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 이슈가 계속 불거지는 요즘, 덕분에 읽을 거리가 참 많아졌다고 느낌. 우에노 치즈코 이야기는 자주 접했고,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라 읽어보겠다고 샀다. 

'결혼제국'의 이야기와 많이 겹치는 내용도 있고 한데, 좀 논문스럽게 딱딱한 면도 있고 내 입장에서는 너무 깊이 들어간다 싶은 면도 있어서(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싶지는 않은데..일본신화 속의 여성혐오적 텍스트라..)적당히 흘려 읽을 부분은 흘려 읽음. 기억나는 몇 가지만 거칠게 기록함.

------

어머니와 딸의 갈등에 대해 조망한 부분.

이건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얘기기도 한데. 아무튼 인상적. 시대가 변하고 여성 역시 사회진출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어머니들은 딸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한다는 것. 아들처럼 출세해서 좋은 직업-아직 유리천장도 있으니 조직적인 회사보다는 고소득 자영업직을 구하기를 바라는 한편, 딸로서 좋은 혼처로 시집가서 여성으로서의 가치증명(어쩌면 어머니의 위신을 세워주는 제2의 인생?)을 해 주기도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후 역시 며느리보다 딸이 돌봐주기를 더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아들보다는 딸을 더 원한다는 말들이 별로 달갑지 않은 게 어렴풋이 이런 것들을 감지하고 있던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음.. 아무튼 태어날 때부터 선별당하던 것 보다 나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딸들이 요구받는 것들이 과거에 비해 늘어난 것은 맞는 듯. 주부가 요구받는 것들이 많아진 것과 마찬가지. 남성과 다름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존재로서나..돌봄을 행하는 여성으로서 동시에 기대를 짊어지게 된 것.


남성의 존재증명과 연애

예로부터, 진정한 남성으로서 남성공동체에게 인정받는 것이 남성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인정을 받기 위한 자격요건 중 하나가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었고. 여성을 소유하는 것, 여성과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것이 그래서 남성들에게는 중요해진다. 예전에는 남성공동체의 위계질서를 지키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던 여성이, 혹은 중매를 통해 어떻게든 얻어지던 여성이 구하기 어려워지고,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측면이 생기면서 아직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 남성들이 '경제적으로나 외모적으로 딸려서 연애시장에서 인기 없는 남성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혹은 '여성들이 따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기적이다'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일본에서도 자주 있었다. 경제적으로, 외모적으로 딸리는 여성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이슈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여성 역시 오랜 세월동안, 결혼을 통해 남성으로부터 선택받고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증명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남성의 선택을 놓고 경쟁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여학교 내 문화와 같은 여성들간의 문화는 양성이 섞여 있는 곳의 문화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은 또 달라지는 추세가 있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남성들은 소유하기 적합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만만한 여성을 더 선호하고, 여성들은 빼어난 외모보다는 수더분한 외모의, 털털하고 자조적인 농담을 하는 여성들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던 것이 사실.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90년대 화제가 되었던 사건. 당대 처음으로 여성 역시 앨리트 코스를 밟는 것이 가능해진 세대. 그녀는 왜 억대 연봉을 받는 조직의 핵심, 엘리트였음에도 밤거리를 쏘다니며 헐값에 몸을 팔았는가. 그에 대해 여러 르포와 소설과 추측이 난무했지만, 우에노치즈코는 사건을 뒤집어 생각해보려 한다. 엘리트코스를 처음 뚫은 여성에 대한 세간의 어마어마한 기대와 거기서 오는 책임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들의 자리 중 '여성에게 허락된 자리'만을 얻을 수 있었던, 일반적은 OL과 다르다고 분류되었으나 실제로 모호한 대접을 받던, 결혼시장에서는 꺼려지는 존재가 되었던 여자. 저자는 그녀가 남성들이 꾸려놓은 여성혐오적인 사회의 스트레스로 인해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느린 자살과도 같은 상태였으며, 매춘을 통해 남성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헐값, 또는 무료로 남성들을 받아들이고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메모한 것은 것은 그녀 역시 그 남성들의 가치를 그렇게 매겼다는 것. 여성을 인위적으로 자신보다 낮추지 않으면/혹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 이상 소유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얻지도, 욕구해소를 보장받을 수도 없는 미약한 존재인 남성들의 모순을 자해의 방식으로 비웃은 것이라는 것이다.

