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너는 나의 용기
우태현 지음 / 새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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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적, 너는 나의 용기

임화의 시(九月 十二日 一九四五年, 또다시 네거리에서)에서 따온 『적, 너는 나의 용기』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소설이자, 식민지 해방과 남북분단과 전쟁 이후에 한국 현대사에 얽히고설켜 있는 정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임화의 시들은 혁명의 대오를 정비하려는 가슴 저미도록 비장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임화라는 시인 자체가 소설 속에 묘사한 것처럼 시대가 그대로 하나의 인물로 육화된 존재로써, 시와 혁명, 전향과 속죄, 참전, 그리고 미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처형되는 것까지 이 소설의 중심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범인이 사용하는 가명과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그림들은 카프문학전집 2권 김기진 전집의 표지에 박힌 그림인데 로댕의 ‘지옥의 문’ 위에 놓인 세 사람의 ‘망령’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단테의 지옥편에서 소개한 ‘슬픔의 도시’와 ‘영원한 비탄’과 ‘망자’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446P) 역시 이 소설에서 담고자 했던 뒤집어엎으려 했던 세상에 대한 절규와 절망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살인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치밀하고 생동감있는 묘사는 잘 만들어진 CIS 영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스릴있고 긴장감을 주고 있다. 특히 사체를 부검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법의학적 소견, 범죄현장에 남겨진 글귀와 그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탄탄한 구성과 암시는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열정과 치밀함이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 해결을 위한 단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형균의 생각을 묘사한 ‘붉은 충성, 붉은 수첩과 깃발, 위대한 수령의 초상화, 위수남청. 지난날 그들이 청춘을 온전하게 살면서까지 추종했던 혁명이념 중의 하나. 그러나 차단과 통제의 그늘에서 은밀하게 자라야만 했던 불완전한 사유. 분단으로 그 실존을 확인하지 못한 채 오직 추측과 희박한 근거로만 성장했던 불구적 사상, 분단의 질곡이 낳은 또 다른 파시즘 혹은 異種 볼세이즘! 그것에 대한 열망 아니었던가? 그 사상의 모태인 공화국이 이미 붕괴의 일로를 걷고 있기에 지금은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비겁한 관념이 되어 버렸다. 화려하고 축복받은 통일족구의 미래와 지도자로부터의 충만한 사랑을 경외하는 경전 속 신앙과 같은 그 사상도 이미 말라비틀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지금 여기에서 처형의 이유가 되고 있을까?’(414P) 부분에서 살인의 의도와 이유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소설적 구성과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지하여 단숨에 읽어 내려갔지만 살인 동기와 단서를 추적하면서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정치적 논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386세대들이 고민하고 겪어야 했던 아픔과 열정 그리고 의문들을 주인공인 형균과 백시우와의 대화에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에게 수령은 어떤 존재입니까?”

“괴물이지 ---.”

“지울 수 없는 나의 회한이라지 않았나? 이제는 모두 부정해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내 과거의 가장 짙은 그늘이고.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에게는 치유가 꼭 필요한 상처 같은 것이지. 만들어진 우상. 남조선이 갖고 있는 계급과 모순을 그 ‘위대한 수령’이 혁명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란 환상에서 비롯된 것들 말이야! 사리 난 이념보다 힘을 믿는 사람이었네.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추상보다 색깔과 선을 더 중요시하지. 그 때는 총칼로 수천명을 학살하고 집권한 악랄한 파시스트 군부정권, 그들과 결탁한 부패한 재벌,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이 모순덩어리 자본주의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어. 그 일사불란한 힘을 수령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결코 가능하지 않은 동맹을 바랐던 거지. 또 다른 볼세비즘이었다고 내가 쓸어버리고 싶은 군부정권과 별 다름 없는 인민을 기만하여 지배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았어.”

“그동안 왜 부정하지 않았나요?”

“ 그것 아는가? 고해보다 죄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지. 부정하는 것은 쉬워! 난 부정할 수 없었네. 나의 말이 진실이라고 여긴 수많은 동지들과 후배가 투옥되고, 다치고, 죽었지 않았나? 그들에게 내 말이 거짓이었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네.”

“잘못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도 있잖습니까? 신보련.”

“고백? 그들의 말을 믿나? 그들은 처음부터 신념이 아니었던 거야. 신념을 설파했던 것이 아니라 거짓말로 선동을 했던 거지. 지금은 두 번째 사기를 치고 있지. 주체사상을 버리고 이제 개과천선해서 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되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겠다고? 뒤집어엎으려 했던 그 체제와 역사를 찬양하는 것! 그것이 진실일까? 얄팍한 출세를 위한 거짓수사에 불과해. 그들이 수령을 버렸다고 선언했던 시기를 잘봐! 소련이 붕괴한 휠씬 후의 일이야. 동유럽과 러시아를 여행하고, 북한을 방문하고, 그래서 사회주의 사상이 문제가 있고, 주체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단지 그 사상의 이용가치가 없어졌다는 말인 게지! 모든 사람이 아는 진실을 뒤늦게 눈으로 보고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면 그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적인 지체장애가 아닐까? 그들에게 지금 자유주의란 주체사상과 같은 선전과 선동의 도구일 뿐이고 똑같은 욕망의 표현이지! 청년 시절의 혁명운동이 잘못되었던 것이라 고해를 했다지만,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해야할 대상은 저 지배계급이 아니라 그네들 때문에 감옥에 가고, 병을 얻고, 고생하며 죽어간 동지들이지.”

