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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황진순 지음 / 가하 / 2010년 10월
평점 :
읽는 내내 흡족함을 느끼게 했던 황진순 작가의 <그림자>. 대개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재벌가의 딸과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해가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수완과 오직 수완의, 수완에 의한, 수완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수완의 그림자 휘건. 두 사람의 일편단심 강렬하고 강인한 사랑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없는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 짙은 소유욕은 부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
<그림자>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정통 로설에서 벗어난 듯한 남녀의 구도였다. 수완과 휘건, 두 사람 사이에서 굳이 강자를 고르자면 단연 수완이다. 탄탄한 뒷배경을 지니고도 있지만 외모, 능력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수완은 지금껏 모든 것을 제 힘으로 이뤄냈다. 누군가에게 굴복해본 적도 없고 정상에서 사람들을 명령하는데 익숙한, 마초적인 성격의 여자이다.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그 누구보다 제 할아버지를 닮아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그녀를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녀의 배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직 제 능력으로 젊은 나이에 백화점 대표이사의 자리까지 오른, 사업에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완이기에. 그런 수완은 휘건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우위에 있다. 사업적인 일에서만큼은 제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면서 휘건과 함께 하는 사적인 시간에는 온전히 그에게 대접받길 원한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다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이기심이 있기에 그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어떠한 장애물에도 굴복하지 않고 제 사랑을 지킬 줄 안다. 지극히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거칠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 수완. 그녀가 너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어서 이 글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보통 남녀 주인공 중 한 캐릭터가 강하면 다른 캐릭터가 그에 밀려 묻히곤 하는데 <그림자>는 달랐다. 강하고 매력적인 수완만큼이나 강인하고 남자다운 휘건, 그는 결코 수완에게 밀리지 않는 멋진 남자였다. 경호 팀장으로서 수완의 그림자인양 그녀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는 그는 그 누구보다 수완을 사랑할 뿐 아니라 소유욕도 강한 남자이다. 수완에 비해서 배경이 밀릴 뿐이지, 그 외에는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그. 조각 같은 외모와 몸매에 예의 바르고 성격 좋지, 능력 있지 싸움도 잘하는 휘건은 그 누구보다 남자답다. 그런 그가 수완 앞에서만큼은 한 없이 약하다. 파워면에서 약한 게 아니라 그저 제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져주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수완이 싫어하는 건 하기 싫고 수완에게 상처 되는 일은 하고도 싶지 않은 그야말로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수완 바라기인 그의 모습에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제 여자밖에 모르는데다 소유욕 짙은 절륜남인 그를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네가 백날 날뛰어봐야 휘건 형 손바닥 안이란 말이지. 형이 얼마나 약았는데.”
-<그림자> 272쪽 中 민완의 대사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수완과 휘건 두 사람 중 수완이 휘건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하고 그를 리드한다고 느껴지지만 수완의 둘째오빠인 민완의 말처럼 휘건이 더하면 더했지 견주어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미팅이나 해볼까 하고 그냥 내뱉은 수완의 말에 네가 미팅을 하면 나도 하겠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법으로 그녀를 단속하는 휘건의 귀여운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아닌 듯 보이지만 두 사람 관계를 리드하는 사람은 바로 휘건이라 생각한다.
“수완이만 보고 살겠습니다. 평생 그녀석의 수족이 되어 외롭지 않게 하겠습니다. 수완이 위해서만 존재하겠습니다. 사는 동안 그 녀석을 위해서만 살겠습니다. 그 녀석 없인 숨도 쉬지 않겠습니다.”
