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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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쿤데라의 최신 산문이 번역되어 기쁜 맘에 읽어본다.

더이상 소설 따위를 읽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일주일 내내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자책하는 사람들처럼, 이 책 자체가 현대는 결코 저 위대했던 '소설의 세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묵묵히 전언처럼 읊조리고 있는 듯하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선율을 따라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는 사태를 보며 다분히 침착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하고도 명민하게 내 머릿속에는 깊고 울림이 큰 조종이 울린 것이다.

혹자는 가라타니의 <소설의 종말>에 대한 쿤데라, 혹은 유럽 소설의 대답이라고 해도 좋다(물론 여기에는 체코의 이름 없는 작가나, 마르케스, 푸엔테스 같은 남미 작가를 포함하여 '작은 콘텍스트'에 속한 다수의 작가들이 등장하긴 한다.).

오랫만에 독서에 시간을 내어 쿤데라의 전언을 읽을 수록 과거 책세상에서 나왔던 '어쩌구 저쩌구' 소설 기법이나, <저주받은 유산>의 이상야릇한 번역으로 나왔던 그의 '젊은' 에세이를 기대했던 나는, 내심을 숨기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최대한 사려깊게 소설이란 한 세계의 예술이 역사와 어떤 교직관계를 통해 그 불멸성을 뽐내었었는지, 진단해간다. 이건, 그렇다, 거의 소설의 자연사 박물관에 모셔두어야할 조문이 아닌가?

사실, 역사는 그것의 진보나 후퇴냐를 따지기 전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상 속의, 신자유주의의 종말 같은 거창한 문구들, 신문 기사에 뭍여, 총체적인 인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끝나고 마는 개개인의 삶의 불분명한 얼룩 같은 것이다.

과연 내가 어디서 그것의 미묘한 음영이나, 흔적을 옮겨왔는지, 그것을 즐겨왔는지, 기억하는 것은 쿤데라가 서두에도 강조했듯이 개인의 독서력이란 '작은 역사'의 반복 과정을 통해서인 것이다.

이제 소설은 삶의 일부이지도 않고, 쿤데라가 한탄했듯, 우리 주변에는 늘 평범하고 진부한 소설가들과 문학들이 소설과 문학의 망각에 일조하고 있다. 과거 무수히 찬양받던 작가들은 요즘은 거의 농담거리로, 코미디 대사의 클리세가 되어버리고, 문학은 이제 문학만 공부하는 작은 판에서 끝없이 소모적인 랠리를 즐기는 지 모른다. 

그것을 찢어버리기도 전에 커튼은 이미 올라가 있고, 무대의 막을 언제 알렸는지, 확 트인 관중석을 보며 지금의 소설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것 역시 소설 미학을 찬양했던 <농담>의 작가가 쓴 애정깊은 소설 찬가일 뿐일까? 여러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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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토요일 밤의 세계문학 3
보리스 빅또로비치 싸빈꼬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뿔(웅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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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매, 창백한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 이름은 사망이니' 라고. 이 말이 한 걸음 내딛자, 그곳에는 풀이 시들고, 풀이 시든 곳, 거기에 생명이란 없다. 즉 법도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법은 아니기 때문에... 그곳은 교수대, 그곳이 곧 법이니...

 
러시아 사회혁명당 소속의 테러리스트 사빈코프의 소설 [창백한 말]을 자신의 경험에 대한 낭만적 회고라고, 단지 한편의 긴박한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결코 무시못할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곧 푸시킨과 레르몬또프의 전통을 계승한 낭만적이기 이를데 없는 주인공의 실존적 고뇌와 투명한 독백이다.

