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밥 됩니까 - 여행작가 노중훈이 사랑한 골목 뒤꼍 할머니 식당 27곳 이야기
노중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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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훈이란 여행작가를 신뢰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요즘은 잘 못 듣지만, 예전에 차량으로 출퇴근할 때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가끔 그가 출연해서 입담을 발휘하는 걸 자주 들었었다. 전국구로 다니는 그는 어느 곳을 가든 자동적으로 '거기에 가면 여기를 들러야 한다'는 식의 놀라운 기억력을 자랑했고, 방송에 적합한 중후한 목소리와 대화에 묻어나는 소탈한 면모가 좋았다. 라디오의 특성상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먹성 좋고, 사람도 좋고, 적당히 풍채도 좋은 아저씨를 연상했었다.

여행하면 관광지도 좋지만, 식도락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세상이다. 더구나 해당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가 있다면 먹방 투어도 마다하지 않는 게 요즘 사람들이다. 이런 세태를 잘 아는 노중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전국구 식당들을 소개한 <식당 골라주는 남자>라는 책이 몇 년 전 나왔고, 공저로 이름을 올리진 않았으나 박찬일이 쓴 <백년식당> 시리즈에는 저자의 동행으로 박찬일과 마주 앉아 '백년식당'들을 섭렵했다. 사진도 찍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결정적인 트리뷰터 역할을 한 것이다.

이번에 <할매, 밥 됩니까>라는 신간을 가지고 돌아왔다. 부제는 '여행작가 노중훈이 사랑한 골목 뒤꼍 할머니 식당 27곳 이야기'다. 그는 미슐랭 가이드에 오를만한 격조 있는 '힙'하고 '핫'한 식당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시선은 늘 도심의 외곽, 변두리를 지키면서 오랜 시간 서민들의 영혼을 다독여준 다 쓰러져가는, 간판도 다 낡아빠진 그런 식당들로 향하는데, 이번 책에도 그런 기조는 여전하다. '할머니 식당'이라고 아예 명명을 했는데 대부분 규모는 크지 않고 할머니 혼자, 아니면 기껏해야 남편이 돕는 정도의 식당으로 그들의 반평생 이상을 바친 식당들이 그 대상인데, 지역은 전국구요 가게는 식당뿐 아니라 분식집, 다방, 제과점, 가맥집을 망라한다.

'얼마나 더 하실 수 있겠냐'는 저자의 질문에 식당 주인 할매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겠다'라고. 침몰하는 배에서 결코 내리지 않겠노라는 선장의 결기가 느껴진다.

아쉽게도 책에 나온 식당 중에서 벌써 영업이 종료된 곳도, 종료가 예정된 곳도 있다. 혹시라도 이 식당들을 순례하고자 하는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겠다.

사연 없는 인생이 있겠는가? 책에 나온 할매 또는 어머니들의 인생사를 보면, 가진 거 없고 배운 거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어 밥집을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연차가 늘어가면서 그냥 눈뜨면 식당으로 출퇴근하는 삶이 이어졌고, 다행히 단골들의 우레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밥은 먹고살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감사한 일일뿐 더 큰 욕심은 없다. 이들이 SNS나 유튜브를 알겠는가? 설사 안다 하더라도 자기 식당이 어느 날 갑자기 손님으로 미어터지는 일이나, 보다 상업적인 프랜차이즈로 변하는 꼴은 못 볼 분들이다. 그렇게 해서 돈은 더 벌 수 있을지언정 단골들 대접이 소홀해지고 본인들 몸이 피곤해지는 건 못할 짓이다. 전화 예약을 해야 하지만, 너무 전화가 많이 올까 봐 간판에 번호가 지워져도 그냥 놔두는 분들이다. 그래도 알만한 분들은 찾아서 온다. 그냥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음에 무한 감사를 해야 하는, 그 존재만으로 은혜로운 공간이다.

"...할머니떡볶이가 '혜자스러운 떡볶이' '가성비 맛집' 따위의 가격 일변도로 기억되는 게 싫어서다. 특히 '가성비'는 너무 즉물적이고 아주 차갑고 대단히 고약한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40여 년을 우리 곁에 머문 소중한 공간이 '1000원짜리 한 장이면 떡볶이 먹을 수 있는, 가성비 쩌는 곳'으로만 추억되는 건 좀 서글프지 않은가." - P 272

가성비라는 표현을 싫어하는 노중훈의 의도는 잘 알겠다. 그러나 여기 나온 식당들을 가성비라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아니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누추한(?) 인테리어, 본인들이 직접 재배하거나 만드는 엄선된 재료, 아낌없는 주는 인심(이렇게 장사해도 남는 게 있나요?), 오랜 기간 동안 최소한의 인상으로만 버틴 착한 가격, 외길 인생에서 나오는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손맛... 가성비란 단어가 다소 천박하다면 각자 그 분위기를 연상해 보시라.

