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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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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 Ligting, 중국어 표현으로는 구상섬전. 삼체시리즈를 읽지않은 나에게 삼체0 프리퀄같은 느낌의 책이라기보다는 삼체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와도 같은 책이다. 하지만 삼체 세계관과 연결은 되지만, 본편 사건의 직접적 원인 제공이라기엔 이 책 자체로도 완결된 세계를 담고 있기에 독립성이 충분했고, 삼체를 읽지 않은 나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덮는 순간, 삼체를 읽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샘솟았다.

《삼체 0: 구상섬전》은 열네 살 생일날, 부모가 구상섬전에 의해 눈앞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소년이 그 충격으로 평생 이 미스터리한 현상을 추적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과학자가 되어 구상섬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그 연구는 곧 군사적 이용을 노리는 세력과 얽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냉철하고 집요한 여성 군 장교 린윈, 그리고 양자 물리학자 딩이 같은 인물들과 만나며 연구를 이어간다. 소년은 점점 구상섬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양자 세계와 거시 세계를 잇는 경이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기로 전용될 때 인간 사회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한 과학자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집착에서 출발해 과학의 경이와 군사적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과학이란 무엇이고 인간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양자역학은 어려운 주제를 다루지만 세부적인 이론이나 수학적인 공식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그러한 지식을 이해 가능한 범위로 풀어가고 있다. 과학적 지식이 긴장 요소로 작용하기에 궁금증을 유발할 수는 있으나, 그 개념 자체가 이야기의 중추로 자리하며 적당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와 조화를 이루어 독자를 끝까지 글에 집중하게 한다.

개인적인 상처에서 출발한 집착 어린 연구는 설득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과학적 지식과 인간의 생존이 연결되는 지점은 신선하다. 소설의 대부분이 연구와 깨달음,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져 있다면, 마지막 부분은 인간 본성과 집착의 이유를 인간의 내면의 요소에서 찾으며 묻는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가 결국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는 것이다. 소설의 끝자락에서 독자는 과학의 힘을 마주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주제의식이 명확하게 담겨 있으면서도 과학적 상상력이 양자세계와 개념적 토대를 충실히 깔고 있기에, 책의 분량이 적지 않음에도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 특히 구상섬전과 양자세계의 확장은 독자의 지적 욕구마저 충족시키는 즐거움을 준다. 내용의 난이도로 인해 속도감 있게 읽기보다는 문장 속 지식을 곱씹게 되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삼체 시리즈를 읽지 않은 이에게도 아쉬움이 없는 흥미진진한 소설이며, 책을 덮는 순간 삼체로 이어지는 길 위에 이미 서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자네에게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만 있으면 구상섬전의 수학적모델을 구축하는 거지. 이론적으로는 독착성이 있고, 수학적으로는 완벽하고 정밀해야 하고, 컴퓨터로는 실핼할 수 있어야 해. 예술 작품을 창작하듯이 이론을 구축해 봐. - P47

자네는 정말로 이 모든 걸 현존하는 물리학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모두 인간이야. 우리가 아무리 남들보다 더 열심히 연구한다 해도 결국은 인간이지. 우린 뉴턴, 아인슈타인, 맥스웰 같은 사람들이 설정한 틀 안에서만 추론할 수 있어. 그 틀에서 반 발자국조차 벗어날 수 없지. 하지만 그 안에서는, 우린 아무것도 추론해 낼 수 없네. - P68

군인에게는 축복은 무의미하니까. 그 대신 경고의 말을 남길게. 그 무시무시한 것들이 언젠가 네 동포와 가족의 머리 위에 떨어질 수 있고, 네 품에 안긴 아기의 연약한 피부에 닿을 수 있어. 그런 일을 막는 최고의 방법은 적이나 잠재적인 적보다 먼저 그걸 만들어 내는 거야. 이게 내가 네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란다. - P439

