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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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과 2019년 부커상을 공동 수상한 버나딘 에버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부커상 최초의 흑인 여성 수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소설은 영국에 정착한 흑인 여성들의 '아프리칸 디아스포라'를 12명의 삶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12명의 간략한 인생사가 한 챕터씩을 이루며, 이를 따라가다 보면 영국 흑인 여성들의 거대한 벽화를 완성하게끔 구성되었다. 저자와 가장 닮은 꼴인 앰마를 비롯해서 아마도 주변인들과 그들의 증언을 통해 소환된 많은 인물들이 결합되어 12명의 이름이 명명되었으리라. 대략 150여 년의 시간을 살아내는 12명의 여성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몇 단계를 연결하면 누구와도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여기서 그런 관점이 아니라 각자 개별 서사인 밑그림을 연결해 결국 모두가 주인공인 '우리', 흑인 여성들의 큰 그림을 바라보게끔 하는 의도로 소설을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제1장을 여는 첫 번째 주자 앰마는 야즈의 엄마요, 도미니크의 절친이자 셜리의 친구이기도 하다. 셜리의 가장 성공한 제자가 캐럴이며, 캐럴의 엄마가 버미요 라티샤는 캐럴의 친구다... 이런 식으로 계보를 만들어낼 수 있게끔 이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영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애당초 원주민은 아니었다. 이들의 선조는 나이지리아, 아비시니아(현재의 에티오피아), 바베이도스 등 다양한 지역에서 흘러들어왔고 세대가 바뀌면서 다양한 혼혈이 되었으나 영국 사회에서 언제나 비주류의 입장에서 차별당하고 멸시 속에서 생활을 이어왔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에다, 아직까지 굳건한 남성 위주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야 하고, 게다가 일부는 레즈비언의 성적 취향까지 지녔으니 이들의 인생은 고난과 수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운명의 파트너 은징가를 만나 미국까지 갔지만 결국 그녀의 경악스러운 참모습을 보게 된 도미니크, 10대의 나이에 집단 성폭행을 당한 캐럴, 각기 아빠가 다른 3명의 자녀를 키우는 미혼모 라티샤, 생모가 누군지 모르는 퍼넬러피, 세상에 남/녀로만 구분되는 성(性, SEX) 정체성에 반기를 들고 '그네'의 삶을 살기로 한 메건/모건...

누구 하나 호락호락한 인생사가 없다. 하지만 이들 12명은 사회의 편견과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뤘다는 공통점이 있다. 태생부터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삶을 포기하거나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에 반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본인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으로 당당히 세상에 맞서서 투쟁하고 인생의 열매를 얻어낸다. 소설의 감동은 여기서 온다.

이 소설은 운문 형태를 띠는 산문으로, 문장 부호 사용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을 '퓨전 픽션 fusion fiction'이라고 일컫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형식으로 설명하자면 일종의 산문시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흐르는 문장이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이렇게 자유롭게 흘러가는 문체 덕분에 작가는 인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과거와 현재를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 옮긴이의 말, P 631

책 읽기에 곤란한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소설의 서사와는 다르기에 익숙하진 않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음식을 비롯한 문화적인 코드도 대부분 생소해서 체감되는 느낌은 덜 했다. 페미니스트의 주장도 과격함에 있어서 정도가 많이 다르고, 기껏해야 성적 소수자란 LGBT 정도 아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분류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작가가 12명의 인물을 창조했다기 보다, 12명의 인물이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글을 통해 자신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는 흔하지 않은 독서 경험을 제공하는 이 책은 영국에 사는 흑인 여성들의 한풀이 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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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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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애묘인들이 많은 세상에서는, 기겁할 제목의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가 그다지 추억거리가 많지 않은 아버지를 회상하는 99쪽의

짧은 에세이다.

다양한 산문을 출간한 하루키지만 가족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던 걸로 아는데, 이번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글을 모아 가오 옌의 추억 돋는 일러스트와 함께

포켓 사이즈의 소책자로 출간되었다.

아무래도 글의 성격이나 문장의 결이 다른 책과 함께

엮이기는 어려워 독립된 책으로 나왔다는 게 출판의 변이다.

'하루키'가 도서명에 포함된 모든 책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그의 팬들에게는

하루키의 가장 내밀한 속내음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된다.



