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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평점 :
일제강점기는 언어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젊음을 빼앗긴 시대였다.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식민 지배의 구조와 독립운동의 전개, 해방의 과정을 배운다. 그러나 그 거대한 역사 서술 속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개인들의 삶까지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강제노동으로 타국에 끌려가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해방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긴 잠에서 깨다'는 바로 그 잊힌 이름들을 다시 역사 속으로 호명하는 책이다.
이 책은 문화인류학자 정병호 교수의 삶과 실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인류학을 단순한 학문적 탐구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일본 슈마리나이 탄광 현장을 직접 찾아가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고, 그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는 일에 헌신했다. 그 과정은 과거의 상처를 파헤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상처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일이었다. 나아가 그는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와 대만 청년들이 함께 참여하는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을 이끌며, 기억을 갈등이 아닌 화합과 평화의 토대로 삼고자 했다. 과거를 직시하되 증오에 머물지 않고, 대화와 연대로 나아가려는 실천은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울림이다.
이 책이 대한민국 학교 역사교육에서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역사를 ‘사건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확장시켜 주기 때문이다. 기존의 역사 수업이 정치적 결정, 조약, 전쟁, 제도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긴 잠에서 깨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존엄을 통해 역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학생들은 강제동원이라는 용어 뒤에 숨겨진 구체적인 얼굴과 가족, 삶의 이야기를 만나며 역사적 사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감정 이입을 넘어, 역사적 공감 능력과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 책은 역사교육이 지향해야 할 가치교육의 방향을 제시한다.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해 고국으로 모시는 일은 과거를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 국가와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책임져야 하는지를 묻는 행위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인권, 정의, 책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배우게 된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선택과 태도를 비추는 거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갈등의 역사를 평화교육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모습은 동아시아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는 세계 시민으로 성장해야 할 학생들에게 역사적 기억을 기반으로 한 공존과 연대의 감각을 길러준다.
'긴 잠에서 깨다'는 과거를 복원하는 기록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의 텍스트다. 이 책을 통해 학생들은 역사를 시험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책임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배움으로 경험하게 된다.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작은 실천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가치를 길러주는 점에서 이 책은 오늘의 대한민국 학교 역사교육 속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소중한 필독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