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 이택광 묻고 지젝 답하다
슬라보예 지젝.이택광 지음 / 비전C&F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중국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했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몇 달의 세월이 흐르고 '코로나'라는 단어는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전 지구적인 팬데믹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간단한 인연이 아니었던 거고, 일상생활의 기본값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방송이나 출판가에서 코로나는 반드시 다루어야 할 과제가 되었는데, SBSCNBC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말하다>라는 4부작을 기획했다. 1부 철학, 2부 정치, 3부 생태, 4부 교육으로 나누어 석학들의 고견을 들어보는 프로인데 그중 1부 철학 편에 나온 석학이 국내에 특히 인기 높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은 1부 철학 편의 내용을 책으로 엮었고, 인터뷰는 제자로 지젝을 만나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온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진행했다.(위 방송은 네이버 TV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 19 사태는 미래에 올
지구 온난화와 경제 위기에 대한 예행 연습일 뿐이다."
- 유럽의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 P 95

 

 

우선 대담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코로나에 대한 몇 가지 전제다.

1.

코로나 팬데믹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가해진 오지심장파열술이다.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무한 성장을 꾀한 자본주의 체제가 더는 계속될 수 없다는 징후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다.(P 84)

결국 이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기후 변화를 비롯한 자연재해에서 유래되었다.

☞ 오지심장파열술⇒ 다섯 손가락을 사용해 상대의 심장 주위의 혈맥을 터뜨리고 결국 심장을 파열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최강의 암살 기술로 영화 <킬 빌 2>에서 베아트릭스가 빌에게 사용한다.

2.

세계는 '코로나 이전 BC. 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 AC. After Corona'로 구분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코로나가 종말을 고한다 하더라도 결코 코로나 이전의 라이프스타일로는 돌아가기 힘들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그만큼 본질적이고 창대하다.

3.

코로나는 끝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코로나가 종식된다 하더라도 언제든 '제2, 제3의 코로나'는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코로나 이후('포스트 코로나')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뉴노멀')이며,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대처해야 하는가 세계적인 철학자 지젝의 지혜를 구한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는 기존에 선진국으로 추앙받았던 미국이나 유럽의 민낯을 보았다. 위기에 실력이 드러난다고 코로나에 대한 대응은 다소 기대 이하였고, 오히려 한국, 홍콩, 대만 같은 아시아 국가들의 대처능력이 돋보였다. 여기에 미국이나 유럽은 자유주의 정서가 강하고, 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의 통제가 심한 전체주의 경향이 강하다는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어디 가나 QR 코드를 통해 동선이 파악되고, 시시때때로 재난 관련 문자가 날라오다 보니 마치 빅브라더가 현실에 나타난 느낌마저 들지만, 지젝은 최소한 공공의 안전이라는 '선한 이유'로 통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입장이다. 다소 불편할 순 있지만 필요악이라는 견해로 읽힌다.

"생물학적 바이러스 사태가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이데올로기 바이러스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우려스럽습니다. 가짜 뉴스, 편집증적인 음모론, 인종주의 같은 것들 말이예요. 제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이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 P 89~90
 

코로나 같은 재앙이 일상을 침범했을 때, 역시 빈부의 차이는 후과(後果)가 크다.

고소득층은 부동산이라든가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을 통해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면서 큰 타격 없이 살 수 있지만,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버는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들은 언택트 기조 속에 버티기가 힘들다. 단골 카페는 물론, 심지어 오래된 노포 음식점마저 폐업한다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한국은 택배 강국이라 비대면으로 온라인 주문만 하면 편하다 하지만, 이는 택배 근로자의 노동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결국 누군가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돈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현재 세계에는 빈곤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어쩌면 바이러스의 위협보다 더 좋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감염의 위험성보다는 당장 식구들을 먹여살리고 보금자리를 구하는 일이 더 시급한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바이러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양극화는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P 87~88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각자도생이라곤 하지만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고통을 모른 척 넘어가기엔 그 수가 너무 많다.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코로나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으로 인한 후폭풍은 사회적, 국가적 대안이 필요하다. '착한 임대인 운동'이나 '재난지원금' 같은 대책이 나오긴 했지만,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고 보다 근본적인 숙고가 필요하다.

 

그럼 코로나로 인해 바뀐 뉴노멀 시대에 지젝의 대안은 무엇일까?