사람의 행위에는 대부분 계기가 있고, 목적이 있다.

하루키의 부모님은 모두 교사였고, 특히 아버지는 꽤 훌륭한 교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외아들인 하루키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다지 살갑지 않아

하루키가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는 거의 절연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고,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대화도 연락도 하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다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에야 겨우 얼굴을 마주했다고 한다.

그랬던 하루키가 왜 아버지 이야기를 들고 나왔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암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러 해변으로 간

에피소드로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와의 추억 여행은 시작된다.

다행히 버려진 그 고양이는 어찌 된 일인지 무라카미 부자보다 빨리

집에 도착해서 부자의 안도감(!)을 이끌어냈다.

무라카미 지아키는 2차 대전 무렵 무려 3번이나 징집되었으나

용케 살아남았고 당시 보고 겪은 일들을 뜨문뜨문

아들 하루키에게 전했다.

그중 중국 병사가 처형된 모습을 목격한

기억은 가장 강렬하게 저장되어 있다.


하루키는 부친의 사망 이후 아버지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관계있는 사람들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듣기도 하는 식으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자신의 핏줄을 더듬는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치열한 전장으로 보내졌다면,

아니면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하루키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지아키는 영화를 좋아해서 아들과도 극장 나들이를 자주 했고,

타이거스 팀이 지면 몹시 언짢아할 정도로 열렬한 한신 타이거스 팬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하이쿠를 좋아해서 직접 자작도 많이 한 문학도였다.

어느덧 슬슬 부친이 사망한 나이에 점차 다가가는 하루키는

특유의 무덤덤한 쿨한 어조로 아버지를 추억한다.

어쨌거나 육신의 반은 지아키에게서 왔고,

이 책에서 그다지 큰 비중은 아니지만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살짝 보인다.

하루키의 문재(文才)와 야구 사랑은 그냥 뚝 떨어진 건 아닐 거다.

이유 있고 의미 있는 내적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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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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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는 학대받은 여자들의 피난소 '여성 궁전'이란 곳이 있다. 그곳은 노숙자, 매 맞는 아내, 야만적인 할례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온 아주머니들 '타타' 등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을 유지시켜주는 고마운 공간이다. 여기에 잘나가는 변호사였다가, 패소한 의뢰인이 눈앞에서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번-아웃 증상이 와 삶의 쉼표가 필요한 솔렌이 자원봉사를 하러 온다. 처음엔 살아온 환경이 극과 극이라 마음의 한구석조차 내어주지 않던 이들은 점차 서로를 보듬는 관계가 되고, 이 과정에서 솔렌도 자신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된다.

"그중에는 심각한 병이 있는 이들도 있어요. 알코올 의존증이나 마약 중독 문제를 지닌 경우도 있고요. 또 과도한 빚에 짓눌린 사람들도 있죠."

과거 매춘부였다가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범죄자로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들, 장애 때문에 경제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다양한 경로로 프랑스 땅을 밟은 이주민 혹은 난민 여성들도 있었다." - P 70

소설의 다른 한 축은 '여성 궁전'의 설립자인 구세군 블랑슈 페롱의 이야기로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이런 거룩한 공간이 생기게 되었는지 1925년부터 시작해서, 공간이 설립된 '26년을 거쳐 블랑슈의 마지막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친 아낌없는 헌신과 봉사가 그려진다. 이 건물터는 과거 은거 수녀 공동체가 운영하던 수도원이 있던 자리로, 풍문에 의하면 17세기 유명한 문필가였고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주인공인 시라로 백작이 여기 궁전 아래 묻혀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결핍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거든요. 가족의 식탁에서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는 사람이 늘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 P 205


세상에는 뭔가를 창작해야만 하는 드물지만 축복받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을 쓴 래티샤 콜롱바니가 그렇다. 국내에 소개된 오드리 토투 주연의 <히 러브스 미>를 만든 영화감독이기도 하며,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건 물론이고 가끔 출연까지 한다고 한다. <여자들의 집>은 <세 갈래 길>에 이은 콜롱바니의 두 번째 소설이다.

굳이 '페미니즘'이란 좁은 틀로 구속하지 않아도 될 빼어난 여성 서사다.

