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의 거짓말 소설문학 소설선
황보윤 지음 / 북인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계인은 펜비트로 말한다

 

 인간의 언어로는 더 이상 소통이 불가하므로 소통을 위해 소년은 펜비트로 외계를 향한 언어를 짓는다. 펜비트를 지어내는 소년의 어깨에 가만 손을 올리고 나는 말한다. 내게도 펜비트를 가르쳐주지 않을래?

 그리고 나는 기다릴 것이다. 내 못생긴 언어에 오해 없이 답해줄 먼 누군가를. 또한 누구라도 소년의 펜비트에 어서 응답해주길...

 어디선가 서툰 피아노 소리가 울린다. 저 하나하나의 음들도 어쩌면 외계를 향한 소통의 몸부림일지 모른다고 나는 가만, 그 소리에 귀기울여본다.

 ... 나를 향한 외계의 답신을 기다리기 이전, 어쩌면 나는 내 옆의 너에게 먼저 발신음을 띄울지도 모르겠다. 정녕 그런 용기가 내 안에서 돋아나길...

 

*아픈 아이를 통해 아픈 나를 보게 되는 이야기. 소통이 막힌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이의 고통이 내 것처럼 느껴져서 슬프다.

 

 

()

 

 내가 그러하듯 너 또한 그러하길...

 하지만 우린 늘 어긋난다. 내가 걷는 이 길과 너의 그 길은 단 한 점의 교차도 없다. 나의 긴 염원에도 불구하고...

 염원이 큰 쪽의 깊은 상처는 돌봐지지 않고 썩는다. 그럼에도 너는 여전히 한 번도 내 길에 닿지 않는 너의 길을 무심히 걷고 있다.

 너에게 닿기 위해 찢기고 발겨진들, 또 내가 걷는 이 길이 다른 세상의 낯선 길로 접어 들었다한들, 너는 무슨 상관이랴.

 

*작가는 사회적 맥락에서 쓰고, 나는 개인적 맥락으로 읽은 글. 하지만 내게 이 글은 악플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아픈 외사랑의 이야기로 읽혔다. L, 그가 만약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악플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진 않았으리란 생각에.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는 요즘, 아귀같은 악플러들의 창궐에 부르르 어깨를 떠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로키의 거짓말

 

거짓말을 잘할수록 세상의 중심에 가까워진다.

 

 나의 거짓말은 항상 누군가의 직설적 물음 앞에 당황스러움으로 끝장이 나곤했다. 뭐 그리 대단한 거짓도 아니고 누군가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의 위력적인 거짓도 아니었건만, 왜 나의 거짓말은 늘 나의 수치스러움으로 끝이 났을까.

 아마도 거짓을 잘 말하지 못해서겠지. 무방비상태의 상대를 완벽하게 무너뜨릴 만큼 힘이 있는 거짓말, 거짓에 속고도 속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만큼 감쪽같은 거짓말. 그런 거짓말이 되지 못해서겠지.

 그렇다면 나도 지금 당장 라이센터에 등록을 하련다. 죄책감 없이 거짓을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영노 같은 태생적 거짓말쟁이에게 다가가는 실력을 갖추는 일이 가능하다면 말이지.

 아참, 그에 앞서 이름을 바꿔야겠군. 내 이름은 앞뒤 글자를 뒤바꾼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분위기의 전환이 없으니 아예 다른 이름을 생각해야겠네.

 가만, 그런데 북유럽 신화 속 거짓의 신인 로키는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말솜씨와 사악한 영혼이 매력적인 인물이라 했는데. 용모, 말솜씨, 영혼... 무엇 하나 만족스레 닮지 못했으니 위력적인 거짓말쟁이가 되긴 다 글렀군. 그냥 이제껏 해 온 것처럼 조잡한 거짓말 한 마디에 조마조마 떨며 결국은 상대에게 책잡히고 모욕당하는 가련한 인간으로 살밖에. 이런, 젠장...

 

* 거짓의 위용이 날로 힘을 더해가는 세상. <로키의 거짓말> 속 인물은 말한다. 거짓말을 잘할수록 세상의 중심에 가까워진다고. 하지만 나는 읽는 내내 거짓된 세상의 메커니즘을 주시하는 날카로운 작가의 눈을 마주쳤다.

 

 

산수유 그늘 아래

 

 노오란 꽃송이가 아직 제대로 달궈지지 않은 대지 위 쌀쌀함 속에서도 무심한 자태로 흐드러져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내 마음이 한없이 설렌다. 가지에 부딪힌 햇살이 내려앉아 아직 채 영글지 못한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도 참으로 가슴 뛰는 일이다. 마치 내 앞에 준비되어 있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세상을 미리 엿보기라도 하는 듯...

 늘 같던 일상을 벗어나는 일 그래서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은 또 오늘을 닮아있을, 나날이 매 한가지이던 날들을 비틀어 보는 일. 그것은 용기이면서 동시에 포기일 것이다. 낯선 날들을 향해 걸어가는 용기와 지금의 것들을 내려놓는 포기가 또 다른 배경과 또 다른 인물을 창조하는 힘으로 전이되는 것이리라. 그 전이의 현장에 노오란 자태의 산수유가 흐드러져 있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 어느 누구도 이미 늦은 건 아닐 거라고,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시작이 있을 수 있다고. 산수유가 봄의 이른 시작이었듯...

 

 

동남풍

 

 해는 지고 나는 작은 방에 들어앉아 슬픔을 기다리네...

 가슴 먹먹하게 붉던 서녘 빛도 사그라지고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떨고 있네. 나는 아네. 이제 끼쳐올 먹빛 어둠에 눈이 멀고, 팔다리가 지워지고, 오로지 최후에 심장만이 남아 핏빛으로 벌떡일 것을...

 작은 방 한 칸에 엎디어 슬픔을 기다리네. 슬픔이 당도하기 전 이 핏물 뚝뚝 듣는 심장 한 조각 그대에게 잘라 내민다한들 어찌 흉이 되리...

 

*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섬세하게 표현된 글. 인생의 저물녘, 한자락 봄바람같은 노인들의 갈망이 처연하다.

 

  자, 우선 여기까지...   언젠가는 나머지 4편도... <여름 숲(하림)의 글은 계속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