현실의 첨예한 갈등 지점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불가피하게 신과 신의 대리자들과 맞닿아있다. 노쇠하기 이를대 없는 대공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역할을 분담, 한 명이 실패하면 나머지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그렇게 차례차례 죽음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하는 운명. 더이상의 신념도 더이상의 이념도 중요치 않다. 민중과 국가와 나와 그리고 모스크바 모두 손 끝에서 멀어져 간다. 그는 당위를 역설하고 다시한번 더 치밀한 계획을 검토하고 검토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한다. 한번에 하나씩. 그가 생각해야할 것은 너무도 많고 너무도 적다. 그에겐 지금 이시간 작은 휴식과 짧은 정지의 순간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것도 같지만 이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짧은 순간의 정적이 가져다주는 여유를 그는 바란다. 결국 현실에서 활활 타올라 분쇄되는 무명의 요절한 테러리스트가 되지 못한 그는 소설 속에선 그런 주인공을 형상화시키는데 성공한 듯보인다. 어느 누구보다도 낭만적이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동시에 분리되어 제각각 살아 움직이는 두개의 자아를 그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와 뜻을 같이했던 자들의 죽음을 댓가로 성취한 성공적인 암살. 하지만 그의 몫은 그 전보다 더 허무하기만한 암살 이후의 삶이고, 그는 끝까지 그 실패한(?) 삶의 기록자로 남게 된다.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고 했던가. 이는 다른 이의 죽음을 기린다는 게 아니다. 그들의 추억을 다시 상기하는 순간 언제나 그가 발견한 것은 처음부터 고독한 자기 자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현실의 그가 있다.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은 채 여기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의 그가 있다. 가까스로 교수대를 벗어난 그를 문득 현실이 가두고 만다.  
 
오래전에  <창백한 말>(B.V. 사빈코프, 운정,1992)을 읽고 쓴 글이다. 이후, "길"이라는 출판사에서 슬라브 문학선에 사빈코프의 필명인 '롭신'으로 <창백한 말>, <검은 말>이 출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웅진에서 결국 나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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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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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린의 태도는 여기서도 그다지 논쟁적이지 않다.

그보단 새로운 관점과 발견을 거명하는 특유의 신중하고도 명증한 논리전개는 본 받을 만 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기 작가로서 최고의 삶과 후기의 '현인'으로서의 삶이 극명한 대비를 보이는 작가이고, 마치 '노인과 바다'로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다소 나른한 이미지에 갇혀 있는 헤밍웨이와 같은 대중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모든 논쟁 요소들이 후기에 자신의 세계관과 종교관에 관한 거의 흔들림없는 신조의 톤 속에 용해되어 버려 현대에 와서는 거의 그 중요성이나 논쟁적 지점들이 '사상'된 채로 소개되어지는 면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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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방 동문선 문예신서 326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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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웅권의 <밝은 방> 번역은 예전 열화당의 조광희 번역을 그저 답습하는 수준이며

스투디움과 푼크툼 부분에 관한 부분에선 거의 개악 수준을 면치 못한다.

더군다나 매끄러운 종이질을 쓰고 있음에도 사진의 퀄러티를 들여다보면 개탄을 금치 못하는 수준이다.

왜 개정판을 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이는 번역자보다는 편집자의 역량이 문제되는 지점인데, 문장은 둘째로 치고

거의 화이트아웃 수준인 사진의 질은 도대채 바르트가 이런 흐릿한 사진을 보고

이런 문장들을 써내려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랑의 단상'처럼 예전의 역자 '김희영'을 다시 복권시켰던 것처럼 '조광희'의 번역으로 탄생했어야 했고, 개정판이라면 '사진'의 질에 더욱 신경 써야 했다. 

바르트의 후기 저서를 열심히 번역한 김웅권의 손을 들어주기엔 참으로 안타까움이 많은 책이니, 굳이 카메라 루시다를 읽기 위한 독자라면 대학 도서관이나 시립 도서관에 있는 조광희 번역을 참조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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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scinia 2007-08-22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평점은 별 다섯 개를...^^; 아무튼 잘 참고하겠습니다.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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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적유물론의 후퇴, 교환양식의 전경화

 <언어와 비극> 학술문고판 후기의 마지막에서 고진은 "옛날에는 추상적인 사고실험으로 보였을 사항이 구체적인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 술회는 <트랜스크리틱2>로 명명되었던 바인, 도서출판b의 고진 컬렉션 <세계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으로 이어져 지극히 젊은 이동의 비평 공간을 창출해낸다.