"근데 왜 이렇게 싸게 하세요?"

"싸게 해서 고마 치아뿌지 그거뭐. 밥을 파는 사람들은 너무 이익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음식은 자격증 따서 되는 음식이 아닙니다." - 정희식당, P 200, 202

미슐랭에 목숨 걸고, 프랜차이즈화에 몰두하는 세태에 본인 이름을 걸고 장사하는 정희식당 어머니는 큰 가르침으로 일갈한다.

미각을 글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포실한, 쿰쿰함, 보동보동한, 짭조름, 녹녹하게, 개결한, 맵고 싸한, 폴폴 솟는, 달큼했고, 구뜰한, 녹진함, 쌉싸래함...' 이토록 다양한 언어로 할머니 식당의 신묘한 맛을 표현해내려 애쓴다.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저자가 어떤 식당을 가서, 어떤 음식을 먹든 자동으로 연발하는 감탄사다. 저자는 혹시 식당들의 문턱을 넘으면서 이미 무장해제된 것은 아닐까? 정서적으로 이미 완패의 분위기?

허름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보는 추억의 맛은 마력을 지녔고, 거기다 주인장과 나누는 정감 어린 교감은 MSG가 첨가되지 않은 자연 친화적이다. 먹성 좋고 붙임성 좋은 그는 다방에 가서도 몇 시간 만에 백반을 받아먹고, 식당 어머니가 십 년에 한번 말까 하는 김밥을 얻어먹는 신공을 지녔다.

등장한 식당들을 활자와 사진으로만 보기 아쉽다면, 저자가 직접 출연하는 방송 "노중훈의 할매와 밥상"을 시청하면 된다. 책에 등장한 많은 식당들이 대략 10여 분 분량으로 올라와 있다.

소위 맛집의 변별력이 많이 떨어졌다. 먹방 관련 프로그램도 지나치게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어디어디 방송에 나왔다는 사진 액자가 왠만한 식당에는 장식처럼 걸려 있다. 여기에 대한 뒷말도 많고. 오히려 그런 액자가 아마도 거의 걸려 있지 않을 이 책의 할매 식당들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나는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않아.

여긴 내 삶의 현장이야." - 성원식품, P 116

이곳들은 어머니들의 삶의 현장이요, 지나간 고단한 세월이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들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주린 배를 맛깔난 소울푸드와 푸근한 인정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녹진한 공간이다. 괜히 뭐 인스타에 올릴 거 없나 기웃기웃 대는 건 지양해야 한다.

"<할매, 밥 됩니까>는 맛집 책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맛집'이란 단어를 좋아하지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온 식당들을 찾아가 음식 품평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외람되지만 <할매, 밥 됩니까>가 우리 이웃의 노동기勞動記로 읽히면 좋겠습니다." - 들어가며, P 11

우리는 저자의 집필 의도를 최대한 존중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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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미래보고서 2021 - 온택트, 언택트 시대의 콘택트 기술
현경민 외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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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래 예측서가 큰 인기다. 그것도 중장기 전망을 하는 게 아니라 1년 단위로 세분화된 트렌드 예측서가 인기를 끌고 서점가에서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모바일 미래보고서" 시리즈도 작년 2020에 이어 내년 판이 작년보다 훨씬 빠르게 출간되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았던 코로나는 우리 일상에 정박했다. 이런 예측은 당연히 작년 보고서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제 코로나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2020년 누구나 느꼈던 삶의 변화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바라지 않았던 결과값이었다.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진 시대, 변화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고, 가장 관련이 많은 분야가 바로 "모바일"로 대표되는 IT 기술이 아니겠는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올해를 대표하는 단어는 비대면, 언택트(Untact)였다.

<모바일 미래보고서 2021>은 온택트(Ontact)를 화두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언택트 시대에도 사람들이 갈구하는 연결, 콘택트 기술을 온택트로 정의한다. 온택트는 '뉴 노멀'로 급격히 자리를 잡았는데, 간단히 한 줄로 "'접촉'시대의 종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연결'이 시작된다!" 정리할 수 있겠다.