(앞장에서 원조교제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다루고 있었다. 남성들이 너무도 원하기에 값이 뛴 어린 육체를, 스스로 매춘이라는 방식으로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자해의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세상에 복수하는 방식을 취하는 여자아이들이 많다고)


오랜 여성혐오의 역사

일본 신화에서, 이런저런 일본문학작품들에서, 춘화 우키요에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천황가의 대 잇기 풍습에서, 드라마 속 대사에서 등등. 남성중심적인 공동체 구성의 역사, 성녀-어머니-부인(가부장제속의 여성)거나 창녀-미혼여성-애인(가부장제밖의 여성)로서 갈라지며 끊임없이 정형화된 객체로서만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끊임없이 엿볼 수 있고..최근에도 '나는 아니니까' 라며 일부의 여성들을 타킷화 하여 악녀로 그려내고 전락시키는 류의 여성작가 문학작품이 화제가 되는 등 남성에 의한, 여성 자신에 의한 여성혐오는 뿌리 깊은 역사를 다져온 바 있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고, 그를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 저자의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혼제국 - 결혼이 지배하는 사회 여자들의 성과 사랑
노부타 사요코 외 지음, 정선철 옮김 / 이매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쯤에 나온 책이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결혼하지 않은 30대 여성들이 사회현상화 하던 때였던 듯. 그를 바라보는 두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노부타 사요코의 대담집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최근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저서가 재조명되면서 한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회학자인데, 이번에 도서관에서

 검색하니 우에노 치즈코 관련 서적이 이 책 밖에 없어서 일단 빌려 읽었다.

------

여성들을 돕는 심리상담센터를 오랜 시간 운영해 온 노부타 사요코와, 페미니즘 저서로 유명한 우에노 치즈코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둘러싼 사회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나누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방식. 

30대 비혼 여성들은 왜 비혼으로 남았는가, 성과 사랑에 대한 그들의 사고체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무엇이 그들을 비혼으로 이끄는가, 비정규직 비혼 30대 여성,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당시 일본에서) 그들을 끼고 사는 일본의 베이비부머들, 부모세대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뿐만 아니라 결혼을 둘러싸고 사회에서는 어떤 성역할을 양성에게 밀어붙이고 있는가-여자들은 결혼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여성들을 혐오하는 남성들은 왜 나타나는가, 폭력적인 결혼생활을 접지 못하는 여자들은 왜 그런가, 등등에 대해 의논한다.

그런대로 흥미롭다. 

-----

이 책 이후에 읽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겹쳐지는 감이 있기는 한데, 몇 가지 추려보면 이런 얘기들이 나옴. (나머지 주제들은 잘 기억이 안 나서 못 적겠다.)


-남성이 진정한 남성이 되려면? 연애 못하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

남성들을 진정한 남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실은 여성이 아니고 남성공동체이며, 남성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 일종의 자격조건 같은 것으로 굳어져 왔음. 실상 오래 전부터 남성공동체의 서열에 맞춰 여성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었고, 중매결혼이 있던 시기까지는 남성들이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대부분 결혼하여 아내를 소유하고, 번듯한 남성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음. /여성을 소유하지 못한 남성, 동성애자 남성들은 진정한 남성이 아닌, 여자 같은 존재로 배척당하며, 연애하지 못한 분노를 일부 남성들이 폭력이나 분노로 표출하는 것은 이런 연유. 그들은 여전히 여성을 일종의 배부받는 자원 정도로 여기고 있음./ 연애하지 못하는 남성들(경제적으로, 외모적으로 등등 경쟁에서 밀리는)을 사회적으로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이 일본에서도 수십년 전부터 이슈를 불러 일으킨 바 있었으나, 저자는 여성의 경우 이슈조차 되지 못하던 사안이지 않으냐, 아직 선택받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며..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느냐고 제안.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여성혐오

남성에게는 여성 그 자체보다도 남성공동체의 인정이 더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또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여성이 불가피하게, 수단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여성을 남성과 대등한 관계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여성혐오.