 그 첫 권이며 고진이 "그때까지 써온 것을 콤팩트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완성된 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으로>이고, 이는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이라는 트랜스크리틱 후속작의 트레일러 내지는 소아용(청소년용) 아이템인 셈이다.

 때문에 여러모로 <세계공화국>은 <언어와 비극>을 심심찮게 들춰보게끔 만든다. 해체적 수사학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듯 짐짓 정석적인 수사를 사용, 적절한 반복을 통해 눈깜짝할 새에 해체해내는 것과 세계사의 구조를 정초하는 단계에서 구성적 이념을 동원하면서도 규제적 이념으로 회유해 내는 비평전략은, <언어와 비극>에서 사용되었던 강연문투(문체)에서 감지되었던 조곤조곤하면서 동시에 확신에 찬 청중의 수용을 강제하는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반발이 거셀 것이라 예견되는 지점은, 마르크스가 프루동의 경제학에 대한 순진한 이해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국가'에 대해 순진했다는 오류를 밝히면서 사회구성체의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이동시킨 지점이다. (그가 사적유물론이나 가치법칙으로부터 사상된 '국가'라는 이념을 구해내기 위한 이러한 규제적 이념형은 전적으로 베버에 대한 숙고에서 탄생했다고 혼자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일견 비약으로 받아져 반발이 심할 것이라 예상된다.)

 역사의 진행을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계급투쟁에 대응하는, <보이지 않는 교환>이면서 동시에 교환으로 존재하는 약탈-재분배의 국가적 교환양식을 목표로 하기에 이런 전략의 장점이란 규정되고 구성되었던 그간의 이념형들을 재배열 하는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

 "경제과학이 모든 생산약식에 대한 일반과학이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특수과학이다" 라는 구절이나, "소비자 운동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고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이다"라는 일견 당연해보이는 주장이 강한 환기력을 가지는 이유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세계사적 구조의 재편성의 뒷받침을 단단히 받고 있기 때문인데, '교환양식' '소비자 운동' '교환' '국가' 등은 광범위한 새로운 의미망에 둘러싸인 귀환을 거듭 촉구받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탄생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것의 재발견과, 흥미로운 '화폐'에 관한 통찰은 비교적 고진의 '아주변'적 독자라 자평하는 나에게 이전의 관념들을 싹 잊게 만들 새롭고 기분좋은 강제력을 선물해주고 있다.

 새롭게 눈에 띄는 현상(?)은 그가 국가를 내부에서 보는 것을 지양하는 방법으로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눈을 돌리듯, 마르크스가 경제학에 몰두하는 동안 사상된 국가의 이념을 가치 중립성과 소심할 정도의 진중함으로 악명높은(?) 베버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구조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마르크스의 외부를 통해 마르크스를 비판-지양해 나가기 위해 동원된 철학자-사상가들이 세계사의 재배열을 위해서도 열심히 동원되는 것 또한 매번 고진 읽기의 흥을 부추기는 지점이 아닐 수 없는데, 월러스틴, 사미르 아민, 폴라니, 아렌트 앤더슨 등 그가 자주 인용하는 사상가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홉스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칸트가 말한 '자연의 간지'를 선취해냈으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던 맹아적 홉스가 구수한 이스트가 첨가되어 시원하고도 걸죽한 향취의 고진하우스 맥주로 재탄생한 것.

 허나 나와같은 '아주변' 독자 말고라도 고진하우스의 주메뉴를 기다리는 분들이 더욱 많을 듯싶으니, 하루 빨리 시음회에서 음용된 저 숙성한 와인의 진면목과 '향연'하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

 덧붙여 고진의 이러한 시도가 일견 명백하게 보이지만 해결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전쟁, 환경, 양극화 등 전지구적 문제를 염두해두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모든 이념을 이야기로 부정하는" 니힐리즘이나 시니시즘의 자기경멸적 아이러니, 혹은 자기기만의 수사학과 정면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충분한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 내 안에, 내 안에 자리잡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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