작년에는 9개 분야로 항목을 구분했었는데, 올해는 "AI / 스마트 디바이스 / 커머스 / 디지털 마케팅 / 빅데이터 / 금융" 6개 분야로 나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직까지 생소한 용어들(특히 영어 약자)이 소개되지만, 본문 속에서 모두 해설이 자연스레 되어 있고, 다양한 도표, 사진 등 시청각 자료가 풍부하다.

♣ AI -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주변에 나타난 모든 변화는 AI 없이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컴퓨터로 따지자면 CPU.

기억해 둘 중요한 개념은 DX와 AIX다.

DX =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디지털화

AIX = AI 기반 DX, AI 트랜스포메이션(AI Transformation)

비대면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험'하고 싶어 한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고객의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AI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고객은 자신을 응대하는 주체가 사람인지 AI인지 식별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 스마트 디바이스 - 가뜩이나 본인의 분신처럼 애지중지하던 스마트폰. 이거 하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시대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5G 시대 특수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고, 거기다 코로나 악재까지 겹쳤다.

어느 정도 추가될 기능은 한계가 있다 보니, 이젠 폴더블, 롤러블, T자 폰이니 하는 폼 팩터로 승부를 걸려고 한다.

이래저래 집돌이, 집순이는 늘어만 가고 사람이 움직여서, 만나서 해결해왔던 많은 일들을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시대가 되다 보니 스마트 기기나 PC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한 가정이 많다고 한다. 온라인 수업의 여파도 상당하고, 결국 속도는 빠르고 안정적이면서도 화면은 큰 기기를 원하게 된다.

스마트 디바이스에 대한 현대인의 의존도는 높아갈 일만 있다. 눈을 보호해야 할 때다.

♣ 커머스 - 오프라인 매장은 직격탄을 맞았고, 과거 유통망은 비용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됐다.

온라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게 대세임은 알겠으나, 이미 여기에도 선구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데다 누구나 이쪽으로 기웃기웃 대다 보니 시장이 완전 레드 오션이 돼 버렸다. 어쨌든 '오프라인 〈 온라인'의 추세는 가속되고 피 튀기는 경쟁을 통해 적자생존의 피라미드 재배열이 이루어지리라 예견된다.

온라인 커머스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스트리밍을 통해 쇼핑한다는 뜻의 숍 스트리밍(쇼핑 Shopping + 라이브 스트리밍 Live Streaming)을 꼭 기억하자. 국내에도 발 빠른 스타트업 회사가 서비스를 개시했다. 쉽게 이해하자면 TV 홈쇼핑을 모바일로 옮겼다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일정 시간 방송하고 마감하는 절판 마케팅을 기반으로 하는 홈쇼핑과 달리 숍 스트리밍은 원하면 반복 시청·구매도 가능하고, 매출은 높지만 가혹한 비용 부담으로 원성이 자자한 홈쇼핑보다 저렴한 수수료가 큰 강점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변화가 빠르다 보니 또 다른 새로운 서비스가 언제든 론칭될 수도 있다. 이런 서비스를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인생 '게임 오버'다.

♣ 디지털 마케팅 - 과거 4대 매체(TV, 신문, 라디오, 잡지) 광고를 뜻하는 ATL(Above The Line)의 위세는 쇠퇴하고 대세는 디지털 마케팅이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3년 이내에는 디지털 광고가, 10년 이내에는 모바일 광고가 전체 광고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 P 169

ATL / BTL(Below The Line)로 구분했던 전통적인 마케팅 방식에서 최근에는 페이드 미디어(Paid Media - 다른 매체에 돈을 지불하는 광고), 오운드 미디어(Owned Media -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매체), 언드 미디어(Earned Media - 소셜미디어와 같이 고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만 통제 가능성은 떨어지는 마케팅 채널)로 옮겨가고 있는데, 2000년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언드 미디어가 이제는 미디어의 한 축이 되었다.

♣ 빅데이터 - '21C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원유가 아니라 데이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데이터의 수집부터 활용, 가공을 통한 재판매까지, 데이터 관련 산업은 계속 발전하여 커다란 밸류체인을 형성하리라는 예상은 시대의 흐름이며, 우리나라는 2020년 8월 5일 데이터 3법 개정안 시행으로 '데이터 이코노미'는 더욱 탄력받을 것으로 점쳐진다. 이 발전과정에서 네이버 '각'과 같은 첨단 데이터센터 설립은 필수적이다.

