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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모니카
황보윤 지음 / 도서출판바람꽃 / 2018년 11월
평점 :
2000년 왕가위 감독은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영화는 세기말의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면서도 밀레니엄의 희망을 ‘결별’의 의미로 보여준다. 낡고 오래 묵어서라기보다 오히려 새것 같아서 받아들이기 힘든 ‘인연’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심리를 ‘결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선택하도록 한다.
황보윤의 <모니카, 모니카>는 인간내면의 근원성을 한 편의 영화처럼, 혹은 밀도 있는 저녁식사처럼, 저마다 깊고 끈기 있는 서사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집은 일곱 편의 길거나 짧은 소설로 구성돼 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각각의 소설에는 작가 특유의 부드러운 서정성이 담겨 있다. 단순하지 않으면서 복잡하지도 않은 소설마다의 서사는 독립 영화를 보듯 인생에 관한 은근한 무게감이 감지된다. 단편적이면서도 볼륨 있는 묘사는 각각의 소설마다 치밀한 작가정신으로 발휘된다.
표제작 「모니카, 모니카」는 연극과 현실이 교묘히 연결된 소설이다. 도입이 무대 텍스트로 채워진 가상현실이라면, 여기에서 연루된 소설 텍스트는 무대를 반영(反影)하는 현실로 기능한다. 이 절묘한 대칭과 극적 효과는 현실과 현실 저편을 동시에 바라보도록 한다. 연극이라는 가상현실과 소설 텍스트의 교묘한 이음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지만,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은수는 모니카에 대한 소문이 활활 타오르다가 점차 사그라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모니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은수는 복잡한 내면을 감추고 있는 아름다운 그 애의 얼굴이 좋았다. 그러나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 「모니카, 모니카」 13쪽 -
모니카는 연극 무대에도 소설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은수의 눈에 비친 모니카는 ‘십팔 세 소녀’일 뿐이다. 노래를 부를 때 그나마 존재감이 드러나는 조용한 아이이다. 그럼에도 ‘복잡한 내면’을 감춘 모니카는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모두를 관망하고 세계를 아우르는 인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은수의 현실에 직면한 모니카는 실재하는 아이임에도 마치 홀로그램을 보여주듯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두근거리는 매혹과 의문을 남긴다.
연극과 소설.
이중적 텍스트 설정은 현대 소설의 배타성에 대한 작가의 동의이자 비판이다. 소설 「모니카, 모니카」는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기반 자체가 연극이며, 세상은 그저 희극의 무대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홍안」은 앞의 「모니카, 모니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도 그 지향점은 존재의 증명에서 동질한 주제의식이 감지된다. 정가의 절반 가격에 구입한 중고 노트북 속 세 번째 ‘사진’의 주인공을 찾아 시간여행을 하듯 그녀(유진)는 오랜 시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여기에는 사적 욕망이나 공적 의무감도 없다. 사진의 주인공을 찾아나서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녀는 노란색 기러기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 안에는 석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두 장의 사진은 파일명이 숫자로 되어 있었고, 한 장만 ‘홍안’이라는 한글이름이 붙어 있었다.
- 「홍안」 58쪽 -
세 번째 사진은 유일하게 인물사진이다. 파일명은 홍안이다. 눈이 온 마을을 배경으로 젊은 여자가 서 있다. 일본어로 적힌 여관 앞에 검고 숱 많은 머리를 어깨까지 내려뜨린 여자가 활짝 웃고 있다. 빨간 스웨터와 청바지가 흰 눈을 배경으로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투명하도록 추위에 언 빨간 볼이 인상적이다.