학문적으로만 보자면 내가 지도한 학생 중 가장 우수하지. 특히 기술 분야에서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네. 하지만 이런 연구를 할 때는 도덕성을 재능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평가해야 하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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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백사혜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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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혜의 연작소설집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답다》는 초월적인 지배계급 ‘영주’의 세계를 배경으로, 우주라는 확장된 공간 안에서 인간 욕망의 끝자락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영주’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 가진 자, 절대 권력자, 초월적인 지배계급. 그들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마치 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신이라는 존재는 사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영주는 인간 위에 군림하지만, 그 욕망은 철저히 인간적이다.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 가장 완전한 권능, 그것을 위해 그들은 끝없이 세상을 지배하고 변형한다.

연작소설로 구성된 이 책은 우주라는 확장된 배경 속에서 인간의 욕망, 권력, 폭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화해도,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건 근원적인 감정, 추악할 정도로 날것인 욕망이다.
각 단편은 독립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조각이 서로를 통과하고 스며들며, 하나의 큰 서사를 만들어낸다. 특히 첫 단편에서 던져진 인물의 파편은, 다음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인물의 배경이 되거나, 상처가 된다. 그래서 이 연작은 서로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도 전체 소설을 목적을 향해 질주한다.

이 소설에서 ‘영주’는 신과도 같은 존재다. 그들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으며, 욕망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는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무료하고, 그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이 바로 ‘아름다움의 추구’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미적 기준이 아니라, 극한의 통제와 자기 과시에 기반한 폭력적인 욕망의 발현이다. 소설은 이 지배계급의 초월성과 그 허망함을 정교하게 대비시킨다.
하지만 인간이 우러러 보는 신은 사실 인간에 의해 탄생하였다. 인간들의 욕망이 정제되고 취합되어 만들어진 궁극의 초월자는 결국 신을 믿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허를 찌르는 숨겨진 뜻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초월성과 그 허망함의 지점에서 소설의 핵심적인 역설이 드러난다. 완벽한 존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실은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생존하는 자들의 투쟁 속에서 빛난다.
영주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절대적 아름다움은, 스스로의 잉여로부터가 아니라 무너지고 찢긴 존재들의 선택과 책임, 그리고 연대의 감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답다》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사회적 폭력, 권력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정밀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감정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다.
정제된 언어와 감각적인 묘사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삶이 끝장나기 직전까지 붙잡으려는 손짓을 인간 내면의 가장 작고 조용한 저항과 무너진 자들끼리 나누는 연대의 몸짓을 고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지 장르적 성취가 아니라, 문명 이후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계속해서 인간일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사유다. 그들이 보지 못한 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꺼지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들의 시간이며 그 밤은 그렇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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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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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진 어린아이 시시의 죽음은 수십 년 뒤까지 삶을 휘저으며, 치유되지 않은 비극으로 남는다. 그 슬픔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마침내 엄마 스타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내린다. 더치스는 남겨진 동생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며 스스로를 구원하려 한다. 주인공 더치스는 세상과 맞서 싸우는 어린아이이다.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엄마 스타와 어린 동생 로빈을 위해, 아직 어리지만 더치스는 모든 시간을 투쟁에 바치며 자신을 무법자라고 부른다. 그녀의 무법자적인 삶이 마치 정의로운 투사처럼 여겨지기엔 너무 어린아이일뿐인 소녀. 그 소녀은 왜 이렇게 삶에 찌들어버린 인물이되어야했는지에 대해 집중해야한다. 어릴적 사고로 죽은 이모 시시로 인해 망가진 집안의 삶과 시시로 인해 무너진 워크, 빈센트, 스타, 마사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복잡해진다. 뜻밖의 사건에 의해 죽어버린 엄마 로 인해 더치스와 로빈은 보호받지 못한삶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로빈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질서와 거짓에 맞서는 더치스에게 법도, 어른도, 집도, 진실도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로빈이 살아남는 것이다. 무법자라는 타이틀은 사실 보호자의 또 다른 이름이며, 어린아이가 짊어진 책임감의 껍데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더치스의 모든 애씀은 사건을 꼬이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엄마마저 지켜야 할 존재가 되어버린 어린 소녀의 착각 섞인 사랑은 진실을 묻은 채 모두의 삶을 무너뜨렸고, 더치스의 무법자 인생 역시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강한 척하는 어린 소녀의 삶은 매우 안타깝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세상에 의지하지 못하고, 어른 이상의 것을 판단해야 하는 현실 자체가 비극이다. 그녀의 거칠고 무지한 행동 대부분은 법과 도덕의 기준이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힘든 여정끝에 남은것은 더치스와 로빈의 진실에 대한 마주침이다. 이로 인해 더치스와 로빈이 그토록 꿈꾸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로빈이 삶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과 더치스는 다르다. 어쩌면 어떤식으로든 보호라는 것을 받아본 아이와 보호받는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는 같을 수가 없었던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소녀는 자신이 알지 못하게 받아온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치스는 모든 걸 망친 것 같지만,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진실. 그건 이 소설의 가장 복합적인 감정이자, 가장 아름다운 아이러니이다. 보호받았지만 보호받지 못한, 모든 것을 체념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자신을 향한 모두의 손길이 그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소설 마지막, 유일했던 서로는 각자의 삶으로 향한다. 그토록 원하던 안정으로 들어가는 로빈도, 체념을 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길을 택하는 더치스도. 성장할 수 있을것 같은 아이와, 이제서야 어린아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너무 일찍커버린 아이, 둘의 모습이었다. "소녀는 자기가 잃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동생이 얻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울었다." 더치스는 유일한 가족을 잃었고, 로빈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가족을 얻었다. 그 눈물은 상실의 눈물이자, 해방의 눈물이며, 사랑의 마지막 인사다. 처음에 나왔던 비어 있던 가계도는 마지막에 완성된다. 상처뿐인 관계이지만 그녀가 받은 마지막 시선과 말들은 진심이었기에 더치스는 체념이 아닌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끝이 곧 시작이라는 말처럼, 그녀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는 무법자가 아니었다.그녀는 단지,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사랑하려 했던 지극히도 어린 아이였다.