-30대 비혼, 비정규직 여성을 바라보는 대담자들의 시각 -부정적인 듯.

보수적인 성 관념과 자유로운 성 관념 사이에 낀 세대. 결혼이 꼭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 세대. 30대 비혼 비정규직 여성의 경우 경제적으로 부를 쌓은 베이비 부머 부모와 함께 안락한 한 때를 보낼 수 있을는지 몰라도, 부모의 부가 끊기고 더 이상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버틸 수 없게 되면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일본에서는 비혼 자녀가 고령의 부모를 맡아 개호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복지의 하위계급으로서 배척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 일본의 비정규직 비혼 여성 30대(당시)들은 결혼 전의 유예로서 비혼을 택하는 경향이 있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는 상태이기에 위험. 베이비부머들은 이런 상태를 두고보고 있는데, 딸이 자신들의 뒷날을 개호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이기도 함(현 2,30대 한국의 비혼여성들과는 다른 듯)


-결혼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

남성은 결혼을 통해 남성공동체로부터 번듯한 자격을 갖춘 진정한 남성으로서 인정받게 됨. 여성의 경우 남성으로부터 선택받음으로써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게 됨. 어떤 조건의 남성과 결혼하였는가는 여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척도로 분류되기도. 여성이 이런 '여성으로서의 가치증명'을 남성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부여받고자 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롭게 비혼을 택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음.


-결혼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유

결혼을 '자신의 선택' 이라고 여기고, 남편을 '자신이 선택한 남자'로 '내가 없으면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음. 일종의 자존심. 이런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의 불행한 결혼에서 벗어나면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자립하지 못한 상태의, 초라한 중년 여성'으로 남는 것이 두려운 탓에, 가정을 책임지고 꾸려나가는 가정 주부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함.

(학습된 무기력 이론과는 또 다른 이야기라 신선한 감도 있음.)

-----


20, 30대 비혼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것도 컸는데, 대담에서 다룬 수십 년 전의 일본 상황은 현재와는 좀 맥락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아쉬움이 컸다.

최근의 여성들은 이 대담집 속에서처럼 부모가 지닌 부의 그늘 아래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미래에 대한 대책 없이 결혼 전의 유예로서 비혼을 한다기보다,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비혼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현재와 노후를 대비하고자 하는 흐름이 더 크다고 보는데 말이다. 

반면 결혼과 관련된 화두는 꽤 흥미롭게 읽었다. 연애나 결혼을 통해 두 성은 어떤 것을 노리는가-말이다. 진정한 남성이 되는 자격조건을 얻기 위해, 진정한 여성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는 것. 사회 속에 녹아들고, 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 두 대담자는 당시 그런 수동적인 인정받기는 필요없다고 외치는 비혼자가 참 드물거라고 아쉬워했지만, 요즘을 보면 인정따위 없어도 된다고 외치는 자유로운 비혼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체파리의 비법 팁트리 주니어 걸작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이수현 옮김 / 아작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70년대에 SF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시니컬하고 이지적인 건조한 문체. 군대복무경험. 아프리카를 비롯한 각국에서의 풍부한 경험. 과학적 지식. 여성의 몸에 대한 욕망. 그의 소설을 읽은 많은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페미니즘 메시지에 열광했다고. 하지만 누구도 그가 남성의 가면을 쓴 여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후, 70년대 SF문학계는 아직도 팁트리 쇼크라고 일컬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체체파리의 비법을 비롯해서 이 책에 실린 많은 단편들이 아포칼립스 삘이고, 디스토피아스럽다. 남성들의 성충동과 공격성을 이용해서 인류를 거세시켜버린 외계인들(체체파리의 비법). 의도치 않은 타임슬립으로 남성이 멸종한 미래세계와 조우한 우주비행사들(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스스로 건실한 남성을 선택하여 임신하고는 남초세계의 중심에서 당당히 프로로서 살아가다가, 유리천장과 여성혐오에 질린 나머지 외계인과 접선하여 지구를 뜨는 모녀(보이지 않는 여자들). 외모지상주의 세계의 밑바닥에서 구르다 PPL을 위한 아바타와 연결되어 신세계를 접하는 소녀의 사랑(접속된 소녀). 과밀된 지구를 벗어나 인류가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던 와중, 어마어마한 사실에 직면하고는 괴멸되어 버리는 마지막 탐험대(덧없는 존재감). 우주와의 일체를 갈망하며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강'으로 향하고 이제 몇 남지 않은 지구에서, 그 역시 외계의 지식과 평온함에 녹아들기 위해 강으로 향하던 와중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소녀와 만난 소년(비애곡). 숲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 미쳐버린 천재 생물과학자(아인박사의 마지막 비행).

