 타락과 비리가 난무하는 파리의 저지대로 다시 한 번 대청소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95p)

부르주아의 도덕이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데 그런 도덕관념 때문에 독가스를 꿀꺽꿀꺽 삼키는 자들은 다 병신이라는 말이로군 그래(99p)』

추리소설이지만 100년 전 작가가 거의 정확하게 예단한 세계 정세에 대한 구절도 많이 보인다.

『석탄과 소금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거라고. 1914년에 독일인들이 슬슬 전쟁터로 기어 나온 것도 따지고 보면 전 세계 화학 공장의 10분의 9를 독일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독일이 석탄과 소금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당시에는 그들이 유일한 문화 국민이랄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불과 9개월 만에 에지우드 아스널을 건설할 수 있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거야. 독일인들은 우리가 눈을 뜨도록 해 주고 우린 돈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 알게 된 거지. 종전 후 우리에게 돈이 있고 화공산업도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이상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거고. 우린 제일 먼저 독일을, 그 다음은 일을 할 줄 아는 나라들을 거대한 공장으로 바꿀 거라고 ~~무능한 국가들은 자연히 도태돼 없어지게 마련이니까 그런 나라는 우리가 좀 도와주면 되겠지. 미국의 성조기가 북극에서 남극에 이르기까지 과자 상자를 포장하듯이 지구를 한 바퀴 뺑 둘러 조여 맬 날이 멀지 않았어.“(72p)

유럽 제국에 비해 미국의 압도적인 금 보유에 기반하여 금본위제에 근거한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인정한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를 예단하지 않았나 생각하며, 이후 미국은 인플레이션 등으로 금본위제를 포기했지만 당시 자본주의가 갖고 있었던 약점과 모순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고 보인다. 지각을 뚫고 들어가 지구 맨틀 상층부의 감람석 층에 무진장 매장돼 있는 액체 상태의 황금을 채굴하여 초저가 금괴의 무제한 공급으로 금값과 금본위제 달러화의 폭락을 유도하여 미국의 경제를 파탄 상태로 몰고 간다는 설정이 그 당시로서는 정말 대단한 추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인공 셀가가 직접 작성한 격문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자본주의가 힘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금 가격의 폭락으로 화폐가치가 곤두박질쳐 돈이 모두 휴지 조각이 돼 가고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고용한 하수인들 - 경찰, 시위 진압 부대, 선동가, 매수된 인권 운동가들과 시민 단체 활동가들에게 지불할 돈조차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유령이 마침내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 것입니다.(512p)』

한때 유행하였던 미국 드라마인 ‘24시’ 처럼 사건 전개가 드라마틱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맛은 떨어지지만 추리소설이 갖는 흥미진진한 사건전개와 그보다는 개인적으로 100년 전 작가가 갖고 있는 물리학, 화학, 기계학, 국제정치와 국제경제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판단력에 놀라는 재미와 웅장한 사건 스케일로 인하여 읽는 내내 통쾌하고 상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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