소녀는 자기가 잃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그리고 동생이 얻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울었다 - P565

헤아릴수없는 거미줄처럼 얽힌 상처가 숱한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워 새로운 것을 낡은 것으로, 생생한 것을 부패한 것으로 바꿔버렸다. - P43

"그냥 중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사는 데는 거기니까요. 꼭 이쪽 아니면 저쪽일 필요는 없잖아요." - P73

"감옥은 빛을 꺼버리는 곳이야. 그리고 이 집은 어쩌면 작은 불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 타고 있지. 그걸 놔버리면 그 마지막 빛마저 보내버리면, 어둠만 남을 거고 난 더이상 볼 수 없게 될 거야." - P105

더치스는 어머니가 대부분 미웠고, 이따금 좋았고, 너무도 필요했다 - P136

"서장은 무얼위해 기도하시오?"
"적절하고 타당한 끝."
"희망은 세속적인 거요. 삶은 쉽게 깨지는거고.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너무 꽉 매달리지, 부서질 거라는걸 알면서도." - P220

"그날 밤 이후로, 그 일을 저지른 뒤로 녀석은 우리 중 누구도 자유를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던거야." - P352

그의 침묵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강렬하게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자기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가 죽인 아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세상에서 자기만 살아가느니,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는 편이 나았기에 - P472

"사람들은 평생 하늘을 올라다보며 질문을 던져. 신은 개입을 하는 걸까, 아니라면 왜 사람들은 여전히 기도하는거지?
"믿음이지, 신이 개입할 거라는 희망."
"아니면 삶이라는 게 너무 하찮으니까."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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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가도 배는 고프고
라비니야 지음 / 크루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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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말고 기름을 빼낸 참치에 마요네즈에 버무렸다. 파래김을 꺼내어 찬밥 한 덩이를 펼치고 참치를 얹고 꼭짜서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갓김치를 얹어서 김밥을 쌌다. 김밥을 하나씩 입에넣고 우물거리며 다시 책을 읽기시작했다.