'여성 궁전'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여성들의 다양한 사연은 여성 작가의 손끝에서 커다란 공감과 따뜻한 연대로 마무리된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갈 처절한 여성의 삶은 분노를 자아낸다. 아직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관습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여성 할례, 같은 노숙이라도 여성 노숙자는 늘 성폭력의 위험에 놓여있고,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도 남편의 폭력은 부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주위 사람에 대한 신경질로 존재의 이유를 찾던 '상처 입은 짐승'이었던 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저자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건물 거주자는 물론, 자원봉사자들을 만나는 데 1년 이상의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형태로든 취약성을 안고 있고, 저마다 폭력과 무관심을 경험한, 사회의 주변부 최하층에 속한 소설 속 여성들의 이야기는 생생하게 활자로 살아난다.


"여성 학대란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야.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명체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분출하는 이 파괴 욕구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 P 220


한 봉사 단체에서 5년 이상 활동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진실로 도움을 받고 치유가 된 건 내 영혼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솔렌도 사실은 정신적인 피로감과 우울증 극복을 위해 봉사 활동을 도피처로 삼은 거였지만 결국은 본인 자신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는 깨달음과 더불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보여주는 각자의 삶이 정교하게 교차하는 <여자들의 집>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새삼 느끼게 하는 좋은 작품이다. 저자의 데뷔작 <세 갈래 길>이 너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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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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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하나의 가련한 여성 수난사가 기다린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무죄의 죄>!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국내에는 동명의 영화로도 알려진 <이별까지 7일>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다. 모든 작품이 소개된 것은 아니지만, <이별까지 7일>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작가가 추미스가 전공이 아니란 사실이 드러난다. 오히려 <무죄의 죄>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그가 사회파 미스터리의 틀을 빌어온 이단아 성격의 작품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걸 남에게 추천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포함되리라. 서점 직원들이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자체적인 홍보를 해서 차트 역주행을 이뤄내 누적 판매고 50만 부에 이르는 상업적인 성공은 물론, 일본추리작가협회상까지 수상한 게 바로 <무죄의 죄>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다나카 유키노'다. 유키노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수로 복역 중이다.

불우한 가정 환경, 어린 시절에 저지른 범죄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잔혹한 사건을 일으키고도 남을 만큼 비참했던'(P 207) 빗나간 인생처럼 보인다.

"혐오스런 유키노의 인생"

세상 사람들은 드러난 결과만 가지고 쉽게 유키노를 단죄한다.

"그러니까 뭐랄까···. 그래 보이잖아. 딱 봐도." 지들이 무슨 용한 점쟁이라도 되는 듯이.

법정 판결문에 사용된 문구들로 소설은 구성되어 있는데, 왜 이런 구성을 취했는가는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다.

1장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열일곱 살 어머니 밑에서..."

5장 "계획성 짙은 살의를 봤을 때..."

1부 '사건 전야'에는 유키노 탄생의 과정을 아는 산부인과 의사, 이복 언니, 절친, 남자친구의 절친, 유키노 본인의 입을 통해 다나카 유키노가 어떤 사람인지 입체적으로 드러나고, 사건의 전모가 그려진다.

"누군가 슬퍼하면 다 같이 돕기. 이건 언덕 탐험대의 약속이야." - 쇼

"응, 그러자. 내가 모두 지켜줄게." - 유키노

"나도, 나도 모두를 지킬 거야." - 신이치, P 64

2부에서는 어린 시절 언덕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쇼와 신이치의 눈물겨운 우정의 연대가 그려진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생이 있을까? 하찮은 인생이란 없다.

진심으로 자기를 생각해 주는 쇼와 신이치 같은 1~2명의 친구만 있어도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그리고 역시 친구는 어릴 때 찾아야 한다.

"인간은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죽는대." - P 168

묵직하다.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지만 여운이 짙다. 아마도 유키노를 쉽게 보내지 못할 거 같다.

