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 이택광 묻고 지젝 답하다
슬라보예 지젝.이택광 지음 / 비전C&F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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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중국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했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몇 달의 세월이 흐르고 '코로나'라는 단어는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전 지구적인 팬데믹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간단한 인연이 아니었던 거고, 일상생활의 기본값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방송이나 출판가에서 코로나는 반드시 다루어야 할 과제가 되었는데, SBSCNBC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말하다>라는 4부작을 기획했다. 1부 철학, 2부 정치, 3부 생태, 4부 교육으로 나누어 석학들의 고견을 들어보는 프로인데 그중 1부 철학 편에 나온 석학이 국내에 특히 인기 높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은 1부 철학 편의 내용을 책으로 엮었고, 인터뷰는 제자로 지젝을 만나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온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진행했다.(위 방송은 네이버 TV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 19 사태는 미래에 올
지구 온난화와 경제 위기에 대한 예행 연습일 뿐이다."
- 유럽의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 P 95

 

 

우선 대담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코로나에 대한 몇 가지 전제다.

1.

코로나 팬데믹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가해진 오지심장파열술이다.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무한 성장을 꾀한 자본주의 체제가 더는 계속될 수 없다는 징후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다.(P 84)

결국 이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기후 변화를 비롯한 자연재해에서 유래되었다.

☞ 오지심장파열술⇒ 다섯 손가락을 사용해 상대의 심장 주위의 혈맥을 터뜨리고 결국 심장을 파열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최강의 암살 기술로 영화 <킬 빌 2>에서 베아트릭스가 빌에게 사용한다.

2.

세계는 '코로나 이전 BC. 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 AC. After Corona'로 구분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코로나가 종말을 고한다 하더라도 결코 코로나 이전의 라이프스타일로는 돌아가기 힘들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그만큼 본질적이고 창대하다.

3.

코로나는 끝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코로나가 종식된다 하더라도 언제든 '제2, 제3의 코로나'는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코로나 이후('포스트 코로나')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뉴노멀')이며,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대처해야 하는가 세계적인 철학자 지젝의 지혜를 구한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는 기존에 선진국으로 추앙받았던 미국이나 유럽의 민낯을 보았다. 위기에 실력이 드러난다고 코로나에 대한 대응은 다소 기대 이하였고, 오히려 한국, 홍콩, 대만 같은 아시아 국가들의 대처능력이 돋보였다. 여기에 미국이나 유럽은 자유주의 정서가 강하고, 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의 통제가 심한 전체주의 경향이 강하다는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어디 가나 QR 코드를 통해 동선이 파악되고, 시시때때로 재난 관련 문자가 날라오다 보니 마치 빅브라더가 현실에 나타난 느낌마저 들지만, 지젝은 최소한 공공의 안전이라는 '선한 이유'로 통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입장이다. 다소 불편할 순 있지만 필요악이라는 견해로 읽힌다.

"생물학적 바이러스 사태가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이데올로기 바이러스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우려스럽습니다. 가짜 뉴스, 편집증적인 음모론, 인종주의 같은 것들 말이예요. 제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이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 P 89~90
 

코로나 같은 재앙이 일상을 침범했을 때, 역시 빈부의 차이는 후과(後果)가 크다.

고소득층은 부동산이라든가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을 통해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면서 큰 타격 없이 살 수 있지만,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버는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들은 언택트 기조 속에 버티기가 힘들다. 단골 카페는 물론, 심지어 오래된 노포 음식점마저 폐업한다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한국은 택배 강국이라 비대면으로 온라인 주문만 하면 편하다 하지만, 이는 택배 근로자의 노동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결국 누군가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돈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현재 세계에는 빈곤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어쩌면 바이러스의 위협보다 더 좋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감염의 위험성보다는 당장 식구들을 먹여살리고 보금자리를 구하는 일이 더 시급한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바이러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양극화는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P 87~88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각자도생이라곤 하지만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고통을 모른 척 넘어가기엔 그 수가 너무 많다.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코로나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으로 인한 후폭풍은 사회적, 국가적 대안이 필요하다. '착한 임대인 운동'이나 '재난지원금' 같은 대책이 나오긴 했지만,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고 보다 근본적인 숙고가 필요하다.

 

그럼 코로나로 인해 바뀐 뉴노멀 시대에 지젝의 대안은 무엇일까?

지젝은 조심스럽게 '전시(戰時) 공산주의(communism)'란 개념을 제안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구 소련이나 북한, 중국처럼 국가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공적 영역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적어도 '공공의 것'은 공공재로 남겨둬야 한다는 개념인데, 어떤 위기 상황에도 누구나 기본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 예를 들면 물, 전기, 쓰레기 처리, 인터넷 등은 최소한 보장돼야 한다는 거다. 이러려면 역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코로나 백신을 맞는데 비용이 아주 비싸서 저소득층은 접종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되겠나?

지젝은 적어도 자신이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최소한의 공공 영역이란 기본 요소는 살아남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가 보기에 지금은 '새로운 공동체의 삶을 발명해야 하는 정치적 상황'이다.

 

코로나가 세계적인 감염이 되면서 나라마다 이동이 차단되다 보니 자연스레 폐쇄적인 쇄국정책을 취하게 된다. 미국은 코로나 발병지로 중국 탓을 하고, 영국은 브렉시트를 단행하고, 이방인에 대한 혐오는 커진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순식간에 전 지구로 퍼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특정 나라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아프리카의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발병한 또 다른 팬데믹이 '제2의 코로나'가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나.

그래서 지젝은 결론으로 '전 지구적인 나눔과 협력'이 바탕이 되는 새로운 국제주의를 제안하며 대담을 마친다. 여기에 이택광 교수는 뉴노멀 시대의 키워드로 '그린 Green, 생명 Life, 인류애 Humanity'를 덧붙인다.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은 지젝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 중에선 가장 읽기 편하지만, 코로나 이후 뉴노멀 시대를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적잖은 통찰을 제시하는 책이다.

 

에필로그 >

대담의 마무리, 이 교수는 지젝에게 한국민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한다.

지젝은 자신은 오히려 한국인의 대응을 보며 배우는 입장이라고 특별히 더할 말이 없다고 한국을 높이 평가한다.

대담 이후 작년 말 한국은 백신 확보에 있어서는 지각생이란 사실이 드러났고, 동부구치소에서 보듯 방역에 있어서도 일부 허점이 밝혀졌다. 늘 한국 상황을 모니터링한다는 지젝의 현재 견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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