빅데이터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스몰 데이터'도 기억해 두자. 개념을 창시한 미래학자 마틴 린드스트롬에 따르면 수많은 원소스로부터 기계적으로 분석·도출한 빅데이터에 비해, 풍부한 통찰력과 고객과의 접촉을 기반으로 한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특정 자료를 스몰 데이터로 칭하고 이런 정보야말로 정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 금융 - 기존 은행들은 비대면 온라인 서비스를 강화하고, 인터넷전문은행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실버 연령대까지 이제 간단한 입출금 업무는 모바일 뱅킹으로 처리하지만 기대를 모은 오픈뱅킹 서비스는 이제 시작 단계고, 인터넷전문은행은 기존 금융권에서 대면으로만 진행이 가능했던 대출 업무까지 비대면으로 전환했고 성과를 내고 있다. 제3의 인터넷전문은행 토스뱅크가 설립되고 제대로 된 '메기 효과'를 기다려본다. 아울러 공인인증제도 폐지로 사설 인증 시장도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금융권과 기존 플랫폼의 결합은 화이트 라벨링(다른 회사가 생산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자가 자신의 브랜드를 사용해 고객에게 판매 및 제공하는 것. EX - 네이버통장(미래에셋대우), 대한항공 카드(현대카드))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금융산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금융 서비스의 주도권이 기존 금융회사에서 핀테크 기업과 플랫폼 회사로 넘어가는 트렌드를 잘 보여 준다.

변화는 정신없이 빠르고 심각하다. 편의상 6개 분야로 나누어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코로나'라는 상황 변수는 우리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선사했고, 변화의 선봉은 모바일임을 확실히 깨닫게 하는 <모바일 미래보고서 2021>이다. 또 다른 한 해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내년을 예의 주시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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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의 품격은 말투로 완성된다 - 말 따로 마음 따로인 당신을 위한 말투 공부
김범준 지음 / 유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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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생 100세 시대라지만 50이면, 이젠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고 '말투' 관련 서적 몇 권을 낸 김범준에게 50 평생 가장 중요한 교훈은 말로써 나를 표현하는 방법, '말투'라는 깨달음이다.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 하는데, 세치 혀로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불편함 혹은 불쾌감을 준 저자의 후회가 이 책을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부제는 "말 따로 마음 따로인 당신을 위한 말투 공부"고, 간단한 요약은 이미 표지에 되어 있다.

"핀잔이 아닌, 격려의 말투를!

자만이 아닌, 겸손의 말투를"

예로부터 선현들은 '언행일치'라 하여,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를 경계했다. 이 말속에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을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며,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내실 없이 입만 나불대는 사람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말이 많은 자보다는 말수가 적은 자가 대접받았다.

누구나 생각한 바는 뇌를 거쳐 말로 최종 표현된다. 축구로 보자면 마지막 골문을 여는 행위가 곧 말인 셈이다. 어부지리로 골을 넣을 수 없듯이 그 사람의 말투, 화법, 사용하는 단어 등을 보면 어느 정도 지적 수준은 물론 사람 됨됨이마저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마음 따로 말 따로가 아니라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얕잡아 보는 사람에게서 존중이 담긴 말투가 나오진 않는다. 마음 수양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냥 본인 감정이 나오는 바대로 걸러지지 않은 거친 감정 표현이 말로 쏟아져 나올 확률이 크다.

"당신이 먼저 말해보시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오." - P 7

말투는 곧 그 사람이다. 말이 곧 나다.

너나 할거 없이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하고 누군가 본인 얘기에만 귀 기울여 주길 바란다. 상대에겐 '좋아요'를 주지 않으면서, 나만 '좋아요'를 기대하는 심보다. 당장 TV를 켜고 고명한 패널들이 어떤 방식으로 토론 프로그램에 임하는지 시청해 보라. 그렇다면 말하는 자(Speaker)보다 듣는 자(Listener)가 된다면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지 않을까?

"말하는 건 기술이고 듣는 건 예술이다." - P 169

이 책은 말투나 화법에 관한 전술에만 치중하진 않는다. 왜냐면 말투는 최종 결과물이고 이에 앞서 본인의 인격 수양이 먼저 솔선수범돼야 하기 때문이다. 말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50대라면 생각해 봐야 할 자기 계발서에 가깝다. 여기저기서 많이들 말하는 교훈처럼,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과거에는 'A+'의 삶만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B+'의 결과도 감사히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현실 타협하고는 조금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과거보다 관대하고 긍정적일 필요가 있다.