표지부터 귀여운 따뜻한 책은 가볍다기보단 편안한 책이었다. '울다가도 배는 고프고'라는 제목처럼 배고픔은 사실 살아가다 느껴지는 허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먹는걸로 괜찮아지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마음의 허함은 먹으면서 달래지기도 하는 것이랄까.

사계절로 구별되는 이야기는 여러가지 음식들로 각 챕터를 채우고 있다. 그 런 하나씩 글을 채우고 있는 음식에는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도,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도 들어가있다. 그렇기에 하나의 음식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야기들은 묘하게 마음을 노곤하게 해준다.

책을 읽다말고 배가 고파졌고, 간단한 음식을 찾아먹기보다는 무언가 손이가는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손이 가는 음식, 손이 가는 것은 결국 나를 챙겨가는 시간이다. 책을 읽으며 나를 챙겨주고픈 마음이 솟아난다.

귀여운 책표지와 달리 책의 내용은 단아하다. 무언가를 가르치려하지않고, 감동을 꾸며내지않는다. 보통의 삶의 일상적인 이야기. 과하게 인생에 대해 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사람사는게 다 그런거지'하는 생각이 들기에 봄볕에 앉아서 무던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시간이다.

글을 읽다보면 깊이가 다르게 분포되어 있던 생각들이 한 곳에 모여든다. 재잘재잘 먹어가며 각각의 생각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먹다보면 '그래 이렇게 살다보면 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기다릴거야'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가게 된다.

식재료가 남아버리는 것을 뉘우치는 것도,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도, 지인과의 투닥거림의 상황도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배달음식의 자극에서 집밥을 찾는것처럼 글에서의 자극을 뺀 기분은 느긋해짐을 허락받은듯하다.

또한 중간중간 등장하는 작가의 채소예찬은 묘하게 중독성있다. 특히 가지볶음을 읽으면서 가지만의 그 맛과 향은 누릴수 있는 자만이 아는듯 잠시 혼자 입맛을 다셨다. 텃밭에서 바로 딴 야채를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안다. 한여름 태양열에 달구어진 막 딴 야채로 무언가를 요리할때 느껴지는 쾌감. 그리고 신선함을 머금은 그 맛은 요리의 능숙도와 다른 그것만이 주는 행복한 맛이 있다. 그렇게 나의 기억까지 끄집어내는 문장들을 읽어가며 에세이가 주는 행복함. 나만의 기억을 끌어내는 문장들의 노크가 즐거움을 자아내는 책이었다.

🔖무던히 애쓰지 않아도 만족감이 차오른 이들의 삶을 보면 흐린 아침도 산뜻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메스코소스 중

🔖내면의 '환기' 버튼을 누르는 것도, 감정의 이 끝과 저 끝을 잡아 구김을 정리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결국 나의 몫이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기준 없이 더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거나 단속하는 일일 것이다. -참치열무비빔밥 중

🔖우리가 어떤 음식에 이끌리는 건 허기짐 때문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작용이 아닐까. -나폴리탄 중

🔖어떤 관계와 사람에 의해 내 존재가 마모된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 감정의 일렁임은 새 물건에 생활감이 깃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겪는 태연한 변화일 것이다. -당근라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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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곁에서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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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마주한 신경숙 작가의 글은 언제나처럼

슬픔은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하는것으로 그 끝을 향해 나아간다


세 이야기가 함께 있는 연작소설.