개중에는 초기 진입 허들이 좀 높은 단편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흥미롭게 읽었다. 지금보다 여권이 열악했을 70년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나무랄 것 없는 교육을 받고. 뛰어난 두뇌로 CIA나 전투기 조종사, 군 정보원, 실험 심리학 박사 등으로 일하면서 그가 남초에서 겪었을 갑갑함, 좌절, 회의 같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느낌. 실제로 업무 중에 받은 스트레스를 글을 쓰는 것으로 해소했다고. 

'죽어라! 이 희망없는 개떡같은 인류!'
'걍 여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너희만 남지 그래?'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여자들만 남아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어떻게 굴러갈까?'
'이 외모지상주의가 과학기술과 접합하면 어디까지 천박해질 수 있는지 보자'

같은..속내가 들리는 듯도. 다만. 개인적인 분풀이로 치부하기에는 글 안에 녹아들어간 메시지나 아이디어들이 신랄한만큼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고 탁월하다는 느낌. 그 점을 인정하듯, 당시 네뷸러, 휴고 수상작이나 노미네이트 된 작품들이 대거 있다.
이런 남자가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많은 70년대 여자들이 위안을 받았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소외되는 소수자의 입장에 서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듯.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에 나오는 루퍼스도. 더 나은 세계에 대해 보여주고, 끊임없이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던 미래인을 곁에 두고서도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비틀려고만 하지 정말로 노예들의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진 못했더랬고. 당장 요즘 페미니즘 이슈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봐도..

남성들의 공감능력은 태생적으로 그 평균이 여자들에 비해 낮다고 하는데, 공감능력이 충분히 길러질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서천석 샘의 우리아이 괜찮아요 라됴에서 그러더라)...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그닥 공감능력을 발달시킬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같음. 소설이나 영화가 공감능력을 키우기에 좋은 도구라고 하지만, 요즘 영화에 여자배우가 얼마나 나오나? 소수자가 얼마나 주인공이 되나? 한국소설 여험 어떤가? 드라마에서 강간 소재를 얼마나 자주 써먹나? 멋진 남자들이 한다는 터프한 행동들은 또 어떤가?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굳이 공감 안 해도 아직은 잘 살아갈만한 세상이다. 견디다 못한 한 쪽이 요즘 공감결여자들과 연애와 결혼에 보이콧을 하니 좀 시끄러워질 뿐. 그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가면을 쓴 시절, 편지로만 소통했다고 하는데, 가장 친밀했던 작가가 어슐러 르 귄이었다고. 르 귄 여사 역시 '어둠의 왼손' 같이 성에 대한 사고실험을 여럿 했던 작가기도 해서 어느 정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가 싶다. 가면을 벗고 나서 나눴다는 글, 르 귄의 소회를 보면 씁쓸하기도 하고. 훈훈하기도 하고.

