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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서른 살
멜리사 뱅크 지음, 심혜경 옮김 / 예문 / 2010년 10월
평점 :
* 제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 이웃 블로거님의 리뷰입인데 허락을 받고 대신 올려드립니다. 멜리사 뱅크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글이라서요.. ^^
지난 주 내내 감당하기 버거운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책들 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이다 오늘 모처럼 소설을 읽었다. 내 블로그 이웃님이 번역하신 소설이다. 첫 번역 작품이라고 하는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번역이라 번역 데뷔작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빠진 문장들이다. 제목은 < 서툰 서른 살>. 굳이 쟝르를 따진다면 90년대 중반무렵 영국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2-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주로 다루는 칙릿 소설 장르에 속한다. 아마 <내 남자는 바람둥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으신지 모르겠다.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인데, 원제는 <The girls' guide to hunting and fishing > 라는, 톡톡 튀는 제목을 갖고 있다. 오랜만에 이야기가 있는 소설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아, 이런게 소설이지, 하는 생각에 혼자 웃음을 짓고 말았다.
작가는 멜리사 뱅크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소설은 그녀가 2000년에 발표한 첫 데뷔작인 셈인데, 첫 데뷔작에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행운을 얻었다. 그럴만큼 이 소설이 미국 젊은 여성들의 감수성을 찌릿하게 건드렸다는 얘기이리라. 그래, 미혼 남녀의 가장 큰 관심이 무언가. 노골적으로 말하면 짝짓기요, 고상하게 말하면 사랑의 문제가 아니던가. 학교에선 인생에 관한 건 전혀 배우지 못하니, 대학을 졸업해도 인생 문제에 관해선 그저 왕초보 운전자마냥 서툴기 짝이 없고 좌충우돌하게 마련 아닌가. 일에서나 사랑과 연애에서나, 어느 것 하나 막상 부딪치면 만만한게 없게 마련이고, 그래서 의도와 목표와는 다르게 사태가 제멋대로 꼬여버리게 마련인 것.
도대체,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타인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것이며, 거기에 골치 아픈 사랑이라는 문제까지 곁들여지면 이런 문제들이란, 내가 요즘 빠져 길을 잃고 있는 <시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알쏭달쏭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문제들 투성이인, 말 그대로 '지뢰밭' 같은 어떤 것이 아닌가.
그럴 땐, 차라리 이 책의 원래 제목처럼, 이성을 '제대로' 사냥하거나 낚을 수 있는 가이드북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소설이, 문학이 그나마 간접적인 인생학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인생 가이드북 역할을 해 줄 '수도 ' 있다는 것 아닌가. 나도 어린시절부터, 아니 대학시절부터라도 열심히 연애소설이라도 읽었더라면 사태가 조금 더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철학책은, 폼만 거창하게 잡을 뿐, 실제 세상살이엔 그닥. 아, 그래, 대학 1학년 때,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견하곤 아하, 나는 잠시 그 책이 오비디우스가 쓴 <연애론>처럼 작업기술에 관한 책인 줄 알고 읽다간 집어던졌더랬다.
이 소설에, 주인공 제인이 14살 시절이던 때, 막 청년이 된 오빠가 여덟 살 연상이 처자를 여름 별장에 데려왔을 때 주인공에게 한 대목 인용해준 프로이트의 <문명속의 불만> 에 나오는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박장대소했다.
" 들어봐,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지. '젊은이들에게 섹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사회로 내보내는 건 극지탐험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여름옷을 입히고 이탈리아의 호수 지도를 챙겨주는 것과 같다."
백 번 맞는 말이지. 아직 어떤 고도한 문명도 그걸 제대로 가르쳐 주는 문명은 없다. 그래서 주인공 제인도 서른이 되도록 여전히 사랑법을 몸소 겪으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선 주인공 제인이 만나는 세 남자가 나온다. 오빠의 사랑 이야기를 포함하면 네가지가 되겠다. 달콤 섹시하지만 철이 덜 든 남자, 스물 여덟 살이나 연상인 중년남이지만 여전히 치명적인 매력도를 가진 남자 - 이 이야기가 <내 남자는 바람둥이>의 이야기다 - 그리고 친구 결혼식장에서 한눈에 반해버린 만화가 남자.
세번째 남자에 빠진 주인공은 결국 친구가 소개해 준 '끔찍한 책'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법>이란 책을 읽기까지 하면서 이번에야말로 한번 제대로 해보리라 작심한다. 소설은 이 세번째 남자와 어디까지 진도가 나가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든 시작은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 같지만, 이후는 글쎄,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일이다.
쉽게 읽히는 문장, 간간히 보여주는 재치있는 표현의 미덕도 있지만 이런 소설의 승부수란 결국 이야기 자체의 힘에 있는 법, 이런저런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고, 죽네사네 하다간 이별하고, 그러다간 또 다른 사랑에 빠지고 하면서 우리는 인생과 사랑을 배워가는 것, 젊은 여성 독자들이 이런 재치 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을 느끼고,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는 듯 스스로의 연애방식을 되돌아 볼 수 있으면 이 소설은 충분한 값어치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로선, 기왕에 연애와 사랑을 테마로 다룬다면 주인공 여성의 나름의 비평과 분석도 조금 더 들어갔더라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세 가지 이야기 이상으로 더 풍부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어쩌면 작가는 그런 것조차 군더더기로 여겨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데만 주력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세상 어딘가엔 그야말로 사랑의 대가라고 불릴만한 그런 대가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에 속하는 우리는 사랑법에 관한 한, 늘 서툰 초보나 다름 없다. 도대체 서른 살에도 서툴면, 언제나 숙련된 배관공처럼 숙련된 연인이 된단 말인가? 사랑도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늘 움직이는 무엇인지라, 인간만사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의 기술이고,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게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조물주는 왜 이런 문제까지 좀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못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차라리 간단하게 생식만 하게 만들어놓던지. 하긴 사랑이 '비의' 에 속하는 신비롭고 까다롭고 어려운게 아니었더라면, 소설을 비롯한 인간의 문화적 삶도 참으로 허허롭기 짝이 없었을 터이다. 다른 독자들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숙련도를 남몰래 측정해보게 되려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