신경숙 작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성은 여전하다. 나는 그것을 애틋한 서글픔이라 부르고 싶다. 무엇을 읽어도, 어떠한 구절을 접해도 막연하게 느껴지는 그 씁쓸한 서글픔, 혹은 끝이 없는 공허한 외로움.

그래서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덤덤하게 읊조리는 것조차도 고요함이 올라와 자꾸만 목이 잠겨버린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모든말이 허공에서 외롭게 울리다가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대로 고개를 저어야하는 그런 감정.

작가는 글에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대화에서도, 독백에서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덤덤히 말할뿐이다. 하지만 불투명하게 쓰여있는 말 속에서 그 감정이 읽히며 나에게 갇혀있는 나만의 감정은 후벼지고 들쑤셔진다. 허무하리만큼 무감각했던 나의 빈 공간에 날 것의 감정이 휘몰아친다.

이러한 까닭에 신경숙 작가의 책을 읽을라치면 매번 맘을 가다듬는 일부터 시작하지만 결국 무너지고야 만다. 그리고 이런 슬픔은, 슬픔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크게 위로받는다. 매번 신경숙작가의 글을 찾는 이유가 나의 슬픔을 이해받고 찾아가며 깊은 물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올수 있는 힘을 되찾게 될수 있어서가 아닐까.

세 작품은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이다. 아니 누군가에게 쓰는것 처럼 보이는 나에게 쓰는 편지이다. 그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싶은 자신의 이야기, 나에게 하고 싶은 나의 감정에 충실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감상과 같은 이야기. 그래서 읽는이에게 그 이야기에 고요히 귀기울이게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에 있는 생각들을 끄집어 내게한다. 그 무엇도 강요되지 않는 감정이지만 도리어 감정의 끝자락까지 훑게 만드는 힘이 있는 글이다.

[첫번째 이야기. 봉인된 시간]

-지난 삼십여년 여기 사는 동안 내 마음은 늘 샌디가 휠쓸고 간 이 폐허 같았던 것일까. 나를 잊었느냐고 물어서 미안하네. 고국에서 누군가 오면 반갑고 좋아서 내가 먼저 정을 붙여 지내다가 이렇게 내 마음만 남는 과정을 한 두번 겪었겠나. 그런데도 왜 매번 나는 이렇게 처음 겪는 일처럼 휘둘릴까. p17

-전화도 안 되고 이메일을 보낼 수도 없게 된 이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군. 왜 전화를 받지 않나, 왜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나, 복잡하게 생각 안 해도 되니까. 나는 이 글을 선생에게 부치려고 쓰는 것도 아니야. 도무지 무엇인가 하지 않고서는 이 시간을 견더내기 어려워 쓰고 있어. p21

-상관없어. 나는 이 편지를 선생에게 부치려고 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저 바람 앞에서 무엇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이리 엎드려 있는 거니까. p31

-남편은 여기서도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어. 병원 가는 것도 싫어했네. 그이가 늘 가고 싶었던 곳은 고국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곳에 가지 않는 한 남편에게 여행이란 부질없는 것이었겠지. 나는 남편의 나태한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야위고 꼿꼿하고 부지런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늘 내 곁에 있었다네. p63.

현실에 순응하는 삶. 하지만 진정 마음으로는 체념하고 놓아버린 삶의 사람들이 보인다. 처음 ‘깊은슬픔’을 읽었을 때 이후로 ‘아버지에게 갔었어’에 이르를 때까지 계속. 차라리 현실에 소리치고 어떤식으로든 부정하는 삶이라면 처연하지않을텐데 마음으로는 놓아버린 채 현실에서는 괜찮은 듯한 그 모습이 지쳐버린 침묵으로 보이는 것이 더 그러하다. 혼잣말이 더 공허하고 혼잣말이 더 힘든 이유이기도. 내 혼잣말이 내 귀로 들어오고, 그리고 그 감정을 다시 나를 일깨워지는 순간 부정 할 수 없게 되는 감정의 현실.