지젝은 조심스럽게 '전시(戰時) 공산주의(communism)'란 개념을 제안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구 소련이나 북한, 중국처럼 국가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공적 영역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적어도 '공공의 것'은 공공재로 남겨둬야 한다는 개념인데, 어떤 위기 상황에도 누구나 기본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 예를 들면 물, 전기, 쓰레기 처리, 인터넷 등은 최소한 보장돼야 한다는 거다. 이러려면 역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코로나 백신을 맞는데 비용이 아주 비싸서 저소득층은 접종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되겠나?

지젝은 적어도 자신이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최소한의 공공 영역이란 기본 요소는 살아남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가 보기에 지금은 '새로운 공동체의 삶을 발명해야 하는 정치적 상황'이다.

 

코로나가 세계적인 감염이 되면서 나라마다 이동이 차단되다 보니 자연스레 폐쇄적인 쇄국정책을 취하게 된다. 미국은 코로나 발병지로 중국 탓을 하고, 영국은 브렉시트를 단행하고, 이방인에 대한 혐오는 커진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순식간에 전 지구로 퍼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특정 나라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아프리카의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발병한 또 다른 팬데믹이 '제2의 코로나'가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나.

그래서 지젝은 결론으로 '전 지구적인 나눔과 협력'이 바탕이 되는 새로운 국제주의를 제안하며 대담을 마친다. 여기에 이택광 교수는 뉴노멀 시대의 키워드로 '그린 Green, 생명 Life, 인류애 Humanity'를 덧붙인다.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은 지젝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 중에선 가장 읽기 편하지만, 코로나 이후 뉴노멀 시대를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적잖은 통찰을 제시하는 책이다.

 

에필로그 >

대담의 마무리, 이 교수는 지젝에게 한국민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한다.

지젝은 자신은 오히려 한국인의 대응을 보며 배우는 입장이라고 특별히 더할 말이 없다고 한국을 높이 평가한다.

대담 이후 작년 말 한국은 백신 확보에 있어서는 지각생이란 사실이 드러났고, 동부구치소에서 보듯 방역에 있어서도 일부 허점이 밝혀졌다. 늘 한국 상황을 모니터링한다는 지젝의 현재 견해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대의 지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슬라보예 지젝은 경희대학교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학부 석학교수(Eminent Scholar)로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그런지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고 여러 매체를 통해 무수히 많이 인용되는 '록스타'급 철학자다. 이미 발간돼 있는 많은 저서들과 달리 <천하대혼돈>이 독보적인 까닭은 지젝의 20년 지기인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직접 제안해 원저 없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주로 2018년도 하반기에, 글쓴이가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묶은 게 <천하대혼돈>인데 그의 관심사는 전방위적인지라 전 지구의 논쟁적 사안들을 거의 망라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 현대정치와 포퓰리즘, 디지털 정치학, 문화와 권력... 그리고 '대혼돈을 넘어'까지.


"천하대란, 형세대호

천하가 대혼란이지만 기운은 상서롭다."

- 마오쩌둥, P 119


25쪽에 달하는 "우파 포퓰리즘을 향한 좌파의 응답" 정도를 제외하곤 그다지 장문의 글은 없다. 언론 기고라는 특징상 긴 분량으로 투고하긴 어려웠던 결과겠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호락호락하진 않다. 우선 보통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철학적인 용어와 인용이 많고, 이러한 단어들이 연결되는 문맥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쉽진 않다.

예를 두 개 들어보자.

"그 좌파적 변형은 칸트적 의미에서 훨씬 복잡하게 허위이다. 좀 막연하지만 하나의 적절한 상응 관계로 보면, 적대적 관계에서 적을 구성하는 일은 칸트의 도식주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 P 96

