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공화국으로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사적유물론의 후퇴, 교환양식의 전경화
<언어와 비극> 학술문고판 후기의 마지막에서 고진은 "옛날에는 추상적인 사고실험으로 보였을 사항이 구체적인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 술회는 <트랜스크리틱2>로 명명되었던 바인, 도서출판b의 고진 컬렉션 <세계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으로 이어져 지극히 젊은 이동의 비평 공간을 창출해낸다.
그 첫 권이며 고진이 "그때까지 써온 것을 콤팩트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완성된 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으로>이고, 이는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이라는 트랜스크리틱 후속작의 트레일러 내지는 소아용(청소년용) 아이템인 셈이다.
때문에 여러모로 <세계공화국>은 <언어와 비극>을 심심찮게 들춰보게끔 만든다. 해체적 수사학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듯 짐짓 정석적인 수사를 사용, 적절한 반복을 통해 눈깜짝할 새에 해체해내는 것과 세계사의 구조를 정초하는 단계에서 구성적 이념을 동원하면서도 규제적 이념으로 회유해 내는 비평전략은, <언어와 비극>에서 사용되었던 강연문투(문체)에서 감지되었던 조곤조곤하면서 동시에 확신에 찬 청중의 수용을 강제하는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반발이 거셀 것이라 예견되는 지점은, 마르크스가 프루동의 경제학에 대한 순진한 이해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국가'에 대해 순진했다는 오류를 밝히면서 사회구성체의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이동시킨 지점이다. (그가 사적유물론이나 가치법칙으로부터 사상된 '국가'라는 이념을 구해내기 위한 이러한 규제적 이념형은 전적으로 베버에 대한 숙고에서 탄생했다고 혼자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일견 비약으로 받아져 반발이 심할 것이라 예상된다.)
역사의 진행을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계급투쟁에 대응하는, <보이지 않는 교환>이면서 동시에 교환으로 존재하는 약탈-재분배의 국가적 교환양식을 목표로 하기에 이런 전략의 장점이란 규정되고 구성되었던 그간의 이념형들을 재배열 하는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
"경제과학이 모든 생산약식에 대한 일반과학이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특수과학이다" 라는 구절이나,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이다"라는 일견 당연해보이는 주장이 강한 환기력을 가지는 이유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세계사적 구조의 재편성의 뒷받침을 단단히 받고 있기 때문인데, '교환양식' '소비자 운동' '교환' '국가' 등은 광범위한 새로운 의미망에 둘러싸인 귀환을 거듭 촉구받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탄생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것의 재발견과, 흥미로운 '화폐'에 관한 통찰은 비교적 고진의 '아주변'적 독자라 자평하는 나에게 이전의 관념들을 싹 잊게 만들 새롭고 기분좋은 강제력을 선물해주고 있다.
새롭게 눈에 띄는 현상(?)은 그가 국가를 내부에서 보는 것을 지양하는 방법으로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눈을 돌리듯, 마르크스가 경제학에 몰두하는 동안 사상된 국가의 이념을 가치 중립성과 소심할 정도의 진중함으로 악명높은(?) 베버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구조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마르크스의 외부를 통해 마르크스를 비판-지양해 나가기 위해 동원된 철학자-사상가들이 세계사의 재배열을 위해서도 열심히 동원되는 것 또한 매번 고진 읽기의 흥을 부추기는 지점이 아닐 수 없는데, 월러스틴, 사미르 아민, 폴라니, 아렌트 앤더슨 등 그가 자주 인용하는 사상가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홉스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칸트가 말한 '자연의 간지'를 선취해냈으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던 맹아적 홉스가 구수한 이스트가 첨가되어 시원하고도 걸죽한 향취의 고진하우스 맥주로 재탄생한 것.
허나 나와같은 '아주변' 독자 말고라도 고진하우스의 주메뉴를 기다리는 분들이 더욱 많을 듯싶으니, 하루 빨리 시음회에서 음용된 저 숙성한 와인의 진면목과 '향연'하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
덧붙여 고진의 이러한 시도가 일견 명백하게 보이지만 해결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전쟁, 환경, 양극화 등 전지구적 문제를 염두해두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모든 이념을 이야기로 부정하는" 니힐리즘이나 시니시즘의 자기경멸적 아이러니, 혹은 자기기만의 수사학과 정면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충분한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 내 안에, 내 안에 자리잡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