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외로워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막스 베버의『직업으로서의 학문』은 1918년에 강의가 되었고 191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당시에 강의 했던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정치로서의 학문’이 실려 있다. 인문학에도 충분히 젬병인 나로서는 그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그런 걱정을 하며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사유적이거나 많은 인문·철학적 기본지식을 요구하는 서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 쉽고 재미있었다.

당시 독일사회에 기준으로 미국과 유럽에 퍼진 자본주의와 비교하는 막스 베버의 사상들은 결국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가져야할 의식이다. 얼마전 티브이에서 방영했던 <열혈장사꾼>처럼 장사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발전을 위해 발휘해야할 창의적인 영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대를 거듭할수록 나이든 사람의 눈에는 젊은 것들이 버릇없는 것처럼 변하듯이 당시 젊은이들은 영감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과학에 근거한 분석과 연구, 이해력에 힘을 쓴다는 것이다. 그의 ‘혼’이라고 말한 정열의 결과물은 착상에 단계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르게 보자면 과학적 방법에 의해 인문학적 사유의 접근을 더 이상 찾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업과 정열이 합쳐지게 되는 어느 시점, 특히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완만한 비탈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떠오른 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일반적으로 경험해 봤던 것이므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창작자의 입장에선 ‘영감’ 혹은 다른 이들에겐 ‘아이디어’로 불리는 것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 막스 베버의 이야기다. 그는 상인은 상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발전을 위해서 꾀해야 할 것은 이해력과 실험으로 점철되는 과학적인 것뿐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적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앞으로의 세대에서 상호보완적인 이해관계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수학적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임에도 그 심리적 과정은 다르지 않다고 말을 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그것을 통해 일에 완전히 헌신하는 사람만이 ‘인격’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 있다.

 

정치로서의 학문은 위의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6월 2일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기분이 새로웠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정치를 ‘위해’ 살거나, 정치에 ‘의해’서다. 이 대립은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말이다. 보통의 정치가는 이 두 가지를 선택해서 하는 것인데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구도를 놓고 보자면 막스 베버의 말이 이해가 됐다. 돈이 넘쳐서 뜬금없이 출마하는 지역유지들, 뻔질나게 사회 운동하다가 달게된 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목숨걸고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후보들, 사회에서 물질과 명예를 얻고 정치판의 맛을 보고 싶어 넘어오는 경제인들, 도저히 위에 놈들이 해먹는 꼴을 볼 수 없어 홧김에 나온 열혈시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마구 스쳐간다.

그는 ‘직업정치가’의 발전과정을 과거에 군주와 신분집단 간의 싸움에서 군주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성직자와 문학자들, 궁정귀족과 도시귀족, 법률가들이 어떻게 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 이후에 칼럼리스트들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들의 선택해야만 하는 물질과 명예의 기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기본적인 정치의 이해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면 막스 베버는 정치와 윤리의 관계에 말한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인데 여기서 그는 신학적인 윤리의식과 세계의 많은 나라들과 그 나라의 종교적인 의식을 예로 들면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폭력에 관한이야기를 다룬다. 그것은 책임윤리와 신념윤리의 기준으로 나뉘게 되는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가가 취해야 할 신념의 가치관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감당할 책임의 가치관을 통해 막스 베버는 역시나 그 두가지 모두를 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녀야 할 가치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의 단련된 냉철함과 현실을 참아내면서 내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신념윤리를 지닌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스스로가 부담하고 있는 내적인 무게는 결국 확고함 속에서 나오는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 어중이떠중이로 비판의식으로만 일관하는 생각 없는 무개념의 행위들이 결국 그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회피하고는 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무게에 대해 나이에 관계 없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두 신념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보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막스 베버의 마지막 말은 가장 중요하다. 정치적인 신념은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우리 자신들의 모습 속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고한 용기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좀 더 나은 길로서의 정치를 원한다면 비판과 회피와 무관심으로 일삼거나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정치적인 일들이 너무 어리석거나 너무 야비하더라도 이에 좌절하지 말고 그 ‘소명’을 갖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시대의 기본적 원칙은 내가 스스로 이 나라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기브앤 테이크이다. 내가 선택한 세상은 아닐지라도 발전을 위해서 나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의 책임은 스스로가 최선을 다할 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선거 참여율이 현저하게 낮은 한국의 시대에, 점점 갈수록 신임을 잃어가는 정부와 정치바닥에 대해 손가락질 보다 우리의 확고한 신념과 소명이 필요할 것이다. 인문적 영감과 과학적 이해력, 신념과 책임의 윤리, 나와 세상, 이 모든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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