"그는 모든 특정한 정체성을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동력학이 민족적이고 성적인 정체성에도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터이다. 또한 성적인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욱더 불가능해지며', 성적 실천의 경우도 '모든 굳은 것들은 남김없이 녹아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들은 더렵혀'져서, 자본주의는 표준 규범적 이성애를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정체성과 성향의 확산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 P 205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런 사악한(!) 글을 쓰는 것도 재주다. 이런 글을 번역한 강우성 교수에게 경의를 표한다. 철학서적이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라 많이 읽진 않았어도, 이 정도면 내게는 거의 암호 해독 수준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지젝은 '급진적 보편주의자'라고 한다. 그의 관심사는 동시대의 세계 곳곳에 뻗쳐 있고, 적당히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사안에 대해 뚜렷한 소신을 밝히는 태도의 선명성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서도 뉴욕대 아비텔 로넬 교수가 제자 님로드 라이트먼로부터 당한 고소에 대해 로넬 교수를 지지하는 글을 써서 논란의 대상이 됐었던 일화가 소개된다. 오해가 있을까 봐 밝히자면, 로넬 교수는 여자고 제자 님로드는 남자로 일반적인 성폭력이나 권력 남용의 위치와는 정반대다.

사우디아라비아, 보스니아, EU, 미국, 이스라엘, 중국, 영국...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다루는 국가와 지역이다. 보통 신문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제일 안 가는 지면이 외신면이라 하는데 슬로베니아 출신의 지젝은 G2로 통용되는 미국과 중국은 물론, 여성 운전은 허용되었으나 운전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여성이 있는 사우디, 정부에 의해 살해당한 반체제 인사를 기리는 민중 집회 당시 놀랍게도 민족을 초월한 연대를 통해 작은 기적을 보여준 보스니아, 해리 왕자와 결혼한 흑인 페미니스트 때문에 시끌벅적한 영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이더망에 안 걸리는 지역이 없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지구온난화, 섹스봇, 카톨릭 교단의 소아성애 범죄, 한 장의 사진 「전쟁의 공포(The Terror of War)_닉 우트」 (워낙 유명한 베트남전 사진이라 찾아보면 금방 안다)의 페이스북 이미지 삭제로 촉발된 보도지침 논란, 1~2년 사이 부쩍 국내 언론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 '포퓰리즘' 등 동시대의 이슈를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앞서 지젝의 문장이 어렵다는 말을 했다. 마치 대학교재를 초등학교 우등생이 의욕적으로 읽고자 하는 느낌이다. 반드시 어려운 책이 좋은 건 아닐 거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고수의 한 수'겠으나 지젝은 그럴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듯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인, 아니 적어도 교양인이 되길 바라는 독자라면 세계 곳곳의 대혼돈을 파헤치고 나름 대안을 제시하는, '지젝 입문서'로는 마춤인 이 책에 도전해보길 권한다. 매번 본인 입맛에 맞는 한정된 책의 범위에서 한 번쯤은 벗어나, 읽은 이의 머릿속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문장으로 가득 찬 <천하대혼돈> 같은 책도 접해 보자. 머릿속이 더욱 혼란으로 가득 찰 수도 있지만, 잠 못 드는 밤 최적의 조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숲의 사랑
장수정 지음 / 로에스미디어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은 숲의 사랑>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국립공원에서 자연환경해설사로 일하는 장수정이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저자는 이 책 이전에 '숲을 통해 바라본 삶'을 그린 수필집 <안드로메다의 나무들>을 썼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남녀의 불륜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룬다. 

일본 샐러리맨 만화의 전설 '시마 과장' 시리즈를 즉각 떠오르게 하는 남자 주인공은 한국 이름 같지 않은 50대 '시마'로 그는 나름 탄탄대로를 달리다 건강상의 문제로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요양차 휴양림을 찾았다 그곳에서 숲 해설사로 일하는, 자살한 여동생과 많이 닮은 30대 중반의 '소유'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숲에서 사랑을 나눈다.


소설의 주요 무대는 소유가 일하는 휴양림과 근처에 위치한 시마의 별장이다. 저자의 직업이자 소유의 직업이기도 한 숲 해설사를 전면에 내세워 글로 읽는 자연도감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숲의 생태계를 이루는 나무, 동식물, 곤충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피톤치드 소설"이라고나 할까. 

사회 통념상 지탄받는 불륜을 다룬 연애소설일지라도 그들의 원초적 본능이 숨 쉬는 공간이 숲이기에, 숲이 가진 원시적인 생명력과 자연적인 치유력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소설의 독특한 오라를 뿜어낸다.

국문과 출신 장수정은 어떤 장면의 묘사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고 다양한 단어를 사용해 한글의 바다를 넓힌다. 저자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은 빈틈이 없고 밀도가 높다.