그렇게 서글픔이 슬픔이 되고 슬픔의 감정은 눈물을 흐르게 한다. 그리고 그 눈물이 메마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념 이후의 시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매번 그런 감정을 준비하고 읽게 되는 신경숙작가의 글.

-내 귓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드는 한국말 내 말, 내 모국어, 내가 돌아왔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나더군. 내가 그리워한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말이었나? p64

-어느날부터 변해버리고 없는 나의 서울을 찾아다니는 걸 그만두었네. p66

-인간은 모국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했지. p66

‘나의’라는 단어가 이렇게 애처로울수 있을까. 내안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나만의 기억.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자 공유되지 않아도 나만은 알 수 있는 나의 지난 시간.

오늘의 글은 너무 감성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경숙 작가가 가진 가장 큰 영향력이라고 생각하기에 두서없어도 공유하기에 적합하지 않아도 그렇게 써내려가는 글이다.

[두 번째 이야기.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결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은 이유 없이 잡을 손이 필요했다. p112

-그야말로 폭풍이 좀 있었고 그 폭풍은 어제의 일이지 오늘 것도 내일 일도 아니리라고, 지나간 것, 더구나 나쁜일들은 더 이상 상기하지 말자고. P92

-내가 내 말의 구체적인 현상에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계속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시간만 남은걸까? p99

-거절당할까봐 떨고 있던 나는 너의 말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p107

-너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계속하고 싶어하는 이 욕망조차 분명 결국 사라지게 될지라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계절이 순환하듯이 시간이 원으로 말리듯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 속에 접혀져 있는 이야기들을 너에게 하고 싶다. p122

-나중에 네가 나 기억할 때 여기까지만이면 좋겠어. 너 아니고 누구라도. 통증이 시작되면 내가 어떤 모습인지 나도 몰라, 그냥 덩어리가 된 거 같아. 나도 모르는 고통스러워하는 나 말고 너무 작아져서 없는 것 같은 나 말고...... 그래 여기까지만. p149

-이 고통스러운 두려움과 대면할게. 사랑하고도 너를 더 알지 못해서 미안해. 신은 늘 굶주려 있는 것 같아, 잡아먹힌다 해도 앞으로 나아갈게, 내일 다시 연락할게. p157

[세 번째 이야기. 작별곁에서 ]

-인간이든 공간이든 사물이든 오래 방치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지금의 저처럼요. 흘러가지 못하고 물이 고이면 자연스럽게 냄새를 풍기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p164

-잊을 수 있으면 잊고 지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잊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게 희미하게 옅어지는 건 가을 뒤에 겨울이 오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맺힌게 없이 자연스럽게 잊히는 삶을 누구나 살게 되는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p167

-그 간단한 일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가끔 이런 상태를 맞닥뜨리곤 합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몸이 바닥으로 하염없이 가라앉는 상태. p179

-지금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일,어,나,야,한,다,일,어,나,야,한,다......고요. 말이란 묘한 힘이 있어서 계속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 그 말 비슷하게 된다고 했던 사람이 선생님이셨던가요. p190

-선생님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디선가 들으니 이렇게 무게없이 바람결처럼 몸을 쓰다듬어주면 새 기운이 고인대.라고 지나가는 얘기처럼 말씀하셨지만 제게는 그게 사실인 듯 느껴졌어요. p216

-그렇게 시간은 그리고.....를 계속 이어가는 것인가요? 그리고......그리고......그리고...... p234

-내 숨은 내 것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요. p257

듣지 못하는 상대들은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세 사람의 세가지 이야기는 결국 서로에게 연결되지 않아도 하나로 이어지며 과하게 넘쳐나던 감정을 포근히 감싼다. 그래서 그 끝은 나에게는 큰 위로이고, 작별의 끝은 마음의 따뜻한 온기로 남는다.

#작별곁에서

#신경숙 #신경숙작가

#연작소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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