“혁명, 당신에게 혁명이란 무엇이었던가요?”

“혁명---! 가슴이 이는 불길과 같은 것이었다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오직 혁명으로만 가능하다는 신념. 부모들이 뼈 빠지게 고생하는 것을 보며 성장한 총명한 어린 학생들이 대학이란 데를 와서 눈에 본 것이 무엇이었겠나? 썩어빠진 군부정권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곳이 재벌과 봉건관료들이 부패망으로 물샐틈없이 직조하고 있던 후발 자본주의라는 것. 그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고생하는 부모들의 한을 풀고 우리의 미래를 가꿀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네.”

“그래! 혁명을 꿈꾸지 않는 젊음이 어디 젊음이던가? 세상은 변해야 하고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젊음에서 오는 것 아니었던가? 믿음과 젊음, 혁명의 시작이지.”

“당시 학생들이 왜 사회주의를 택했던가요?”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지침을 줄 그런 사상과 이념에 목말라했지. 마르크시즘은 생애 최초의 철학적 경험이었어. 시골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세상의 불평등을 한꺼번에 갈아엎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지! 희망은 가슴속에 열정을 불어넣어주었네. 저기 아담이 신에게 생명을 부여받았듯이. 기성세대들이 어린 학생들을 마르크시즘으로, 주체사상으로 몰아넣었던 거야.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비판없이 마르크시즘이라는 엄연한 철학의 조류를 빨갱이 사상으로 불온시한 무지몽매한 것들이 기성세대였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와 참고서 이외에는 볼 수 없었고, 철학적 훈련의 기회라고는 전혀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서양 근대철학이 응집된 사유체계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거지. 똑똑하고 혈기방장한 청년들이 빠져들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 굴종과 기만, 오욕의 역사에 대한 반감이 그 불온함 속에서 진실과 진리를 발견하게 해 준거야. 부끄러운 일이지만 주체사상은 달랐어. 가장 손쉬운 길이었지. 학습방법도 어렵지 않았네. 서로의 사유를 확인하고 토론한 것이 아니라 방송의 청취와 암기, 주체사상 태두들의 문건을 다시 되뇌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교시를 학습하는 것이었지. 철학에는 교시가 없지 않나? 지금 생각하면 학생운동 내 권력확대를 위한 신종 벤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암기과목이었지. 교과서 같은.

그 때 세상을 바꾸자고 앞에서 메가폰을 잡고 떠들던 이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나? 타도하려 했던, 뒤집어엎어 버리려 했던 것들과 놀라우리만치 닮아가고 있어”

“수십 년을 싸워왔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어요. 열망이 왜 절망으로 바뀌었을까요? 수많은 동지들이 왜 절망의 대열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우리에게 힘이 없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지만, 기회가 있을 때에는 단호하지 못했어. 래디컬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적당한 타협의 악수 속에 스며오는 거부하기 싫은 달콤함과 따듯함. 그렇게 섞여갔고 또 섞여가길 원했지. 우리의 비겁함과 교활함에 답이 있다고 보네.”(465~470P발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는데 왜 극좌적 인물들은 종종 극우로 돌변하는데, 극우적 인물은 극좌로 변신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결국 기득권을 누가 누리고 있느냐와 귀결된다고 보며, 386 세대에서는 혁명을 꿈꾸지 않는 자는 청년이 아니라고 했고, 그들은 요즘 세대들에게서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고 한다. 이미 386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오포(五抛) 세대들에게 취업고민과 조이(joy)만 추구하도록 틀을 만들지 않았는지 의문을 품어본다.

소설의 결론도 굉장히 현실적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보며, 다만 작가는 살해되는 사람들을 모두 진보의 편에서 그나마 정의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서술할 수밖에 없었을까하는 의문도 품어보며, 차라리 얼굴만 번지러하고 참하게 생긴 여성 변호사 여당 대변인이 쏟아내는 위선과 거짓말에 대해서 징치하는 작가의 후속 추리소설을 기대하며, 형균의 사시 동기인 김세동 검사가 내일 아침이면 또 야망의 불땀을 다시 살리기 위해 분주하겠지만 속으로만 눌러오던 아쉬움을 술김에 하는 넉두리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초 대검찰청 1층에 있는 디케상 니도 알제? 법공부할 때 교수들이 ‘법이 구현하는 정의’를 설명할 때 예시하던 그리스 신화의 여신상 말이다. 우리 그 때 디케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애써 ‘진실’을 외면하기 위한 것이고, 왼손에 든 저울은 자신에게 오는 금의 무게를 재기 위한 것이며, 오른 손의 칼은 권력을 수호하기 위한 무기라고 비웃었다 아이가? 그러면서 여신이 눈 가리개를 푸는 날이 언제려나 그랬제? 흐흐. 여신이 와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줄 니는 아나? 여신은 절대 눈가리개를 풀지 않을 거거든. 왜? 흐흐. 봉사란 말이다! 겉으로 불편부당, 정의의 잣대를 공정하게 적용한다는 흉내를 내느라고 눈을 가린 척하는 거지. 실상 여신은 정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맹인이라꼬..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땡크 앞세워 정권 잡은 그 머리 벗겨진 대통령이 뭐라 캤노? ‘정의사회구현.’ 그 정의는 여신의 정의가 아니라, 권력자의 정의지! 권력자의 정의와 저항하는 자들의 정의가 서로 싸우고 있응께. 정의가 갈팡질팡하는 것 아니겠나?”(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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