나이에 걸맞은 정갈한 말투만 구사해도 매력 자본 수치는 급상승한다. 최소한 남한테 기피 인물로 낙인찍히거나 갈등을 조장하진 않는다. '라테는 말이야'로 대표되는 왕년 얘기는 이제 그만(주위 사람 누구도 '당신의 왕년'엔 관심이 없다),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는 꼰대 짓은 자기 자식도 반기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깨닫자.

어디선가 들은 이 말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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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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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민의 표지 일러스트가 인상적인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타인에 대한 연민>은 세계적인 석학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이 쓴 책이다. 앞서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이 분을 알게 되었는데, 교육 문제를 다룬 그 책과 이번 책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는 미국의 저명한 노철학자가 다루는 범위가 그만큼 폭넓고 사회 전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음을 반증한다.

또한 이 책의 원제는 <The Monarchy of Fear : A Philosopher Looks at Our Political Crisis>(두려움의 군주제 :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군주제'라는 용어는 그다지 피부에 와닿는 표현은 아니지만, 부제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왜냐면 다수의 저작을 발표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바로 2016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밤 느꼈던 통렬한 무력감이 기반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깨어있는 지성, 마사 누스바움 교수에게도 트럼프 당선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역사의 후퇴였던 모양이다. 이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원인을 고찰하게 되었고, 곧바로 이틀 밤 동안 작업하여 블로그에 올릴 장문의 글이 마무리되었고, 출간 제안으로 발전했다. 미 대선 당시 '썰전'이란 시사 프로에서 전원책 변호사가 트럼프의 승리를 예견했을 때 '무슨 말도 안 되는...'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그야말로 '뜨악'이었다. 아시아의 먼 나라에 사는 내게도 이런 충격이 전해졌는데 미국인 저자에게 전해진 충격파는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두려움 'Fear' 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 두려움은 세대 간, 계층 간, 정파 간 갈등을 야기하게 되고, 저자는 증오, 혐오,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두려움의 영향을 받을 때 특히 위험해지는 세 가지 감정 '분노, 혐오, 시기'에 대해 살펴본다.(저자의 전작 목록 <혐오와 수치심>, <혐오에서 인류애로>, <분노와 용서> 등을 보면 마사 교수가 '혐오', '분노'란 감정에 얼마나 학술적으로 현미경을 갖다 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혐오' 전문가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왜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어떻게 트럼프의 막말이 선거에서는 효과를 보았는지 '트럼프주의'에 대해서 알게 된다. 일부 엘리트 계층을 제외한 미국 주류(로 믿어왔던) 백인 노동자 계급의 불안한 사회경제적 지위는 공공연하게 여성 혐오를 들먹이고, 이슬람 전체가 위험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한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의 선택은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높아 보였던 힐러리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삶 앞에서 쉽사리 두려움이란 감정에 잠식당한다. 그래서인가 독일 영화감독 파스빈더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걸작을 남겼다. 이 두려움은 종종 타인(기득권 또는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 분노, 비난과 뒤섞이고, 이성적 사고와 건설적 협력 대신 손쉬운 타자화 전략을 선택해 나와 타인의 날선 경계를 짓게 한다. 안 그래도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던 소수자 집단이 지목되고 사람들의 두려움은 그들에게 투사된다. 주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존재들에게 혐오의 화살이 집중된다. 공격해도 별다른 반격을 하지 못할 존재들이고, 아무래도 사회의 주류는 아니니까. 역사적으로는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하층 계급 사람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고, 현대 미국에선 인종 차별, 여성, 동성애, 무슬림 혐오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국 역시 새터민, 조선족,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 장애인들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아니다. 사회의 축소판 교실에서 일어나는 왕따의 대상도 이 분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많은 이가 읽었을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는 나무>에 숨겨진 함의를 지적하는 통찰은 통렬하다. 몸통, 가지, 열매까지 모두 소년에게 주고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사과했던 나무는 엄마로 대표되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저자에게는 여성을 그들의 자리에 가두어 놓고, 남성들의 욕구를 지원하고 삶을 바치길 바라는 우화이기에 전혀 교육적이지 않고, 인간적으로 더 흥미로운 부분에 집중하기가 힘들단다. 한 권의 책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시각이다.

