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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은 틀 같은 고시원 방에서 짐을 싸던 나는 책상 한 쪽에 놓여있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책의 제목과 함께 겉표지에 실려 있는 화사하게 비춰주는 햇살을 받고 있는 작은 초록빛 화분 곁에 나는 주저 없이 앉았다. 지금 나는 그 누군가의 대화가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어수선한 마음을 다른 이에게 털어 놓기는커녕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는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심산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저자는 둔감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펼치며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이라는 안개 속에 사로잡힌 자신을 만나게 해주었다. 둔감하다는 말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둔감력 또한 별 다는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알고나서부터는 나에게 꼭 필요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긴긴 인생을 살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일이나 관계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는. 그런 강한 힘을 뜻하는 것이 바로 둔감력이라고 했다. 그 뿐인가? 재미로 확인해보는 둔감력 체크리스트에서 체크한 개수가 17개로 폭발직전으로 둔감력이 절실하다는 결과는 단순히 재미로만 넘기기에는 놀라움에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처럼 나도 둔감하게 살기로 결심하며 저자와 마주한다.
먼저 둔감력은 개인은 물론 친구, 가족, 이성 등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응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마음이 둔감함으로써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설사 병에 걸렸다고 해도 완치될 확률도 높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사람은 그 바탕에 재능은 물론 반드시 좋은 의미의 둔감력을 지니고 있다. 둔감력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한껏 키우고 활짝 꽃피우게 하는 가장 큰 힘인 것이다. 또 주변의 잔소리와 야단을 맞아도 둔감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대충 흘러 넘기고, 귀 기울여 듣지 않음으로써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유지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둔감한 사람의 마음과 혈관은 언제나 열려 있어 온 몸에 피가 원활하게 흐르도록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민할수록 몸이 더 아프고 마음도 따라 괴로우니 조금은 둔감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한다.
순간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나는 실패와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냥 부딪치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공부할 때는 단순하게 그 순간만, 그 날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툭하면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고 앞으로의 날도 막연함에 불안해하고, 그렇게 해서 집중하지 못하면 다시 또 후회하고. 그런 날을 반복하며 시험결과가 좋지 않으면 나의 ,주위의, 세상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리고나서 마지못해 선택을 하고, 다시 또 되풀이 되고. 그러다보니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준비를 해온 3년의 세월을 되짚어볼 겨를도 없이 마치 도망치듯 짐을 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이 짜 놓은 판에 섯불리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나다운 것은 무엇이고 지금의 나를 극복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무엇인가 꿈툴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연한 불안함 대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자리 잡는 것 같았다. 그 힘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사랑,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사랑에 관하여는 마치 조각난 피자가 모여 하나가 되는 것처럼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그 속을 들여다봄으로써 완성되어가는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둔감력은 연애를 할 때.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 할 때 강력한 무기가 되고 결혼생활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사랑을 하려면 무엇이든 받아주겠다는 아량에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관대해져야 하고 예민한 마음을 버리라고 한다. 아직까지 나는 주는 것 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있어 사랑에 서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받는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주고받는 사랑으로 사랑이 전해주는 행복을 맛보고 싶어졌다.
둔감력은 창조주가 여성에게만 내려준 특별한 능력이라는 말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흔히들 신체적인 조건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더 강하다고 말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 특히 출혈, 추위, 고통에 강한데 이것은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지는데 여성 몸의 두터운 지방층은 임신기간 동안 산모와 태아를 보호해주고 출산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며 출산과정에서도 과다출혈이 일어나도 쉽게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만든 것 모두 창조주의 배려인 것이다. 정말이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당연하게 여겨왔으면서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부분을 짚어주는 작가의 섬세함에 다시 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머니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둔감력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사랑스럽게 여기고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은 둔감력이 자라는 출발점이라며.
문득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을부터 나를 위해 백일기도를 시작한 엄마는 대학교에 합격할 때까지, 거의 천일동안 절에 다니셨다. 가끔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도, 그렇게 해도 별 의미가 없다고 퉁퉁거려도 엄마는 짐짓 모른척하고 새벽이면 절로 향했다. 그 모습이 바로 저에 대한 엄마의 믿음이었다. 지금 나는 실패를 경험한 게 아니라 실패했을 때를 대비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라는 말로 힘을 실어 주고 가끔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낸 만큼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용기를 갖게 해주고, 어떤 때는 이유 없이 화를 내는 나를 그저 품에 안아주어 든든한 곁이 되어주고.
그리고 4수를 결정하고 나서는 몸은 물론 마음까지 지쳐버린 나를 데리고 태백산에 갔었어요. 하늘과 제일 가까운 천제단에서 나는 물론 엄마의 간절함을 담아 기도를 드리고.......엄마의 위대한 둔감력에 든든함을 갖게 된다.
미래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어감이 주는 묵직함만큼 자세를 고쳐 앉게 했다. 그리고 아직은 삶을 논하기에는 어리다는 생각으로 무심했기 때문에 들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야겠다는 치기어린 결심도 갖게 되었다.
세계를 향해 날개짓하며 새 시대를 일궈나가기 위해 자신에게 둔감력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둔감력이 있으면 소중히 여기고 없으면 다양한 환경에 뛰어들어 훈련하라고 한다. 둔감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외부환경에 대처하고 익숙해지는 환경적응력을 기르고, 모든 일에 호기심을 품고 좋은 의미에서 둔감하게 반응하며 주저 없이 도전하라는 것도. 잘 자고 잘 일어나는 수면력으로 잠자는 숲속의 어른으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일이나 관계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야한다는 말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코끝이 싸아해졌다. 지금의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아 주변의 기대도 컸다. 우등생에 모범생으로 자란 나에게 공부는 자존감을 세워주는 길이었는데 수능 때부터 공부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로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다. 재수, 삼수, 사수까지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고 보니 남들보다 늦었다는 조바심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대학생활도 조기졸업을 목표로 학업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그동안 모른척 하고 있었던 내 꿈이 조금씩 되살아났고, 급기야 나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올해 30세로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게 결심하기까지 나도 쉽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나보다 더 걱정을 하고 있어 부담이 되곤 한다. 다시 외무고시 시험을 준비하면 다시 또 늦어진다는 사실이, 또 수능 때처럼 한 번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젊음을 오롯이 책상 앞에 앉아 보내면서도 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면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결과에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몸은 물론 마음까지 지쳐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에 짐을 싸게 된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려보았던 미래, 내가 바라는 미래는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작가와 강인한 둔감력에 대한 대화로 막연하고 불안하던 내일을 마주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함이야말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재능이라는 것을. 예민함이나 순수함도 그 바탕에 둔감력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재능으로 빛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가슴 한 쪽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손길에 힘을 주어 그동안 널브러져있던 시간을 정리하며 막연한 불안함 대신 새롭게 시작할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스스로 내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나를 사랑하는 게 먼저라는 것을. 조금 둔감하게 살아도 괜찮으니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더 이상 무례하고 사소한 것들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여 꼭 합격해야한다는 것을. 그렇게 둔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새 나는 초록빛 화분이 되어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마음의 키가 한 뼘쯤 자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