가면을 벗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르 귄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글을 이해해주지는 못하지만 부인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좋아해주고 이해해주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고 썼다고 한다.
그러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아니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의 남편은 알츠하이머로 오래 고생했고. 앨리스는 오랜기간 소설에서 멀어져 남편을 간호했다고. 남편이 시력을 상실하게 되자 좌절하게 된 그녀는 산탄총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었다 한다. 아들은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바로 죽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여겼다'고 회상했다는데. 
작가 이력과 소설에서 읽히는 그녀의 삶. 당시의 여권. 희귀하게도 그녀를 존중해주는 남편. 그 사랑과 절망. 

이 책의 속지부터 소설과 해설까지를 주욱 읽어 나가는 것은 뭔가..참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경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외 옮김 / 아작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뒷표지에 페미니즘 SF, 라고 크게 적혀있다. 나야 망설이지 않고 질렀지만.
최근 인터넷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여성들만 페미니즘 서적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할 때가 있다.
작품들에 대한 인상은 "체체파리의 비법"과 비슷한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듯.

희망에 찬 아기자기하고 씩씩한 모험, 지난하고 고통에 찬 저항, 끝까지 쥐고 가고자 하는 굳은 신념, 고아한 정신들이 그저 오래 기억되지 못할 숭고한 한 때로 스러져 가는 허무. 인간에 대한 조소, 비참, 절망. 그런 정서가 담긴 단편들이랄까. ㅎㅎㅎ

아주 매력적이다. 묘하게 공감하고,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삶을 종종 비극적으로 보게 되곤 하는 입장이라면 상당히 매저틱하게 즐거울 것이라고 확신함.

-----------------------

-보이지 않는 여자들-
"밤중에 나다니는 여자들은 미친 거지. 왜 밤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는거야."
..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이자 자기파괴적인 단편?ㅋㅋㅋㅋ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작가는 "그래. 밤에 다니는 미친 여자를 그려볼까." 그랬을까?
근데 미친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가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지 보면..
왜 밤에 두려움에 떨고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지.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아 짐. ㅎㅎㅎ

------------------------

-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길을 따라 여기에 왔네-

강렬한 허무감. 아주 인상적이었음. 
삽질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맞이하는 발견과 발전의 역사?를 시사할 수도 있겠고. 과학적인 것, 기계에 대한 맹적인 신뢰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굉장한 단편이었음.

--------------------------

-그녀의 연기는 언제까지나 올라갔다-

윤회와 영겁의 고통..뭐 그런 게 생각나지 않나?

--------------------------

-어느 마지막 오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을 두 개로 나누어 출간한 거라고 봤는데. 이 단편선-체체파리의 비법+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흐르는 정서를 보면. 작가가 인류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고, 진화하는 일련의 과정-특히, 남성이라는 주류가 이루어가는 목적지향적, 번식지향적, 파괴지향적, 약육강식적인 역사를 일종의 동물종의 번성과 사멸의 번복으로 바라보는 듯한. 역겨움과 조소, 허무..랄까 진저리 같은 것들이 강하게 느껴지는 단편들이 여럿 있다. 아니..대체로 모든 단편에 담겨 있는 느낌.

--------------------------

-그리고 깨어나 보니 나는 이 차가운 언덕에 있었네-


전 번역단편선 <체체파리의 비법> 중 "덧없는 존재감"과 비슷한 느낌. ?ㅋ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디터D 2017-09-1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SF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는데 발췌글 보니 전체내용이 궁금해집니다.
리뷰를 보니 <체체파리의 비법>도 함께 읽어야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삼체 : 2부 암흑의 숲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단숨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래는 기억을 돕기 위해 남기는 시작~결말까지의 줄거리.)


삼부작의 두 번째. 

인간에 대한 모든 기대를 잃은 예원제가, 생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냉혈한 삼체인들을 태양 안테나를 통한 통신으로 불러들이고, 인류가 우주로 나가기 위한 기술발전을 지탱해 줄 기초물리학을 삼체인들이 지자들이 미리 보내 봉쇄한 이후의 이야기다. 