신자는 아니지만 부정한 여인을 눈앞에 두고 하신 예수님 어록이 떠오른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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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을 이야기 - 팬데믹 테마 소설집 아르테 S 7
조수경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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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 S는 하나의 주제 subject를 둘러싼 참신하고 다양한 이야기 story로 구성된 시리즈다. 7번째 책으로 '팬데믹 테마 소설집' <쓰지 않을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200여 페이지의 아담한 포켓 사이즈로 참여 작가는 조수경, 김유담, 박서련, 송지현 4명의 여성 소설가다. 이중 얼굴을 익힌 작가는 <체공주 강주룡>으로 만나 본 박서련뿐이고, 나머지 작가들은 처음 만난다. 신진 작가들이 '팬데믹'이라는 주제로 발 빠르게 움직여 집필한 단편들인데 각각 50여 페이지 분량이다. 비슷한 시기 여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 'SF 앤솔러지' <팬데믹>도 출간되었는데, 소설은 동시대를 가장 빠르게 포착하는 장르이니만큼 팬데믹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을 신속하게 만나 보는 건 무척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거다.

책을 읽기 전 당연히 '팬데믹 = 코로나'로 정의했는데, 수록작들은 반드시 그렇지마는 않다. 코로나를 직접적으로 연관 지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건 앞선 두 편 조수경의 「그토록 푸른」과 김유담의 「특별재난지역」이다.

「그토록 푸른」은 실제 상황이다. 왜냐면 모 택배사의 물류센터에서 감염자가 실제로 발생해서 큰 뉴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꼼꼼한 취재에 힘입어 우리는 새벽 배송 물류센터의 진실을 알게 된다. 편한 택배 배송 시스템 덕분에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아!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정작 물류센터 근로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 않았나. 소설의 주인공은 금번 코로나 사태로 가장 큰 직격탄을 맞은 여행업계 근로자로 설정되어 있고, 어쩔 수 없는 호구지책으로 엄마에게 실직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이들과 함께 물류센터로 흘러들어온다. 절대로 확진자가 나와서는 안되는 이곳의 암묵적인 정서는 주인공이 신체 변화를 느끼는 와중에도 파운데이션의 커버력으로 손색깔을 숨긴다. 아마 십자가를 지기 싫은 다른 근로자들도 똑같은 행위를 했으리라.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바지를 찢고야 만다.

택배 · 물류업체는 호황인지 모르나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은 그만큼 대접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업계의 과열 경쟁으로 택배비는 올리기 힘들다고 하고 이런 수레바퀴 속에서 어려움을 토로한, 대형 업체와 계약했던 소장 한 분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오늘 신문 경제면 머리기사다.

"택배기사 잇딴 사망, '무법지대' 결국 터졌다"(10월 23일 금요일 중앙일보 중앙경제)


「특별재난지역」 역시 현실에 뿌리를 대고 있다. 코로나 초기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오며 연일 매체에 등장했던 청도 대남병원이 언급되며, 소설의 무대는 바로 그 청도다. 치매가 있긴 하지만 먹성 좋은 92세 아버지는 코로나 시기 별다른 대처도 못해보고 사망하고, 자식들은 병원에서 임종을 지켜보기는커녕 고인의 가는 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망한 마지막을 맞이한다. 민감한 시기 장례식장은 텅 비었다.

여기에 곁가지로 손녀의 일탈이 나오는데, 이건 n번방 사건의 연결고리로 읽힌다. 결국 코로나라는 자연재해나 n번방이라는 사회적 병증이나 팬데믹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체공주 강주룡>으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질을 드러낸 바 있는 박서련의 단편 「두」(痘, 천연두 '두')는 한적한 시골 분교에 처음 부임한 생초보 여교사의 이야기다. 순진한 아이들에게 도는 수상한 증상, 이건 여학생에게만 발병한다. 그 원인 제공자는 남자들이다. 5학년 오빠, 삼촌, 할아버지... 역시 n번방 사건의 여파가 느껴진다. 놀라운 건 2명의 여교사도 안전지대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이다.

"강간까지는 아니었어···.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 P 142

오지 학교에 부임한 여선생이 마을 주민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단편이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 보이는 송지현의 표제작은 아쉽지만 특별한 감상이 없다. 어디까지가 사적인 영역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내밀한 개인사가 펼쳐진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라는 팬데믹은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자리 잡았다. 금방 끝나지 않을 듯하고, 끝난다 하더라도 많은 생채기를 남길 수밖에 없다. 촉수가 예민한 소설가들의 분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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