현대 정치가 왜 이리 개판(!)이 되었나 감정적, 철학적 고찰과 원인 분석으로만 끝나지 않고 저자는 여기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하면서 책을 매조진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영역이 있다. 시와 음악을 비롯한 예술, (교육 기관이나 다양한 토론 집단의) 비판적 사고,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실천하는 종교 단체, 폭력을 지양하고 대화로 정의를 추구하는 연대 단체, 그리고 (그런 단체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정의에 대한 이론들이다. 각각의 영역에는 좋은 예는 물론 나쁜 예도 있지만 다섯 가지 모두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 - P 270~271

최근 여러 가지로 한국 정치에 실망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정치계에 투신한 분들이 읽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 책의 분석을 한국 상황에 대입해도 큰 무리는 없다.

교과서적인 이야기겠으나, 최하층 약자들을 분리하고 악감정을 그들에게 배출하는 사회보다는 그들을 지원하고 돌보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가 훨씬 선진화된 살만한 곳 아니겠는가?

늘 그렇듯 이론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늘 그래왔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민주주의는 자기중심성과 편협한 시각을 극복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의미 있는 서사를 창조하려는 싸움이었다." - P 292


부제 그대로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빼곡히 담은 <타인에 대한 연민>은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면서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국내에서 번역한 책 제목은 지나치게 연성화되어 있으나 이는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책을 집어 들어선 안 된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답게 단어 하나하나 격조가 있고, 내용은 한 줄도 허투루 작성된 게 없고 심오하다. 책의 모든 내용을 자기 것으로 하기가 쉽지 않단 얘기다. 정독해서 읽고, 때때로 다시 읽어 마사 누스바움의 내공을 조금이라도 더 내 것으로 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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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 탐정 마환 - 평생도의 비밀
양시명 지음 / 몽실북스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평생도는 높은 벼슬을 지낸 양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사의 기념이 될 만한 장면들을 엮어 그린 그림이란 뜻이오. 고관대작은 돼야 자신의 평생도를 남길 수 있소. 요새로 치면 업적이 출중한 공직자의 자서전 같은 거니까. 노비에게 남길 업적이란 게 있을 턱이 없잖소." - P 32

부제 "평생도의 비밀"에 드러나듯, 양수련의 <바리스타 탐정 마환>은 고관대작들의 호사, 그림으로 만든 자서전 '평생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는 평생도는 흔한 양반의 그것이 아닌 노비의 평생도다. 양반들의 전유물이고, 감히 노비들은 넘보아서는 안 될 평생도를 누가, 왜, 무슨 까닭으로 남겼을까?

1892년 조선 후기에서 시작하여 현대를 넘나들며, 백년의 시공간을 초월해서 이야기는 유장하게 전개되며, '평생도의 비밀'에는 주인공 바리스타 탐정 마환과 그의 짝패인 유령 할도 단지 사건 해결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홀로서기를 한 마환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더욱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평생도에 얽힌 애끓는 부성애와 평생도를 향한 시대를 불문한 인간의 탐욕이 대꾸를 이루면서 비극적인 서사시를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탐정으로서 마환의 활약은 미비하고, 살인은 대단원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기능한다.

신선하다!

앞서 말했듯, <바리스타 탐정 마환>은 '탐정'이라는 표제어, 전작 바리스타 탐정 마환 연작 <커피유령과 바리스타 탐정>과의 연관성, 국내 장르소설의 명가로 자리 잡은 몽실북스 발행으로 편의상 추미스로 분류하지만, 그 내용은 굳이 장르물의 좁은 테두리에 가두지 않아도 좋다. 추리 요소보다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평생도의 이야기가 신박한 상상력에 힘입어 독자들을 즐겁고 색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오히려 장르물이 아닌 일반 소설을 즐기는 독자들에게도 소구할 수 있는 매력 있는 작품이라 본다. '나는 피비린내 나는 장르물은 안 보거든' 하고 넘어갈까 봐 조바심이 난다.

고만고만한 추미스에 질린 장르물의 외연을 조선 후기 민화 평생도로 소재를 확장했다는 점과 이를 빼어난 스토리텔링으로 완성한 안정적인 필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미스터리하면서 흥미로운 감동의 서사! 새로운 시도는 박수받아야 마땅하고, 계속되어야만 한다.

"바리스타 탐정 마환" 시리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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