-<그림자> 296쪽 中 수완의 母 조경자 여사에게 제 진심을 고하는 휘건
멋진 한 남녀의 뜨겁고도 강인한 사랑. 그 모습에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휘건의 멋진 사랑을 받을만한 수완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수완이 부러웠다. 수완 없이 숨도 쉬지 않겠다는 멋진 남자, 휘건.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황진순 작가가 그려내는 남주는 아주 멋지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중 휘건이 그야말로 넘버 원! 수완과 식사를 할 때도 그녀를 실컷 챙겨주고서야 제 수저를 들고, 바쁜 와중에도 제 아내의 속옷과 스타킹을 정성껏 손빨래하는 바람직한 남편상까지 보여주는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달라지지 않아.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대로 쭉 살 거야. 달라지지 않아. 달라질 생각 없어. 달라지기 위해 노력 같은 것도 하지 않아. 배려 안 해. 나 말고 다른 건 신경 안 써. 오직 나만 중요해. 지금껏 그렇게 살았고, 남은 날들이라고 다를 것 없어. 나 이수완은 결혼을 해도 이수완이야. 아내가 할 일 같은 거 몰라. 집안일 따위는 더더욱 몰라. 배울 생각도 없어. 나밖에 모르고, 내 것밖에는 모르는 이수완. 그게 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결혼을 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아. 오빠도 달라지지 마. 내가 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오빠도 달라질 수 없어. 허락 못 해. 불공평해도 할 수 없어. 이미 말했다시피 난 나밖에 몰라. 그러니 오빠가 참아. 오빠가 숙여. 오빠가 배려해. 오늘처럼, 어제처럼,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매사 다 오빠가 져줘. 오빠가 굽혀. 무조건 나부터 챙겨. 나만 봐. 나 없는 곳에선 웃지 마. 나 아닌 여자와는 밥도 먹지 마. 나 아닌 여자가 오빠 훔쳐보게도 하지 마. 그 꼴 안 봐. 발톱부터 머리칼 한 올까지 강휘건의 속속들이 다 나 이수완 거야. 명심해. 절대 잊지 마. 사는 동안도 그렇지만, 죽어 뼈가 썩어도 강휘건은 나 이수완 거야.”
-<그림자> 318~319쪽 中 휘건에게 청혼하는 수완의 대사
비록 사생아이긴 하나 재벌가의 딸이자 그룹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수완이 휘건과 맺어지는 게 쉽지 않는 게 당연지사. 애초부터 휘건을 수완의 배필로 생각했던 조부 이 회장과 달리, 딸인 수완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보이는 수완의 모 조 여사. 그녀는 제가 배 아파 낳은 딸임에도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 딸을 수단으로 삼고 어느새 진정한 모정을 잊어간다. 휘건을 무시, 냉대하고 갖은 수단을 통해 딸과 휘건의 사이를 방해하려 한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온갖 호사를 누리지만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녀였기에. 시아버지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남편과도 멀어지고, 딸인 수완과도 여느 모녀와는 다른 메마른 사이가 되어버린 조 여사. 그 모든 게 그녀의 업보이고 자업자득이지만…….
남이 반대한다고 제 의지를 꺾을 수완이 아니기에,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을 휘건이었기에 조 여사의 반대는 오히려 수완과 휘건의 사이를 견고하게 한다. 수완이 휘건과의 결혼을 속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뒤늦게라도 조 여사가 뉘우치고 휘건에게 사위 사랑을 펼쳐서 다행이었다. 끝까지 수완과의 관계가 개선되지는 않지만 점점 변해가는 조 여사이니 시나브로 달라지겠지.
에필로그에서 수완을 빼닮은 수완과 휘건의 2세, 은서의 등장에 빵 터졌다. 어린 게 얼마나 야무지고 고집이 센지! 수완과 휘건의 우수한 인자만 이어받은 은서의 영악한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제 어미인 수완이 먼저 휘건을 찜했듯 <갈증>의 주인공이었던 태욱과 서인의 2세인 인욱을 찜해버리는 은서. 은서와 인욱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했는데 외전에서나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제 짝으로 먼저 점찍은 것도 휘건을 곁에 두기 위해 먼저 행동한 이도 수완. 청혼마저도 먼저 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수완 답다고 생각했다.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그녀, 배려 받는 이도 이기는 이도 항상 자신이라는 이기적인 그녀이지만 결코 밉지가 않은 수완이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이 더 사랑스러운 건 왜일까.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한 그녀이지만 그 누구보다 휘건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변하지 않겠다는 말이 휘건을 향한 그녀의 마음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임을 알기에 그저 그녀의 용기 있고 당찬 사랑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매력적인 주인공들, 강렬하면서도 견고한 사랑. 작가의 힘 있는 필력과 흡입력 느껴지는 전개에 몰입이 잘 되었다. 열정적인 캐릭터만큼이나 정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수완과 휘건의 모습도 흥미로웠지만 캐릭터의 개성적인 성격과 구도,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던 <그림자>였다.