대충 네 흐름으로 나눌 수 있으려나.




하나는, 면벽 프로젝트의 발족.

인류는 생존을 전전긍긍 물색하기 시작하고, 절망적인 가운데 삼체인들이 보통, 숨겨진 의도를 읽어내는 기술이 더럽게 없음을 바탕으로 전복을 꾀한다. 전세계적으로 뛰어난 몇몇을 물색, '면벽자'라 칭하며 그들이 머릿속으로 은밀히 계획한 생존방안을 제한없이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 그것.

그러자 삼체인들도 지구인 추종자들을 파벽자로서 내세워 면벽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시작한다. 


한편, 군에서는 우주전쟁을 염두에 두고 개편이 이루어진다. 군 내에서 심리적 무력감이 위험할 정도로 확산되는 중이나, 단 한 사람, 삼체인과의 교전에서 확고한 승리를 확신하는 젊은 장교, 장베이하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두 번째. 면벽 프로젝트의 무력화와 동면.

면벽 프로젝트는 세 가지가 발족되었으나 단 하나를 제외하고 파벽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된다. 심리적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멘털 스탬프, 우주전에 대비한 항성형 수소폭탄. 이것들을 고안한 면벽자들이 파벽자에 의해, 그들이 실상 완전한 패배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이나 동귀어진을 고안해 내었다는 의도를 발각당한 것.

파벽되지 않은 단 하나의 면벽자는 중국인 뤄지로, 그 자신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는 인물. 삼체인들이 지정한 파벽자 역시 '뤄지 자신'이다. 뤄지는 한때 예원제로부터 우주사회학을 전공해 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희한하게도 지자들이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UN이 확인하게 된 탓에 면벽자가 된 케이스. 

면벽자 지정 이후 독특하게도 은자적이고 사치스런 행보를 보인 탓에 무시당하고 비난받던 차였으나(걍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면벽자 예산으로 이쁜 마누라 얻어 토끼같은 내새끼와 그림같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듯한, 실제로 그런 의도였음) 일이 이렇게 되자 UN 측에서는 그의 가족들을 강제동면시키고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대책을 내 놓으라고 그를 닦달한다.

뤄지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안을 물색. 과거 예원제와 만나 우주사회학에 대해 논했던 것에서 착안해 그가 내놓은 마지막 대안은 황당하게도 '저주'인데, 구체적으로는 187J3X1 항성이 거느린 행성들을 향해 안테나로 저주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저주가 실현된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시기까지 그는 동면에 들어가기로 한다.


한편, 우주군 소속 장베이하이는 수백 년 후 삼체인들과 맞닥뜨릴 우주함대의 추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후지기 짝이 없는 로켓이론에 집착하던 늙다리 학자 몇을 은밀하게 암살한다.


마땅한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뤄지와 장베이하이를 비롯한 많은 인구가 동면을 선택한다. 기초과학은 새로운 발견이 없는 상황이지만, 기존의 이론에 기대어 지구궤도 엘리베이터가 착착 건설에 들어간다.




세 번째는 삼체인의 침공.

동면 직전에 삼체세계로부터 유전자 조작 독감으로 공격받아 죽다 살아난 뤄지가 동면에서 깨어나, 삼체인의 침공을 몇 년 앞두지 않은 미래. 

인류의 대부분은 침공에 대비하여 지하를 거점으로 생활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얼핏 굉장해 보인다. 동면에서 깨어난 이들은 적응하지 못한 채 황량하게 버려지다시피 한 지상에 거주하는 한편, 기존의 우주군은 병력도 규모도 국가급으로 상당히 거대화된 상태로 지구 궤도에 진을 치고 있는 중. 많은 지구인들이 삼체인들을 능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낙관적인 상황.


