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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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민의 표지 일러스트가 인상적인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타인에 대한 연민>은 세계적인 석학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이 쓴 책이다. 앞서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이 분을 알게 되었는데, 교육 문제를 다룬 그 책과 이번 책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는 미국의 저명한 노철학자가 다루는 범위가 그만큼 폭넓고 사회 전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음을 반증한다.

또한 이 책의 원제는 <The Monarchy of Fear : A Philosopher Looks at Our Political Crisis>(두려움의 군주제 :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군주제'라는 용어는 그다지 피부에 와닿는 표현은 아니지만, 부제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왜냐면 다수의 저작을 발표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바로 2016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밤 느꼈던 통렬한 무력감이 기반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깨어있는 지성, 마사 누스바움 교수에게도 트럼프 당선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역사의 후퇴였던 모양이다. 이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원인을 고찰하게 되었고, 곧바로 이틀 밤 동안 작업하여 블로그에 올릴 장문의 글이 마무리되었고, 출간 제안으로 발전했다. 미 대선 당시 '썰전'이란 시사 프로에서 전원책 변호사가 트럼프의 승리를 예견했을 때 '무슨 말도 안 되는...'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그야말로 '뜨악'이었다. 아시아의 먼 나라에 사는 내게도 이런 충격이 전해졌는데 미국인 저자에게 전해진 충격파는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두려움 'Fear' 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 두려움은 세대 간, 계층 간, 정파 간 갈등을 야기하게 되고, 저자는 증오, 혐오,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두려움의 영향을 받을 때 특히 위험해지는 세 가지 감정 '분노, 혐오, 시기'에 대해 살펴본다.(저자의 전작 목록 <혐오와 수치심>, <혐오에서 인류애로>, <분노와 용서> 등을 보면 마사 교수가 '혐오', '분노'란 감정에 얼마나 학술적으로 현미경을 갖다 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혐오' 전문가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왜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어떻게 트럼프의 막말이 선거에서는 효과를 보았는지 '트럼프주의'에 대해서 알게 된다. 일부 엘리트 계층을 제외한 미국 주류(로 믿어왔던) 백인 노동자 계급의 불안한 사회경제적 지위는 공공연하게 여성 혐오를 들먹이고, 이슬람 전체가 위험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반복한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의 선택은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높아 보였던 힐러리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삶 앞에서 쉽사리 두려움이란 감정에 잠식당한다. 그래서인가 독일 영화감독 파스빈더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걸작을 남겼다. 이 두려움은 종종 타인(기득권 또는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 분노, 비난과 뒤섞이고, 이성적 사고와 건설적 협력 대신 손쉬운 타자화 전략을 선택해 나와 타인의 날선 경계를 짓게 한다. 안 그래도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던 소수자 집단이 지목되고 사람들의 두려움은 그들에게 투사된다. 주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존재들에게 혐오의 화살이 집중된다. 공격해도 별다른 반격을 하지 못할 존재들이고, 아무래도 사회의 주류는 아니니까. 역사적으로는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하층 계급 사람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고, 현대 미국에선 인종 차별, 여성, 동성애, 무슬림 혐오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국 역시 새터민, 조선족,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 장애인들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아니다. 사회의 축소판 교실에서 일어나는 왕따의 대상도 이 분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많은 이가 읽었을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는 나무>에 숨겨진 함의를 지적하는 통찰은 통렬하다. 몸통, 가지, 열매까지 모두 소년에게 주고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사과했던 나무는 엄마로 대표되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저자에게는 여성을 그들의 자리에 가두어 놓고, 남성들의 욕구를 지원하고 삶을 바치길 바라는 우화이기에 전혀 교육적이지 않고, 인간적으로 더 흥미로운 부분에 집중하기가 힘들단다. 한 권의 책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시각이다.

현대 정치가 왜 이리 개판(!)이 되었나 감정적, 철학적 고찰과 원인 분석으로만 끝나지 않고 저자는 여기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하면서 책을 매조진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영역이 있다. 시와 음악을 비롯한 예술, (교육 기관이나 다양한 토론 집단의) 비판적 사고,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실천하는 종교 단체, 폭력을 지양하고 대화로 정의를 추구하는 연대 단체, 그리고 (그런 단체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정의에 대한 이론들이다. 각각의 영역에는 좋은 예는 물론 나쁜 예도 있지만 다섯 가지 모두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 - P 270~271

최근 여러 가지로 한국 정치에 실망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정치계에 투신한 분들이 읽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 책의 분석을 한국 상황에 대입해도 큰 무리는 없다.

교과서적인 이야기겠으나, 최하층 약자들을 분리하고 악감정을 그들에게 배출하는 사회보다는 그들을 지원하고 돌보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가 훨씬 선진화된 살만한 곳 아니겠는가?

늘 그렇듯 이론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늘 그래왔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민주주의는 자기중심성과 편협한 시각을 극복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의미 있는 서사를 창조하려는 싸움이었다." - P 292


부제 그대로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빼곡히 담은 <타인에 대한 연민>은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면서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국내에서 번역한 책 제목은 지나치게 연성화되어 있으나 이는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책을 집어 들어선 안 된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답게 단어 하나하나 격조가 있고, 내용은 한 줄도 허투루 작성된 게 없고 심오하다. 책의 모든 내용을 자기 것으로 하기가 쉽지 않단 얘기다. 정독해서 읽고, 때때로 다시 읽어 마사 누스바움의 내공을 조금이라도 더 내 것으로 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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