"소유의 그곳은, 역치점에 이르렀으나 검이 아니고는 끊을 수 없는 그러한 지점까지 탄성이 치솟아, 가장자리에는 두족류의 치설 같은 연질의 자디잔 돌기가 오톨도톨 돋아, 비비면 다륵다륵 빨래판 긁히는 소리를 낼 것 같았다." - P 107

세상의 모든 불륜이 그렇듯 결말은 지리멸렬하고 맑고 향기롭지 못하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혹은 '이런 게 바로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지만 시마와 소유 모두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가정의 모습 역시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 없는 외양을 유지한다.

이 둘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기승전결을 보며, 흔히 남자는 불륜을 저질러도 웬만해서는 가정까지 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통념이나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있던 소유가 결국에는 감정 변화가 심하다는 심리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겠다. 소설은 시마의 시선에서 기술되고 있지만, 정작 궁금한 건 소유였다. 시마가 조기 살점을 발라 소유에게 얹어준 그 순간 그녀는 시마에게 평생 충성하기로 맹세한다. 그리고 소유는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진정성을 가진, 순수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런 소유의 마음에 불을 지핀 건 시마지만, 그는 선을 넘기에는 너무 소심하고 유약한 중년 사내일 뿐이다. 매뉴얼대로 삼십 년간 회사 생활을 한 시마에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꽃같은 사랑에 대처할 매뉴얼이 없다.

소설 속 휴양림은 자작나무숲으로 유명한 곳이라 하는데 우선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이 떠오른다. 터널이 뚫려 구도로로는 고개를 잘 안 넘는다는 언급은 미시령 터널이 생긴 이후 미시령 옛길을 염두에 뒀나 싶고, 한국 최초의 스키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쇠락한 지역은 잘 모르겠다. 양미리와 도루묵이 먹거리로 나오는데 이건 속초를 비롯한 동해안에선 빠질 수 없는 겨울철 별미인지라 특정 지역으로 한정하기엔 내 공력이 부족하다. 강원도 지역을 잘 아는 독자라면 소설에서 묘사된 지역 제이령이 대략 어디인지 추측해보면 더욱 재미있겠다.

현직 국립공원 해설사가 공들여 쓴 <검은 숲의 사랑>에서 숲은 단순히 소설의 배경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숲이 주인공인 '숲의, 숲에 의한, 숲을 위한' 흔하지 않은 소설이다. 숲 내음 그윽한 책을 읽는 동안 BGM으로는 신이경의 <비 오는 숲>이나 GEORGE WINSTON의 <FOREST>가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장의 속성 - 사람은 어떻게 시장을 만들고 시장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레이 피스먼.티머시 설리번 지음, 김홍식 옮김 / 부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전통 시장을 가든, 백화점을 가든 아니면 손가락으로 온라인 쇼핑을 하든 인간의 상업적인 활동은 시장(market)을 통해 이뤄진다. <시장의 속성>(원제 The Inner Lives of Markets)은 최근 60년간 시장의 변화와 혁신을 이끈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창조적 이론을 일별해 보는 책으로 부제는 '사람은 어떻게 시장을 만들고 시장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발표된 가장 중요한 경제학 논문들만을 엄선해, 거기에 담긴 획기적 착상들이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현실에 적극 개입하고 시장을 설계해 실험하고 우리 삶과 세상을 변혁하기까지 이르렀는지 설득력 있게 입증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기업들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도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책의 서두를 여는 리처드 래드퍼드의 논문 <포로수용소의 경제적 조직>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시장을 만들어내고, 시장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예시라 하겠다.

조지 애컬로프의 <'빛 좋은 개살구' 시장>에선 정보 비대칭 시장의 대표적인 예로 중고차 시장을 든다. 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고객들은 호구가 되기 쉽고, '혹시 속아서 사는 거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지우기 어렵다.

최근 김하성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에 진출했단 뉴스가 들려왔는데, 5장 '경매 이론'을 통해 미국 포스팅 시스템의 변화를 소개한다. 초창기 과열에 따른 문제점을 시정한 결과 계약 규모는 김하성이 크지만 키움 구단은 과거 박병호나 강정호 때보다 적은 돈을 받게 된다. MLB 입장에선 보다 합리적인 지출 가이드라인을 만든 셈이다.

