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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인류학 - 신화와 문화로 살펴보는 죽음과 삶의 풍경
이경덕 지음 / 원더박스 / 2026년 4월
평점 :
현시대, 인류의 수명이 늘고 과학적이다 과학적이지 않다로 구분되면서 마음 그 자체보단 모든게 정신이라는 뇌과학 체제로 해석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지 않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루를 충실히 하자고 하지만, 죽은 뒤 후일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만큼 또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불과 20~30년대만해도 종교, 무속과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을 통제하는 것들은 우리의 행동과 말에 주의를 하게 했고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는 세계에선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왔을 때의 일을 반영하니 조심히 살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라는 성경구절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할것, 죄짓지 말것을 강조한 세대는 지나버렸다.
어쩌면 나는 종교를 믿기 때문에 현생을 잘 살려고 하는지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복을 위해서 소멸될 때까지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저주받지 않으려면 선하게 살아야 하고, 내 후손과 내 주변사람들이 편하려면 더욱 선해야 한다.
귀신이 되더라도 '귀' 나 '령' 이 되어 무슨 일이 있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구천을 떠돌아 원한을 품고 무슨 짓을 벌이고 싶지도 않고, 나한테 당한 사람이 구천을 떠돌아 남을 헤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조심하고, 그리고 그런 영향력을 퍼뜨릴걸 생각하면 살아있으면서 보고듣는것 느끼는 것 모두 더 지혜롭게 굴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으로 소멸되는 죽음도, 영과 상관없이 내가 죽는다는 것, 소멸된다는 걸 생각하면 최소한 소멸될 때 까지만이라도 좋은 이미지만 가지고 마무리할것같고, 내 인생이 '언젠가는' 이라는 전제의 '시한부'라고 생각하면 이렇듯 겸손해진다.
자본주의 시대, 죽음에 대한 공포 또는 죽음이 내 일은 아니라는 인식이 건강하지 못한 국가 인식과 윤리를 만들어가는 걸 보면 소름이 안끼칠 수가 없다.
'나는 뭘 하든 미련이 없다' 이런 인식이 이 얼마나 무서운가.
내가 뭘 하든 미련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무슨 영향을 끼치든 상관이 없는것까지도 나아가는 것이다.
사는 생애또한 최선을 다한다는 건, 잘 살아 있는것 뿐만 아니라 죄없이 나쁜 후회없이 즉 '후회없어서 미련없는' 삶으로 마침표를 찍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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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장수의 시대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동시에 살아 있는 시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초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요. 이전에 그 누구도 가 보지 않았던 길이기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따라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군데군데 뾰족한 압정이 떨어져 있는 깜깜한 방을 맨발로 가로질러 가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기보다는 압정을 밟지 않도록 발을 끌듯이 조금씩 앞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_ 205
- 그렇지만 삶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죽음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삶과 죽음은 하나로 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이 무조건 좋을 수만은 없으며, 따라서 삶이 좋고 죽음이 나쁘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노년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고통과 괴로움과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어 주는 죽음" 이라고 적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삶을 예찬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의 긍정성을 발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