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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평점 :
파리에는 학대받은 여자들의 피난소 '여성 궁전'이란 곳이 있다. 그곳은 노숙자, 매 맞는 아내, 야만적인 할례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온 아주머니들 '타타' 등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을 유지시켜주는 고마운 공간이다. 여기에 잘나가는 변호사였다가, 패소한 의뢰인이 눈앞에서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번-아웃 증상이 와 삶의 쉼표가 필요한 솔렌이 자원봉사를 하러 온다. 처음엔 살아온 환경이 극과 극이라 마음의 한구석조차 내어주지 않던 이들은 점차 서로를 보듬는 관계가 되고, 이 과정에서 솔렌도 자신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된다.
"그중에는 심각한 병이 있는 이들도 있어요. 알코올 의존증이나 마약 중독 문제를 지닌 경우도 있고요. 또 과도한 빚에 짓눌린 사람들도 있죠."
과거 매춘부였다가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범죄자로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들, 장애 때문에 경제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다양한 경로로 프랑스 땅을 밟은 이주민 혹은 난민 여성들도 있었다." - P 70
소설의 다른 한 축은 '여성 궁전'의 설립자인 구세군 블랑슈 페롱의 이야기로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이런 거룩한 공간이 생기게 되었는지 1925년부터 시작해서, 공간이 설립된 '26년을 거쳐 블랑슈의 마지막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친 아낌없는 헌신과 봉사가 그려진다. 이 건물터는 과거 은거 수녀 공동체가 운영하던 수도원이 있던 자리로, 풍문에 의하면 17세기 유명한 문필가였고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주인공인 시라로 백작이 여기 궁전 아래 묻혀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결핍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거든요. 가족의 식탁에서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는 사람이 늘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 P 205
세상에는 뭔가를 창작해야만 하는 드물지만 축복받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을 쓴 래티샤 콜롱바니가 그렇다. 국내에 소개된 오드리 토투 주연의 <히 러브스 미>를 만든 영화감독이기도 하며,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건 물론이고 가끔 출연까지 한다고 한다. <여자들의 집>은 <세 갈래 길>에 이은 콜롱바니의 두 번째 소설이다.

굳이 '페미니즘'이란 좁은 틀로 구속하지 않아도 될 빼어난 여성 서사다.
'여성 궁전'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여성들의 다양한 사연은 여성 작가의 손끝에서 커다란 공감과 따뜻한 연대로 마무리된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갈 처절한 여성의 삶은 분노를 자아낸다. 아직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관습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여성 할례, 같은 노숙이라도 여성 노숙자는 늘 성폭력의 위험에 놓여있고,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도 남편의 폭력은 부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주위 사람에 대한 신경질로 존재의 이유를 찾던 '상처 입은 짐승'이었던 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저자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건물 거주자는 물론, 자원봉사자들을 만나는 데 1년 이상의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형태로든 취약성을 안고 있고, 저마다 폭력과 무관심을 경험한, 사회의 주변부 최하층에 속한 소설 속 여성들의 이야기는 생생하게 활자로 살아난다.
"여성 학대란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야.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명체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분출하는 이 파괴 욕구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 P 220
한 봉사 단체에서 5년 이상 활동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진실로 도움을 받고 치유가 된 건 내 영혼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솔렌도 사실은 정신적인 피로감과 우울증 극복을 위해 봉사 활동을 도피처로 삼은 거였지만 결국은 본인 자신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는 깨달음과 더불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보여주는 각자의 삶이 정교하게 교차하는 <여자들의 집>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새삼 느끼게 하는 좋은 작품이다. 저자의 데뷔작 <세 갈래 길>이 너무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