그러나 최첨단 안테나를 통해 삼체인들의 우주 함대가 태양계 해왕성 근처의 우주 진운을 흐트러뜨리고 태양계에 돌입한 흔적을 발견해내고, 삼체인들이 보낸 은빛의 물체가 당도한 이후, 그 낙관은 깨져버린다. 지구의 기술은 지자에 가로막힌 이후 가능한 한계 내에서 최절정에 달하였으나 삼체인들의 기술은 그를 아득히 능가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을 반사하면서도 아무리 확대해도 매끄러움을 유지하는 표면을 지닌, 지구기술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을 은빛 물체. 그 물방울을 닮은 물체는 기존 물리법칙을 무시한 움직임과 속력으로, 도열해 있던 우주함대열을 관통해서는 우주함대 전체를 괴멸시켜 버린다. 

개중 단 세 대의 우주선만이 탈출에 성공하는데, 그를 이끄는 것은 과거에 완전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완전패퇴를 확신한 상태로 동면에 들었다가 깨어난 장베이하이다. 현 우주군의 추진력을 향상시키고자 과거 암살까지 강행했던 것은 추적이 아닌 줄행랑을 위한 것이었던 셈. 


삼체인들의 공격을 최대한의 속력으로 피해 달아난 우주선 셋은 사실상 완전히 지구로부터 떨어져나온 새로운 인류가 되었으며,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타 은하계의 행성을 향해 대를 이어가며 생존을 위한 가망없는 비행을 하게 된다. 그마저도 연료 부족과 부품 노화로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직면하자, 장베이하이는 우주선 한 대만을 남겨 생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자폭을 택한다.




네 번째. 뤄지의 계략.

지구에서는 종말을 앞둔 혼란으로 엉망이다. 

뤄지는 동면에서 깨어난 이후 끊임없이 지자와 삼체 추종인들의 암살시도를 겪던 차에, 과거의 저주가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로써 그는 급작스레 마지막 희망으로 부상하고, 면백프로젝트는 오랜 텀을 깨고 재개된다. 

그러나 뤄지는 이후 해왕성 근처에 있던 우주진운과 유사한 인공 우주진운을 만들어내는 설원프로젝트에 오래도록 관여하는데, 당장의 구원을 바라던 많은 이들은 이 행보에 급속히 실망하게 되고, 그는 경멸당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원제의 무덤을 찾아 그곳에서 삼체세계와의 1대1 협상에 돌입하고, 심지어 성공하기까지 하는데, 예전에 성사된 그의 저주를 삼체세계로 옮기겠다고 협박한 덕분이다.

설원 프로젝트로 그림 형태의 진운을 만들어 삼체세계와 태양계를 우주에 폭로하겠다는 것. 


과거 예원제는 우주사회학의 공리에 대해 뤄지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첫 번째-생존. 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두 번째-기술폭발.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하다.


예원제의 공리를 바탕으로 그가 도출해낸 것은 암흑 숲 속에 적대적인 사냥꾼들이 서로를 불안해하며 우글거리듯, 우주 또한 매한가지 양상이라는 것.

발달한 문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상대가 자신에게 우호적일지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서로 불안해하고, 지금은 원시적인 문명일지라도 금세 기술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키는 상황이 드물지 않다 보니 더더욱 나 아닌 타 문명은 위협적인 존재이며, 때문에 상대의 위치를 알게 되면 무조건 쏴 죽이려는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저주로 위치를 노출시킨 187J3X1 항성계가 소멸한 것도 그 때문인 것.


삼체세계가 태양계와 함께 자멸하고 싶지 않다면, 위치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뤄지는 자신의 심장과 그림 진운을 일으키는 항성급 수소폭탄을 연결해서 자살협박을 했고, 성공했다. 이로써 삼체세계와 태양계의 지구는 서로 운명을 같이 하는 협정을 맺게 되었고, 지자의 감시는 사라지고 과학기술을 전수받게 되었다. 당분간은 평화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뤄지 역시 가족들과 재회해서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동맹이 된 삼체세계와 그가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주라는 암흑의 숲에 햇빛이 비치는 것이다. 서로를 불신하고 당장 파괴해야 할 위협으로 간주하는 현 상황에, 사랑과 신뢰를 싹틔울 수 있게끔 모험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