6장 '플랫폼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VISA라는 카드계의 공룡이 탄생했는지, 왜 DVD 표준화 전쟁에서 승리한 소니가 치명타를 입고 가전 제국의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는지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들려준다. 현대는 플랫폼 기업이 굴뚝 산업을 완전 이긴 듯 보이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업계의 수위를 차지한 기업은 그 강력한 파워를 남용하기 쉽다는 유혹('갑질')을 피하기 어렵다.

7장 '시장 설계와 자원 배분'에서는 '학교 배정'을 예로 들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자원 배분이 얼마나 이상향인지 논하며, 8장에선 신장 기증을 둘러싼 공정성의 문제와 공유경제 전성시대의 빛과 그늘을 살펴본다.

책에서 인용된 논문들은 대부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것들이다. 이런 논문들을 일반인들이 접할 리도 없고, 구태여 찾아 읽지도 않겠지만 <시장의 속성>은 그런 이론들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실증되었는지 잘 설명한다. 아무리 쉽게 전달한다 하나 내용이 마냥 말랑말랑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학문적인 경제 이론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그 속에 담긴 생각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이어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저자들의 노고는 매우 값지다.

교양 과목으로도 경제를 접하지 않은 내가 이 책을 온전히 다 이해했는가 다소 의구심이 들긴 한다. 다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언제나 시장은 최적화를 찾고 '시장을 이기는 정책은 없다'라는 진리와 '시장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어렴풋이 느껴진다. 인위적인 손길이 때론 필요하고, 정부는 무소불위의 통제를 통해 결과를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언제나 시장은 통제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 입안자들의 일독을 권하며, 이 책을 통해 "시장의 속성"에 대해 통찰력을 높였으면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두리 로켓 가우디 프로젝트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리즈 1편에서 우주로켓 발사의 꿈을 이루어낸 쓰쿠다 제작소. 전편에서 회사에 해를 끼치고 퇴사한 마노는 쓰쿠다의 도움으로 연구소에 재직 중인데, 생소한 의료기기 분야 협업을 쓰쿠다에게 제안한다. 

이름하여 '가우디 프로젝트!'

<변두리 로켓> 시리즈 2편은 이 가우디 프로젝트의 탄생에서 성공까지의 과정을 따라간다. 물론 정해진 악역들이 등장하고, 언제나 그리고 시리즈의 남은 앞으로도 그렇듯 변두리 공장 쓰쿠다 제작소의 무기는 오로지 "품질 하면 쓰쿠다, 쓰쿠다 프라이드" 기술에 목숨 거는 장인 정신이다.

수술 실력은 '신의 손'이요, 논문 또한 탁월하지만 흑심 있는 지도 교수에게 공을 뺏긴 지잡대 출신 명의 이치무라, 딸아이 죽음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생업마저 팽개친 사쿠라다, 특허받은 기술력은 인정받지만 언제나 불면 날아갈 중소기업이라고 괄시 받는 쓰쿠다, 이 3인방이 모여 출세에만 눈이 먼, 오만방자한 갑들의 연합군에게 결국 회생 불가한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이야기가 언제나처럼 통쾌하게 펼쳐진다. 이치무라를 물 먹인 기후네 입장에서는 본업보다는 성공의 사다리에만 집착하다 결국 의사의 소명을 깨닫는 처절한 실패담이다.

다만 학습효과의 영향일까 내러티브 안에서 짜인 위기와 갈등 요소는 결국 쓰쿠다의 승리로 귀결되리란 걸 미리 당연하게 예측하고 읽기에 긴장감은 전작들보다 덜한 느낌이었다. 작년 이후 발간된 이케이도 준의 책은 모두 읽었고, <가우디 프로젝트>는 8번째 도서다. 이젠 익숙함이 되어버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전편의 로켓 개발도 그렇지만, 이번 소설의 주요 소재인 인공판막 관련된 세부 묘사는 그럴듯한데,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에선 무리 없이 설득력을 지닌다.

명대사 몇 개로 마무리한다.

"요즘 세상에 성실함이나 한결같은 노력을 강조하면 구식이라고 비웃음당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사람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건 그것뿐이야." - P 346

"뭐, 일도 많고 탈도 많고 복도 많고."

쓰쿠다는 말했다.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 - P 391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까요. 꿈이 없는 일은 그냥 돈벌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재미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 P 4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