- 「홍안」 59쪽 -
「홍안」은 영화 <화양연화>처럼 이 시대를 돌아보도록 하는 아주 드문 소설이다. 노트북의 노란색 기러기 폴더에 저장된 한 장의 사진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뻗어가는 미생의 사건·존재들과 조우한다. 사진을 둘러싼 인연과, 인연을 가로지르는 외연의 장치들은 정교한 퍼즐을 맞추어가듯 작가의 의식세계에 도달하도록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는 집필의 에이전트(agent) 품격을 갖춘 동시에 소설 내적으로 사진의 주인공을 찾아나서는 극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미션 임파써블(mission impossible)>은 아니지만, 불꽃같은 가능성과 열기가 감지되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여러 편의 소설 가운데 「이중성」은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다. 별을 둘러싼 이중적 관점은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인연의 복선으로 작용한다. 마치 별과 별이 충돌하듯 강렬한 빅뱅의 원리를 잠재하면서도 가시거리 내의 인연이 얼마나 멀며 혹은 얼마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여자와 남자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소설의 무게는 감지된다. 별과 사람 사이 개연성 없는 시점을 뚫고 ‘양날의 검’이 서로를 겨누듯 동떨어진 두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무거운 파장을 불러온다. 황보윤 작가만의 사유의 가볍지 않음이, 그 특유의 작가의식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이중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구에서 보았을 때 하나로 겹쳐 보이는 겉보기이중성과 가까이에서 서로에게 인력을 미치는 쌍성이 있어. … <중략> … 연인으로 비유하자면 겉보기이중성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사귀는 거고 쌍성은 싸우면서도 붙어 다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거야. 하늘에 있는 별들 중 절반 이상이 이런 쌍성이래.
- 「이중성」 206쪽 -
이 소설의 환상성은 서로 떨어져 있는 자체로 미완의 접경에 머물러 있으나 끝이 ‘쌍성’처럼 오묘하다. 별과 별 사이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은 지구의 좌표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때로 별보다 멀고 우주만큼 광활할 때가 있다. 그 사이를 이어가는 여정이 삶이며, 그 속에서 웃고 울며 상처받고 미움 받는 것인 사람의 일이다.
여자와 남자의 화양연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계기가 된다. ‘여자의 북극성’과 ‘남자의 등’이 합쳐지는 순간 두 개의 별은 마침내 하나의 별로 전이된다. 끝이 우아한 소설로 읽히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이중성(二重星)’ 혹은 이중성(二重性)의 전유물이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별과 사람 사이의 잃어버린 개연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상처로 상처를 감싸 안는 흔한 인연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본성의 간절함과 사랑의 결핍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감성이 아닐까.
누구에게든 꽃 같은 세월은 있다. ‘화양연화’는 불꽃같은 내홍과 열정의 순간을 간직한 ‘꽃 같은 시절’을 의미한다. 황보윤 작가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화양연화의 시간은 짧으면서도 강렬하고, 강렬하면서도 치명적이다. 치명적이면서 매혹적인 소설은 흔하지 않다. 치명성의 인상은 소설마다 꽃 같은 시절의 간절함이 말해준다. 매혹의 절정은 소설에 내재된 역풍 같은 바람의 세기로부터 시작된 인간 내면의 깊은 성찰과 관조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려운 소설임에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건 작가에게 복이 될 것이다. 난해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것은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무일 것이다. 저돌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체감의 페미니즘은 분명 작가의 강점이다. 시대마다 반복되는 페미니즘의 징후를 작가는 처음부터 감지하고 소설 내부적으로 소리 없이 안착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정치적·역사적 과거를 말살하는 행위는 매번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을 이상한 돌출물처럼 보이도록 한다"
-Susan Faludi, 황성원 역, 백래시 backlash, 아르테, 2017, 109쪽. -
는 것에 대한 작가의 경계심리는 은밀하며 확고하다.
서 철 원
· 문학박사
· 2015 장편소설 <왕의 초상> 출간
· 2017 장편소설 <혼,백> 출간
· 2018 학술연구서 <혼불, 저항의 감성과 탈식민성> 출간
· 2013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최우수상 수상
· 2016 제8회 불꽃문학상 수상
· 2017 제12회 혼불학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