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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 사이행성에서 서평 이벤트로 우선 선보인 책이다.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받고 읽은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쓴다.
나쁜 페미니스트 책에서 록산 게이는 여러 번, 인종적 다양성이나 다양한 캐릭터의 여성이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아쉬워했던 바 있다. 감정이입하거나 내 편이라고 응원 보낼 수 있는 선한 인물, 주변인으로서 기능하는 그런 수동적인 여성캐릭터가 아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스스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주도적으로 살아나가는 생동감있는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고. 나 역시 상당히 동감했던 이야기였고. 오래도록 그런 캐릭터를 보는 것에 굶주려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심지어 인간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할 줄도 아는, 신체적 정신적 먼치킨 사이코패스 여성 캐릭터가 요즘 좀 땡긴다. 록산 게이가 그런 캐릭터의 대표적인 예로 '나를 찾아줘'의 여주를 꼽기도 했지만 영드 '루터'나 영화 '미스 슬로운' 속 여주 캐릭터들이 딱 취향에 가까웠는데...쨌든.)
이 책은 확실히 그런 불평을 가진 사람이 쓸만한 책인 듯.
책을 펼치면 단편이랄까 소고랄까..여러 편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어려운' 여자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끔찍한 고통을 겪고 난 후 생존해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택할 수 있는 차악을 택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가며 살아남은, 꺾이지 않는 여자들(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어떻게)이 있는가 하면, 선천적으로 주어진 초월적인 특성 탓에 함께하기 버거운 여자들-함께 하기 버겁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달아난 남자들의 비겁한 변명일수도 있겠지만 쨌든(물, 그 엄청난 무게/유리심장을 위한 레퀴엠) 그런 여자들도 있고. 팜므파탈이라고 불릴만한 놀랄만치 요염하고 위험천만한 여자도 등장한다(나쁜 신부). 삶을 뒤흔드는 트라우마를 겪고도 영혼의 동반자라 할만한 이와 그 날것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며 스스로를 벼리는 여자가 등장하는 한편(나는 칼이다), 트라우마 탓에 순정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최악의 남자들만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마는, 마음을 얻기 어려운 여리디 여린 여자도 있다.(이방의 신들)
개중 책의 타이틀이 되는 단편, '어려운 여자들'은. 단편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머리 속 소고를 그대로 옮긴 듯한 거친 이야기인데, 여자들의 의사와 관계 없이 덧씌워지는 이미지에 대한 소고랄까. '헤픈 여자' 라든가 '미친 여자', '불감증에 걸린 여자' 라든가 '어머니'. '죽은 처녀' 같은 것들. 기대가 덧씌워지거나 기대를 벗어버리고 낙인이 찍힌 여자들의 입장에서 그들 자신은 어떤지. 어떤 생각에서 그네들은 사회의 기대를 져버리는지. 결국 낙인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일반화의 고리는 어떤 식으로 우스꽝스럽게 걸쳐지는 것일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타이틀작 답게.
작가가 그려낸 어려운 여자들을 그렇게 다 만나고 나면. 결국 작가 록산 게이가 전부터 이야기해왔듯이, '어려운' 여자들이란 타자화된 시선을 염두에 둔 명칭이라는 게 분명해진달까. 그냥 여기저기 있을법한, 이런저런 여자들의 이야기들일 뿐. 우리가 진짜 보고 싶어하는 그런 보통 사람으로서 살아 숨쉬는 여자들.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록산 게이 본인이 겪은 삶의 고통과 극복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작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인물들이 겪는 고통들, 트라우마를 응시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태도, 갈등. 이런 것들.
삶을 뒤흔들만한 고통 뒤에도 그 여파가 계속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자신과 관계 없이 덧씌워지는 라벨을 의식하지 않기 힘든 입장에서 울부짖고 무너졌다가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벼리고 올곧게 직시하며 살아가고자 한 흔적이 아닐까 싶고.
나도 싫든 좋든 생겨난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입장이고, 미리 가정하고 두려워하고 자기검열하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작가의 분신-혹은 그 여자들에게 공감해서 그래 뭐 배째라 어쩔래 하고 싶어지거나. 툴툴대고 싶어지거나. 안타까워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했던 듯.
책 자체에 대해서는 좀 아쉬움이 있다. 적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좀 급하게 나온 듯한,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느낌이 강해서. 비슷비슷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정교하게 갖춰진 환경에서 보다 복잡한 스토리를 갖고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기대했어서. 정교한 유화를 기대했는데 대강의 동세선만 휘갈겨 놓은 크로키같달까. 기대보다는 좀 실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